미사일 & 로켓 무기

욤키푸르 전쟁시 이집트군의 소련제 SA-6 게인플 지대공 미사일- Egyptian SAM-6 Gainful Missile in 1973 Yom Kippur War

슈트름게슈쯔 2015. 12. 8. 13:26









욤키푸르 전쟁시 이집트군의 소련제 SA-6 게인플(2K-12 Kub)지대공 미사일 - 1973년 





이집트 전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제4차 중동전 당시 미사일 공격에 격추 되어 파괴된 

이스라엘 공군의 미국제 A-4 전투기의 꼬리 날개 부분 잔해 


이스라엘 공군기는 아랍군의 소련제 지대공 미사일 SA-6에 무수히 격추가 되었다. 

제4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은 승리했으나 심리적으로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지구촌의 화약고 중동에서의 제 4차 중동 전쟁은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의 선제 기습공격으로 시작되었다. 

이 날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축제일인 욤키푸르(사죄의 날) 이었다.

이스라엘의 많은 병사들이 욤키푸르(사죄의 날) 때문에 휴가를 떠난 이때

 이집트군의 병력은 75만, 무기들은 탱크 3,200대와 

소련제 미사일(SA-6) 까지 총동원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그에 비하여 이스라엘군의 병력은 이집트군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기들도 이집트군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개전 48시간 만에 이스라엘의ㅏ 17개 여단이 전멸되었다.

시리아 역시 소련제 무기를 앞세우며 이스라엘 영내로 진격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이때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대적 지원을 해주었다. 

그 전쟁에서 소련이 35억 달러를 아랍국에, 미국이 22억 달러를 이스라엘에 쏟아부었다.

 미국은 30일간 포위됐던 이스라엘에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무려 5,566번의 비행 수송작전을 펼쳤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반격에 나섰다.

그리하여  비교적 허약한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집중포격했다. 

골란 고원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시리아 군 탱크 867대, 차량 3,000대 이상을 파괴했다

제 4차 중동전쟁은 욤키푸르날에 일어난 전쟁이라서 욤키푸르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현대의 전쟁은 전자전이며  전자전에 따라 현대전의 승패가 좌우된다.

북한도 전자전의 중요성을 파악한 것으로 보아 머지않아 이 분야에 주력하게 될 것이다. 

현대전에서는 전자기술이 빈약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실제로 1973년 제4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은 이것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후 이스라엘은 전쟁 초기의 실패를 통해 정보전과 전자전에 더 힘을 기울이게 됐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전문을 보냈다.   ‘

아랍이 당신들을 공격할 것으로 보인다.’

  카이로에 소련 군사고문단이 상주하던 이집트는 시리아와 연합, 비밀리에 전쟁을 준비했다. 

CIA는 첩보를 통해 중동전이 벌어질 가능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1973년 10월 4일, CIA는 전쟁을 경고했으나 이스라엘 군정보부 아만(AMAN)은 이렇게 회신을 보냈다. 

‘우린 그들이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정보기관 모사드(Mossad)도 시리아의 스파이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고 아만에 여러 차례 경고했다. 

그러나 보안 분야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아만은 그 정보를 무시했다. 

그들의 견해는 ‘당분간 전쟁은 없다’였다. 

CIA가 경고한 지 이틀 뒤, 중동전 사상 최대의 기갑전력을 앞세운 

시리아군과 이집트군이 이스라엘을 선제 기습했다. 

이스ㅜ라엘의 수도 텔아비브 전역에는 비상경보가 울리고 

직장에서 일하던 수만 명이 각자의 부대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적의 맹렬한 포격으로 최전선의 이스라엘군은 전사자가 끝없이 늘어났다.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그들에게 사령부의 지시가 내려왔다. 

 ‘지원부대 도착 때까지 48시간만 바 레브 방어선(Bar Lev line)을 사수하라.

’  최전선에 배치된 병사들은 경험이 부족한 10대 후반의 청소년이었다.

 이들은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500명 이상이 대포 밥이 돼 전사하고,

 1000여 명이 부상하면서 방어선은 아랍군에 뚫리고 말았다. 

