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

금오신화(金鰲新話)-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 김시습(金時習)

슈트름게슈쯔 2016. 1. 16. 23:41

 

 

김시습(金時習 : 1435~1493)

 

 

 

금오신화(金鰲新話)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성화연간 경주에 박생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박생은 유학으로서 대성할 것을 기약하고 힘쓰던 중

태학관에 보결생으로 천거되었으나

시험에 급제하지 못하여 항상 앙앙불락(怏怏不樂)이었다.

 그는 뜻이 매우 높아 웬만한 세력에는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굽히지도 아니하였다.

그러한 그의 성격을 보고 남들은 거만한 위인이라고 했으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태도가 대단히 온순하고 후하였으므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는 일찍이 불교, 무당, 귀신 등 모든 것에 대해 의심을 품는 한편,

 이에 중용과 주역을 읽은 뒤 더욱 자신을 얻게 되었다.

 그의 성격이 유순하였으므로 불교신자들과 친밀히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절간의 스님과 불교에 대한 질의를 전개하던 중, 스님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천당과 지옥이란 것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야 천지는 한 음양일 것인데 어찌 천지 밖에 또 그런 세계가 있을 것이오?"

라고, 말하자 스님도 또한 능히 결단하여 말하지 못하다가 이르기를,

  "명확히 말하기는 어렵소이다마는 악인의 악과 선인의 선과의 화복이야 어찌 하리오."

  그러나 박생은 그 말을 믿지 아니하고 일리론이라는 책을 만들어

스스로의 경책을 삼아 불교의 이단적인 데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가 저술한 책의 내용은 대개 이러하였다.

  "일찍이 옛말을 들으매 천하의 이치는 오직 한 가지 있을 뿐이라 하였으니

 한 가지라 함은 둘이 아니란 말이요, 이치란 천성을 말함이오.

천성이란 것은 하늘의 명함을 말함이라.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 만물을 낳을 새 기운이 형상을 이룩하고 理도 첨가됐다.

이치란 것은 일용과 사물의 사이에 각각 조리가 있어서

부자에는 친을 다할 것이며 군신에는 의를 다할 것이고,

부부와 장유에도 마땅히 행할 길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도라는 것으로 이 이치가 우리의 마음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 이치를 좇으면 어디를 가나 합당하여 편안치 아니함이 없고,

 그 이치를 거스르면 성품을 떨치는 것이 되리니 곧 재앙이 미칠 것이다.

 이치를 궁구하고 성품을 연찬하는 것이 곧 이것을 궁구함이다.

어떤 사물이라도 꾸준히 연구하여 자신의 지식을 넓힐 것이다.

 대개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마음 없는 이가 없을 것이다.

 또한 천하의 물건이 이치가 갖추어 있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니,

 마음의 허령함으로써 성품의 그러한 것을 좇는 것이 사물에 파고 들어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다.

 사물을 연구하여 그의 궁극의 길을 탐구하는 데 이르는 것이

 곧 천하의 이치이니, 이것이 사물에 나타나 있지 아니함이 없으며

이치에 지극한 자가 방촌의 안에 들지 아니함이 없으리라.

 이로써 추측컨대 천하 국가를 포궐치 않음이 없고 끌어안아 합하지 않음이 없으며

, 여러 하늘에 참예하여 위반함이 없으매 여러 귀신에 물어봐도 혹하지 않으리니

고금의 역사에 떨어지지 아니함에 유가의 일이니 이에 그칠 따름이라.

 천하에 어찌 두 가지 이치가 있으리요.

 저들 스님들의 허무적멸을 위주로 한 이단의 이야기는 내 족히 믿은 바 아니다."

  박생이 이러한 책을 저술한 뒤에 하루는 자기 방에 앉아서 등불을 돋우고

 책을 읽고 있다가 베개를 베고 잠깐 졸다가 한 나라에 이르더니 창망한 바다 가운데의 한 섬이었다.

  그 곳에는 초목도 모래도 없고, 밝고 가는 것이 구리쇠가 아니면 쇠였다.

 대낮에는 불길이 하늘을 뚫을 지경이어서 대지가 다 녹아 없어지는 듯하고,

 밤이면 처참한 바람이 서쪽으로부터 불어 와서 사람의 살과 뼈를 에우는 듯하였다.

