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쟁 범죄

일본 야마모토 이소로쿠 탑승 G4M 폭격기를 요격시킨 P-38 라이트닝 전투기 U.S P-38 Lightning Strikes Japan Navy Yamamoto Isoroku G4M Bomber

슈트름게슈쯔 2016. 8. 10. 01:52







태평양전쟁 당시 파푸아 뉴기니 부겐빌 섬 상공에서 일본 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탑승한 1식 G4M 11형 폭격기를 요격하는 미 공군 P-38 라이트닝 전투기의 상상화 - 1943년 4월 18일 





뉴기니 제도 부겐빌섬의 정글속에 추락하여 폭발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탑승했던 

일본 해군 1식 G4M 모델 11형 폭격기의 파괴된 기체 뒷부분 잔해 - 1943년 4월 18일 





1943년 4월 18일 부겐빌 섬 상공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탑승한 

일본 해군의 G4M 폭격기가 미군 P-38 라이트닝 전투기의 기총 소사에 

요격되는 장면과 일본 본토로 시신을 옮겨 치루는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장례식 동영상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 : 1984-4.4~1943-4.18)의 초상화



미드웨이 해전과 산호해 해전 이후 태평양 전쟁의 형세가 일본에게 매우 불리한 

 상황으로 돌아가게 되자 일본제국 해군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남태평양 군도 여러곳에 점령한 그들의 기지에서 분전하는 병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직접 항공기에 탑승하여 현지 시찰을 나섰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수명을 재촉하는 짓으로 끝났다.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파푸아 뉴기니의 부겐빌 섬으로 전선 시찰에 나선다. 

당시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거의 실시간으로 완벽에 가깝게 해독하고 있었다.  

것은 대전중 영국이 독일의 이니그마 암호를 해독할수 있었던 상황처럼

미국측에게는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극비 사항이었다.

미군에게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부겐빌섬 일본군 기지 시찰 며칠 전에 그의 비행일정이 입수되었다.

그의 일정이 입수되자 마자 미군은 일본의 거물급 전쟁범죄자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Operation Vengeance(복수 작전)이라고 명명하고 즉시 추진하게 된다. 

진주만 기습 침략의 주범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일본내에서의 범국민적인 위상과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지만 미국에 있어서는 자국 영토를 기습 폭격하여 

수많은 자국 병사들을 대량 학살시키고 천문학적인 재산적 피해를 끼친 범국가적 원흉이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를 제거시키면 미군이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향후 암호해독을 통한

 정보입수 루트가 차단되는 막대한 손해를 볼 수도 있었다.

그러한 형태로 인해 단순한 군사작전이 아니라 

대단히 비중히 큰 형태의 이 작전은 미국 해군장관 프랭크 녹스는 물론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결재까지 받아야만 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선택은 어떠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일본 야마모토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군도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들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비행경로를 미군 전투기들의 작전반경 밖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은 미군의 신형 쌍발 전투기였던 P-38 라이트닝 전투기가

 특수 보조연료탱크에까지 연료를 가득 채우고 작전에 투입될 경우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방문 목적지인 당시 미군의 최전선 비행장이었던 부겐빌 섬 부인(Buin) 비행장 상공이 

헨더슨 비행장(과달카날)으로부터 비행 반경내에 

아슬아슬하게 들어간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마지막 이동 경로



  미군은 즉시 최정예 조종사들(캑터스 항공대)와 보유한 모든 P-38 전투기들 중에서 

최상의 기체들을 엄선하여 며칠 간 극도의 보안 속에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라바울에서 출발한 야마모토 일행의 수행단이 

1식 G4M 폭격기 2대 + 호위 전투기 제로센 6대의 편대라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그리고 미군은, 18기의 P-38 라이트닝 전투기를 출격시켜 이 중 14대가 호위 제로센 6기를 상대하는 사이에

 나머지 4대의 P-38 전투기 2대가 한 조를 이루어 

일본 G4M 폭격기 1대씩을 최대한 신속히 격추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작전의 핵심은 P-38 라이트닝 전투기의 체공시간이었다. 

부겐빌 상공은 미군기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먼 지점이었는데 

거기에다 육상(섬)과 해상(초계정)으로부터의 탐색을 기만하기 위해 

웨이포인트를 갈 지(之) 자로 꺾어가며 2시간 넘게 아슬아슬하게 초저공 비행을 해야 했던 탓에

비행장 상공에서 P-38 전투기가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5분 남짓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수행단이 조금만 일찍도착하거나 늦게 도착한다면 그대로 작전은 실패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야마모토의 철저한 시간관념을 알고 있던 미군은 비행 스케줄에 맞춰 

수행단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대로 작전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야마모토는 자신의 그 철저한 성격 탓에 목숨을 잃었다.  

드디어 4월 18일 오전 7시 20분, 헨더슨 비행장에서 18대의 P-38 라이트닝 전투기가 이륙하였다. 

그러나 2대가 이륙 중 기체 이상으로 탈락했다.   