최전선의 이스라엘 기갑여단은 시리아군 기갑부대에 전멸되다시피 했다.  

이스라엘 공군기는 아랍군의 소련제 지대공 미사일 SA-6에 무수히 격추됐다. 

레이더 추적을 피하려고 저공으로 내려온 항공기는 

대공자주포(對空自走砲)의 매복에 걸려 100여 대가 격추됐다. 

피해가 감당할 수 없이 커져 국경선이 무너질 위협에 직면하자 이스라엘군 수뇌부는 핵공격을 준비했다. 

20kt(킬로톤)의 핵폭탄으로 이집트 카이로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집트에 핵탄두를 제공하라  이 전쟁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적을 향해 떠났던 이스라엘군 장거리정찰대가 사령부에 다급한 보고를 해왔다.   

‘이집트 2군과 3군 사이에는 분명한 간격이 있다.

’  사령부는 긴급작전을 전개했다.

 정보를 토대로 반격을 시작한 이스라엘군은 수에즈 운하 도강작전에 성공했다.

 교두보가 확보되자 아리엘 샤론 육군소장이 지휘하는 기갑부대가 이집트 내륙으로 진격했다.

  전쟁 초기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이스라엘 공군은 대항 수단을 찾아냈다. 

공군정보부는 전자정보(ELINT)를 수집했다. 

그들은 전자정보를 통해 전자지원책(Electronic Support Measures)을 시작했다. 

정보처리 프로세스가 완성되자 적 레이더의 위치가 파악되고 병기 식별이 가능해졌다. 

 이스라엘 공군기들은 미사일 기지를 파괴할 것인지, 

우회할 것인지를 결정하며 제공권을 장악해나갔다.

 그들은 300대 이상의 아랍기를 격추했다. 

공중 지원이 이뤄지자 이스라엘 육군은 이집트 3군을 사막에 고립시켰고 아랍의 방위선은 무너졌다.

 전세가 역전돼 이집트가 위험해지자 소련이 위협했다.  

 ‘더 진격하면 우리가 직접 개입하겠다.

’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이스라엘의 총리 골다 메이어에게 전쟁을 중지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이스라엘 병사 2500여 명이 전사한 제4차 중동전은 이렇게 끝이 났다.

  이스라엘은 국경이 무너지는 사태를 두려워했다. 

이들은 최후의 순간을 대비해 ‘예리코(Jericho)’ 지대공 미사일에 핵탄두를 장착했고,

 미국은 이 사실을 고공정찰기 SR-71 블랙버드가 수집한 정보를 통해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당시 600만 인구가 1억5000명이 넘는 적대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어

 모든 문제는 최종적으로 생존과 직결됐다. 

이미 정치적 결정이 내려져 있던 이스라엘은 국경을 침범당했다면 핵무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미 육군과 공군의 고급 정보장교였던 리처드 프리드먼 예비역 대령과

 윌리엄 케네디 예비역 대령은 공동저술인 ‘정보전쟁(The Intelligence War)’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닉슨 대통령은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에게 사태를 설명한 후, 

소련이 이집트에 판매한 스커드 미사일에 핵탄두를 제공하더라도 묵인하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서로 반격(counterpunch)하는 

모로 수습하는 선에서 끝낼 것을 합의했다.”  

닉슨이 브레즈네프와 위성을 통한 핫라인으로 협상한 내용이다. 

소련이 탄두만 주면 이집트는 핵무기를 갖게 되는데,

 만일 두 나라가 핵공격을 해도 세계적인 핵전쟁의 확대는 피하자는 것이다. 

전쟁은 더 확전되지 않아 세계의 화약고 중동에서 

핵전쟁이 벌어지는 최악의 사태는 막았던 것이었다





인도 육군의 구 소련제 SA-6 게인플 지대공 미사일 발사 - 2010년  




세르비아 육군의 구 소련제 SA-6 게인플 지대공 미사일 발사 - 2011년 8월 26일 







photo from : simhq.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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