또한 쇠로 된 벼랑이 마치 성벽과 같이 되어 있어서 해변에 연이었고

한 개의 철문이 있어 굉장한데 그 자물쇠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문을 지키는 자는 꼴이 영악하기 그지 없고 창과 철퇴를 가져 외적을 방어하고

 그 가운데서 사는 백성들은 쇠로써 집을 지었는데 낮에는 더워 죽을 지경이며,

 밤이면 얼어 죽게 마련이었다.

오직 아침 저녁으로 꿈틀거리는 모양으로 웃으며 말하는 모습은 별로 고통도 없는 듯하였다.

  박생은 크게 놀라 주저하는데 문지기가 부르는지라 당황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수문장은 창을 세우고 박생에게 묻되,

  "그대는 어떤 사람이요?"

  박생은 두려움에 떨면서 대답하기를,

  "아무 나라 아무 땅에 사는 한낱 유생에 불과하오니 영관께서는 널리 용서하여 주소서."

하고, 엎드려 절하며 두 번 세 번 빌자 수문장이 말하기를,

  "유생이란 본시 위엄 앞에서도 마땅히 굴하지 않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굽힘이 이와 같으뇨? 우리들은 이치를 아는

유생을 만나고자 한 지 오래였으며 우리의 국왕께서도

그대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 할 말을 동방에 전하고자 하던 터였소.

 조금만 기다리고 앉아 계시오. 국왕께 장차 고하여 뵙게 해 드리리다."

  말이 끝나자 어디로 들어가더니 얼마 후에 나와서 말하기를,

  "국왕께옵서 당신을 편전에서 맞이하려 하오니,

당신은 마땅히 위엄에 공포를 느끼지 말고 정직한 말로 대답하되

 이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옳은 길을 걷도록 하여 주기 바라오."

  말이 끝나자 흑의와 백의를 입은 두 동자가 손에 두 권의 문권을 가지고 왔는데

 한 책에는 흰 종이에 푸른 글씨를 썼고 한 책에는 흰 종에 붉은 글씨로 쓴 것이었다.

 동자가 그 책을 박생의 좌우에 펴놓아 보이는데 그의 성명은 붉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현재 아무 나라의 박 아무개는 전생에 죄가 없으니 이 나라의 백성됨에 마땅치 않다.)

  박생이 글을 다 읽고 동자에게 물었다.

  "나에게 이 문권을 보이는 것은 어떠한 이유이뇨?"

  동자가 대답하였다.

  "이것의 검은 문권은 악질의 명부이고 흰 문건은 착한 이의 명부이오.

 좋은 명부에 실린 이는 노예로서 대우합니다.

이러한 내용을 당신께 알려 드리오니 왕께서 만일 알현을 허가할 때에는

마땅히 예로써 진퇴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하시오."

 하는 말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잠깐 사이에 보배 수레 위에 연좌를 설치하고 어여쁜 아이들이

 파리채와 일산을 가지고 무사와 나졸들이 창을 휘두르며 오는데 그 호령이 추상같았다.

  박생이 머리를 들어 바라보니 앞에 철성이 세 겹으로 되어 있는

궁궐이 드높기 한이 없는데 금산의 아래에 있으며 불꽃이 충천하여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길 옆에 다니는 사람들을 살펴보니 그 불꽃 가운데서

구리쇠와 쇠를 밟고 다니는데 마치 진흙을 밟고 다니는 것과 흡사하였다.

  그러나 박생의 앞 수십 보쯤 되는 곳에 평탄한 길이 있어

인간 세상이나 다름없으니 아마 신력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그 나라의 왕성이 이르니 네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못과 다락과 대가

 한결같이 인간 세계와 조금도 다를 것 없는데

아름다운 두 아가씨가 나와 절하며 손을 맞잡아 인도하여 들어가니

 왕이 통천관을 쓰고 문옥대를 두르고 뜰 아래에 내려와 맞이하니

박생은 황급히 엎드려 능히 왕을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왕이 말하되,

  "땅이 달라 서로 통성치 못하는 터에 이치를 아는 선비를 어찌 가히 위력으로 굴복하랴."