오전 9시 34분, 2시간의 초저공 비행 끝에 부인(Buin) 비행장 인근에서

 1만 피트 상공으로 급상승한 16대의 P-38 전투기는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경로로 이동 중인 수행단 일행을 1분 만에 발견했다. 

그 즉시 연료탱크를 버리고 급가속하며 달려 들었지만, 

이 때 1대의 P-38 전투기의  연료탱크가 분리되지 않아 그의 윙맨과 함께 이탈하여, 

교전한 P-38전투기는 14대(호위공격기 상대 10대 + 1번 폭격기 공격 2대 + 2번 폭격기 공격 2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수적으로도 여전히 우위였을 뿐더러 일본 폭격기의 호위 제로센 조종사들이 접근해 오는 

P-38 전투기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상대적 거리가 

1마일 이내였을 정도로 철저한 기습이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35분 조용하던 하늘에서 순식간에 교전이 펼쳐졌다.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탑승했던 일본군의 1식 G4M (미국명 Betty) 323번 폭격기의 측면도 



2대의 일본 G4M 폭격기는 부리나케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급강하하며 어떻게든 피해 보려 했지만, 

속력이 느린 저속의 1식 G4M 폭격기로서는 1대 당 2기씩 요격하기 위해 따라 붙는 

미 공군 신형 P-38고속전투기를 따돌리는 것은 당연히 무리였다.   

먼저 323번 G4M 폭격기 1대가 토마스 랜피어의 집중사격으로 순식간에 

오른쪽 엔진과 날개가 박살나며 정글속으로 추락하였다. 

곧이어 나머지 1대의 324번 G4M폭격기도 다른 P-38 전투기 2대의

 공격을 받고 해상에 불시착한 직후 가라앉았다. 

일본군 G4M 폭격기 2대를 모두 격추한 사실을 확인한 모든 미군 P-38 전투기 조종사들은 

그 즉시 고속으로 상승하며 퇴각하였다. 

바로 코 앞의 부인 비행장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대경실색한 

일본 전투기들이 벌떼같이 비상출격하였지만, 

고속상승이 주특기인 P-38 전투기를 따라 잡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 모든 과정에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미군기들의 기동은 신속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의 손실은 (2번째 G4M폭격기에 

접근한 2기의 P-38 전투기중) 1기가 격추된 것이 전부였다(조종사도 전사).

 일본군 측 손실은 1일 323번과 324번 G4M 폭격기 2대가 전부였다. 

그 폭격기 2대 속에 탑승해 있었던 사람들이 누구였느냐가 매우 심각한 문제였지만

  조종사들이 귀환한 헨더슨 비행장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2대의 G4M 폭격기를 모두 격추시켰으므로 그 중 어느 것에 야마모토가 타고 있었는지

 여부는 미군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작전은 완벽히 성공하였다.

 미군은 이 작전의 성공이 '대전투의 승리'와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했으며,

 실제로 야마모토의 죽음은 일본군과 국민들에게 엄청난 사기 저하를 가져왔음이 종전 후 확인되었다. 

 전후, 미군이 일본군의 서류를 조사하자 야마모토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진상이 드러났다. 

야마모토는 2대의 323번과 324번 G4M 폭격기중 먼저 격추되어 

정글에 추락하여 폭발한 323번 G4M 폭격기에 탑승해 있었다. 

일본군은 그 즉시 추락지점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워낙 빽빽한 정글이었던 탓에, 

24시간이 지난 후에야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파괴된 323번 G4M 폭격기 옆에 튕겨져 나와 군도를 꼭 쥔 채 숨져있던 

그의 시신에서 2개의 관통상(가슴, 얼굴)이 발견되었다. 

그것으로 보아 추락 되기 전에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 공군 P-38전투기의 기총 소사에 이미 사망했던 것이다.

바다에 떨어진 나머지 1대에는 참모장인 우가키 마토메 일행이 탑승하고 있었다. 

우가키는 중상을 입었지만 즉각 출동한 보트에 구조가 되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암살 작전을 성공시키고 생존 귀환한 미 공군 대원들의 단체 사진  - 1943년 4월 19일


Roger Ames, Lawrence Graebner, Capt. Tom Lanphier, Delton Goerke, 

Julius Jacobsen, Eldon Stratton, Albert Long, 

Everett Anglin. Bill Smith, Doug Canning, Besby Holmes, Rex Barber, 

Maj. John Mitchell, Maj. Lou Kittel, Gordon Whittaker,









 2011년 12월 23일에 개봉된 일본의 국수주의적 전쟁 영화였던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태평양 전쟁 70년째의 진실]에서 

주인공 야마모토 이소로쿠역을 맡았던 

일본의 중견배우 야쿠쇼 코지(役所広司) 











미 P-38 라이트닝 전투기의 기총 소사에 추락 이후 

뉴기니 제도 부겐빌섬 정글속에 파괴되어 버려진채 

지구촌 청정지대의 자연 환경을 지속적으로 훼손시키고 있는  

태평양 전쟁 70년이 넘는 진실 -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323번 G4M 폭격기






photo from : www.defensemedianetwo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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