하고는, 곧 박생의 소매를 잡아 대궐로 오르게 하여 편전 위에

 따로 앉을 자리를 마련하니 곧 옥으로 난간을 만든 금상이었다.

  좌정하니 왕이 시종을 명하여 차를 들이게 하여 박생을 보매

차도 구리쇠와 같고 과실인즉 철환과 다름이 없었다.

 박생은 한편 놀랍고도 두려워하나 능히 피할 곳이 없으매

그들의 하는 짓을 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다과가 들어오자 향내가 온 방 안에 퍼지고 차 마시기를 마친 다음 왕이 박생에게 말하기를,

  "선비는 여기가 어딘지 모르실 것이오.

 이곳은 속세에서 말하는 염부주이요, 대궐 북쪽 산의 이름은 옥초산인데

 이 땅의 남쪽에 있으므로 이름하여 남염부주라 하오.

염부라는 이름은 염화가 혁혁하여 항상 공중에 떠 있는 관계로 그렇게 칭하게 되었소.

 나의 이름은 염마라고 부르니 불꽃이 나의 육신을 마찰하는 까닭이오.

 내가 이곳의 왕이 된 지 이미 만 일 년이 된지라 오래 살다보니

내 스스로 영험스러워서 마음 가는 바에 신통 변화를 부리지 못할 일이 없으며

하고저 하는 일에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소.

창힐이 글자를 만들매 나의 백성을 보내어 울게 하였고,

 구담이 부처가 되매 나의 부하를 보내어 보호해 주었소.

상황과 오제와 주공과 공자에 이르러서는 곧 스스로의 의도를 지키니

내 어찌 할 수 없어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것이오."

  박생은 물었다.

  "주공, 구담은 어떠한 인물이옵니까?"

  왕이 대답하기를,

  "주공은 중화 문물의 성인이요,

구담은 서역 간흉 가운데서 성인이라,

성품에 박의 성인이라,

문물에 비록 밝으나 성품이 박잡하고도 순수하여 주공 공자께서 이것을 통솔하였으며,

간흉한 민족이 비록 몽매하기는 하나 기운이 이둔함에 있어

 구담이 이를 경책하셨고, 주공의 가르침은 바름으로써

사를 버리게 함이니 그 말이 정직하며, 석가의 법은 사도로써

사도를 물리쳤으므로 그 말이 황탄함이니 정직한 고로 소인이 믿는 것이니,

이것이 양가의 극치라 할 것이다.

곧 군자 소인으로 하여금 마침내 정리에 돌아가게 함이니

 후세 부언하여 이도를 제창하고 세상을 속이고저 함이 아닌 줄로 아오."

  박생은 또한 물었으되,

  "귀신이란 어떤 것입니까?"

  왕이 말하기를,

  "귀란 음의 영이오, 신이란 양의 영이니 대개 조화의 자취인 즉

곧 이기의 양능이라 하고 살았을 때는 인물이라 하며

죽으면 귀신이라 하나 그 이치를 다를 것이 있사오리오."

  "세상에서는 귀신에게 제사하는 예가 있는데

제사의 귀신과 조화의 귀신과는 어떻게 다른 것이옵니까?"

  왕이 말하되,

  "다를 것이 없는데 선비는 어찌 보지 못하였소.

 선유가 말하되 귀신이란 형상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물건의 시종이 모양의 합산에 따르는 것이오.

 또 천지에 제사함은 음양의 조화를 존경하는 것이고,

산천에 제사함은 기화의 승강을 보답하려는 것이며,

육신에 제사함은 화를 면코저 함이니, 다 사람 사람으로 하여금

그 공경함을 다하게 하고저 함이오,

 형질이 뚜렷이 있어 망령되이 인간에게 화목을 더하게 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인간들은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라오.

그러므로 공자는 귀신을 공경하여 멀리하라 하였으니 아마 이런 이치를 말함일 것이오."

  박생이 말하되,

  "그렇다면 세상에서 일종의 사귀의 요물이 있어

실지로 사람을 해친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귀신이라고 이름하는 것일까요?"

  "귀란 것은 굴을 의미하고 신이란 것은 펴는 것을 말함이니,

구라혀 신치 못하는 것은 이것이 울결의 요귀를 가르침이라,

조화에 합치는 고로 음양 시종과 더불어 자취가 없으며

울결인 체하는 연고로 인물과 혼돈되어 산에 있는 것은 초라하고

 물에 있는 것은 역이라 하여 수석의 요물은 용망상이오,

목석의 요물은 기망양이오.

물건을 해치는 요귀는 여라 하고, 물건에 의지하는

요귀를 요라 하며 물건을 혹하게 하는 것은 매라 하니,

이는 모두 귀라 할 것이며 음양 불충의 신을 신이라 이름이니라.

 신이란 묘용을 말함이오.

천인이 이치가 같고 현미에 사이가 없이 그 근본에 돌아감이 정이오,

 천명을 회복함을 상이라 하여 조화 종시를 같이하되,

 조화의 자취를 알 수 없음을 도라 함이니

그러므로 귀신의 덕이 크다라고 한 것이니라."

  박생이 또 묻기를,

  "제가 일찍이 들으니 스님들이 말하기를

하늘 위에 천당이란 낙원이 있고 지하에는 고초당하는 지옥이 있다는데

 명부 십왕을 배치하여 십팔옥의 죄인을 다스린다고 하오니

이것이 사실인지요? 사람이 죽은 지 칠일 후에 부처님께 제를 올리어

그 영혼을 천도하옵고 대왕께 지전을 바치어 그 죄악을 청산한다 하오니,

간악한 인간이라도 대왕께서는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왕이 크게 놀라며 말하기를,

  "그게 무슨 말이오. 금시 초문이오.

 고인이 이르기를 일음, 일양을 도라 이름이니 한 번 열리고

한 번 닫힘을 변이라 하고 생생함을 역이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어찌 하늘과 땅 밖에 다시금 하늘과 땅이 있으며

천지 밖에 또 다른 천지가 있으리오.

그리고 왕이라 함은 만인이 귀의함을 이름이니

옛적 삼대 이상 억조의 임금이 다 왕이라 일컬을 것이오.

달리 불리울 것이 없으나 부자와 같은 이는 춘추에 백왕이 바뀌지 아니하는

대법을 세운다 하였으며, 주실을 존숭하여 천왕이라 한 것은

 곧 임금의 이름이지 더 무엇을 보탠 것은 아니오.

그런데 진이 육국을 멸하여 자기의 덕은 삼황을 겸하고

공훈은 오제보다 높다 하여 왕을 황제로 고친 다음

참람히 왕이라 칭한 자 많고 위와 양과 형과 초의 임금과 같은 것이 다 그러한 것이오.

이로부터 이후로 왕자의 명분이 어지러워졌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겠고

문무성강의 존후가 이에 권위가 없어졌소. 또

 세상이 무지하여 인간의 설정은 이야기하고 않고

신도만 엄숙하다 하니 어찌 한 개의 지역 안에 왕이라 일컬음이라 이리 많을 것이겠소.

그대는 어찌 듣지 못하였소.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나라에 두 왕이 없을 것이라 하였으니

그 말을 가히 믿을 수 있으리오.

제를 지내 영혼을 천도한다든지 지전을 사르어 제사를 지낸다든지 함에 이르러서는

나는 그 소위를 알 수가 없소.

그대는 아는 대로 얘기하여 주구려."

  박생이 자리에 물러가 옷깃을 펴며 말하기를,

  "세상에서는 부모가 가신 지 사십구 일 만에 양반이거나

상인이거나 장사 지내는 예를 돌보지 아니하고

오로지 영혼천도를 위주하오니, 돈 많은 이는 부의를 많이 내어

 큰 제를 올리고 가난한 이도 논밭과 집을 팔아 전곡을 마련하고

 종이를 오려 번개를 삼으며, 비단을 끊어 꽃을 만들어

여러 스님들을 불러 복전을 닦고 불상을 모셔 주문을 외우되,

 새와 쥐가 지절거리는 것과 흡사히 하여 아무런 뜻이 있을 리 없으며

 상주가 처자권속을 모아 남녀가 혼잡하와 대소변이 낭자하오며

극락 정토를 더럽히고 또 시왕을 초대한다 하여 주찬을 갖추어

제사하는 데 지전을 사르고 속죄한다 하오니

 거왕을 위한다는 자들이 이렇듯 예의를 돌아보지 아니 하고

탐욕을 내어 받으리오.

또 법을 따라 중벌에 처할 수 있으리까?

이에 대하여 저는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옵니다."

   왕이 말하기를,

  "슬플진저……. 인간이 이 세상에 나매 천명으로써

성을 삼고 땅이 곡식을 길러 주시며 임금은 법으로써

가르쳐 다스려 주시며 스승은 도로써 가르쳐 주시고

어버이는 은혜로써 키워 주시니,

이로 말미암아 오전이 차례가 있고 삼강이 문란치 않으니

 이를 좇으면 상서롭고 이를 거스르면 재앙이 있으리니

그것은 사람이 지어받는 것이오.

 사람이 죽으면 정신과 기운이 이미 흩어져

오르락내리락 하여 근본으로 돌아갈 뿐이라,

 어찌 다시금 캄캄한 속에 멈춰 있으리오.

다만 일종의 원통한 혼백과 비명에 쓰러진 원귀들이 억울한 죽음으로

기운을 펴지 못하여 혹은 쓸쓸한 싸움의 벌판에 울기도 하며,

혹은 원한이 맺힌 가정에 나타나기도 하거니와 또는

무당에 의탁하여 뜻을 발표하며 혹은 사람에 의하여

 슬픔을 하소연하는 것은 비록 정신은 흩어지지 않더라도

결국 아무것도 없는 것에 귀일함이라,

 어찌 형체를 저승에 빌려서 지옥의 고통을 받으오리까?

이것은 물리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짐작할 바요.

부처에 재 들이고 시왕에 제사함은 더욱 황탄한 일이요

또 제를 지낸다 함은 정결함을 뜻함이니 제사 지내고 지내지 아니함은

 그 정성에 있음이지 별 뜻이 없을 것이오.

부처란 청정한다는 뜻이요, 왕이란 존엄하다는 뜻이니,

수레로 금을 구함은 춘추에서 편한 바요,

돈으로써 비단을 삼음은 한위에서 비롯하였음이다.

어찌 청정의 신으로써 세속의 공양을 맛보며 왕의 존엄함으로

 죄인의 뇌물을 받을 수 있으며 명멸이 귀로써 세상의 형벌을 용서할 수 있으리오.

이것이 또한 이치를 궁구하는 선비로서는 마땅히 생각할 바 아니겠소."

  "그러면 윤회의 설에 대하여는 어떻게 보아야 하겠나이까?"

  "정신이 흩어지지 않았을 때 마치 윤회의 길이 있을 듯하나

오래 되면 소멸되고 마는 것이겠지요."

  박생이 또 물었다.

  "왕께서는 어떤 연고로 이런 세상에 살고 계시며 임금이 되셨나이까?"

  "내가 세상에 있을 때에 왕께 충성을 다하여 발분하여

도적을 없애며 맹세하기를 죽어서라도 마땅히 여귀가 되어 도적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그 나머지 원을 다하지 아니하고 충이 없어지지 아니한 까닭으로

이 나쁜 나라에 의탁하여 군장이 되었소.

이제 여기 살면서 나를 우러러 좇는 자는

다 전세 인간에서 흉악의 무리가 여기에 태어나

나의 절제함을 받게 된 것이오.

그릇된 마음을 고치고자 함인데,

그러므로 내 정직을 지키며 사리사욕을 청산하지 못하고는

, 아무도 이 땅의 군주가 되지 못할 것이오.

내 일찍 들으매 선생의 정직 불굴하는 성격은 천고의 달인이라,

그러나 선생의 높은 뜻은 세상에 편한 바 없으니 만치 형산의 백옥이

티끌에 묻혀 있고 밝은 달이 깊은 못에 빠진 것 같아

 만일 슬기 있는 공장을 만나지 못한다면 어찌 그 지극한 보배임을 알아 주겠소.

이 어찌 아까웁지 아니하랴.

내 또한 이제 시운이 다하여 이 자리를 떠나야 할 판이오.

선생도 명수가 끝난 것 같으니 이 나라의 백성을 맡아 주실 분은 선생이 아니고 누구라 하겠소."

  염마는 말을 마치자 크게 잔치를 베풀어 즐길 새 삼한 흥망의 잔치를 열기도 하거늘

 박생이 일일이 얘기하다가 고려의 건군에 얘기가 미치자

염마는 수차 감탄하여 마지 아니하였다.

그러면서 다시 말하기를,

  "나라를 맡은 이는 폭력으로써 백성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며,

덕이 없이 지위를 차지할 수 없을지라도 그 명령은 엄한 것이오.

그리고 대체 국가는 백성의 것이요, 명이란 하늘이 정하니

천명이 가 버리고 민심이 떠나면 비록 몸을 보존코저 한들 어찌 될 수 있겠소."

  박생은 다시 역대 제왕이 이도를 믿다가 재앙을 입은 얘기를 하매

 염왕은 문득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백성들이 기쁘게 노래부르되 수재와 한재가 이르는 것은

하늘이 임금으로 하여금 일에 삼갈 것을 암시함이요,

인민이 원망하되 상서가 나타남은 임금으로 하여금

 더 교만하고 방종케 함이니,

역대 제왕이 재앙을 입을 때 그 인민들은 안락하였소, 원망하였소?"

  "그것은 간신히 벌떼처럼 봉기하여 큰 난리가 일어나되

임금은 인민을 눌러 정치를 하게 되었으니 인민이 어찌 안락할 수가 있었으리까?"

  "아마 선생의 말이 옳소이다!"

  문답이 끝난 뒤 염마는 잔치를 거두고 박생에게 왕위를 전코자 하여

곧 손수 선위문을 지어 박생에게 주는 것이었다.

  그 선위문에 하였으되,

  <염주의 땅은 실로 야만한 나라이라, 옛날의 하우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하였고

 주목왕의 말굽이 미친 적이 없었던 곳으로 붉은 구름이 햇빛을 덮고

 추한 안개가 공중을 막아 목이 마를 때는,

녹은 구리쇳물을 마시며 배가 주리면 뜨거운 쇠끝을 먹고

 야차와 나찰이 아니면 그 발 붙일 곳이 없고

이매망양이 아니면 능히 그 기운을 펼 수가 없는 곳이다.

 화성이 천리요, 철산이 만첩이라, 민속이 한악하니

 정직하지 아니하여 그 간사람을 판단할 수 없고 지세가 험악하니

 신성한 위엄이 없으면 그 조화를 베풀기 어렵도다.

 이제 동국에 사는 박 아무개로 말하면 정직 무사하여

강인하고 결단력이 있으며 문장에 대한 재질이 크며 발몽의 재조가 있어

 모든 인민의 기대에 어그러짐이 없을 지니,

 경은 마땅히 도덕과 예법으로써 인민을 지도할 것이오며

온 누리를 태평하게 해 주시오.

내 이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요순의 옛일을 본받아

이 자리를 사양하노니 아아 경은 삼가 이 자리를 받을지어다.>

  박생은 선위문을 받들어 예식을 마치고 두 번 절하고 물러나오니

염마는 다시금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축하를 드리게 하였고

박생은 고국으로 잠깐 돌려보낼 새 거듭 칙령을 내리기를,

  "머지 않아 이 곳에 돌아올 것이니 나와 함께 문답한 전말을

 인간에 퍼뜨리어 황당한 전설을 남게 하지 마시오."

  박생이 또한 다시 절하며 치사하여 말하기를,

  "감히 명령을 어길 길이 있사오리까?"

하고, 대궐 문을 나와서 수레를 타니 말굽이 진흙에 붙어

수레가 넘어지는 바람에 박생이 깜짝 놀라 일어나 깨니

그것은 한갖 허무한 꿈이었다.

 눈을 뜨고 주위를 보니 책들은 상에 그대로 놓여 있고 불은 깜박거리고 있었다.

박생은 마음이 산란하여 스스로 생각하되,

  "이제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

하고 날로 집안 일을 처리할 것이 걱정이었다.

  몇 달 후에 병이 들어 누웠는데,

  '이제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지!'

  생각이 들자 의원과 무당들을 다 물리치고 고요히 죽어갔다.

그가 죽던 날 저녁 꿈에 신인이 이웃에 고하여 말하기를,

  "그대 이웃의 아무개가 장차 염라왕이 될 것이다."

라고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