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6.25 전쟁 Korean War

한국 6.25 전쟁 당시 포로 수용소 철조망 -North Korean POW Camp wire fence during the Korean War

슈트름게슈쯔 2017. 1. 21. 20:18




한국 6.25 전쟁 낙동강 전투 당시 야지에 철조망을 둘러쳐 만든 임시 포로 수용소의 

적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미군 헌병들- 1950년 9월 4일 





한국 6.25 전쟁 당시 임시 포로수용소 철조망 펜스옆에서 동료 포로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북한 인민군 포로 






한국 6.25 전쟁 당시 국군 경비대의 거제도 추봉도 포로수용소 철조망 울타리 설치 작업 - 1951년 


한국 6.25 전쟁중 거제도 추봉도 포로수용소에 951년 6월까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과 중공군 포로 2만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의 포로를 수용하다.

그 중에는 여성 포로도 300명이 있었다. 

포로수용소 내부에서는 강제징집 등의 이유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와 

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 간에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다.










북한군 포로들의 거제포로수용소 철조망에 내건 스탈린의 초상화와 김일성의 초상화




한국 6.25 전쟁 당시  거제 포로 수용소에서 데모를 일으키는 인민군 포로들 





한국 6.25 전쟁 당시 거제 포로 수용소 제 76 수용소 철조망 앞에서서 인민군 포로들에 의해

 5월 6일 납치된 돗드(Francis T. Dodd) 전임 포로수용소장 잡혀있는 

제 76 수용소 철조망 너머를 바라보는 미군 크레이그 대령과 

미군 콜슨 신임 게제 포로수용소 소장 - 1952년 5월 9일


미군은 포로들과 협상을 벌여 합의각서로 만들어 주는 

굴욕을 겪은 끝에 돗드의 신병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신임 소장 콜슨(Charies F. Colson)이 서명한 각서에는 

① 유엔군이 다수의 포로들을 살상하였음을 시인한다. 

② 포로의 송환문제는 판문점 결정에 따른다. 

③ 포로들의 강제심사는 없다. 

④ 포로의 대표단 조직을 승인 한다 등의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

이 각서는 순식간에 유출되어 판문점 북한측 대표에게 전해져 

포로문제 협상에서 유엔군 대표단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신임 유엔군사령관에 부임한 클라크(Mark W. Clark) 대장은 책임을 물어 

부임한지 일주일 밖에 안 된 콜슨을 5월 12일부로 해임하여 전임 수용소장인 돗드와 함께

 군법회의에 회부시켜 대령으로 강등하는 문책을 단행하였다.

 이 같이 엄청난 일들이 반복되면서 1951년 1월에 수용소 개설 후 

그해 9월까지 모두 8명의 수용소장이 교체되었다.

이처럼 포로수용소가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던 것은 

인권에 너무 치중한 운영정책에 기인한 바가 컷다.






한국 6.25 전쟁중 거제포로수용소에서 미군 도드 소장을 납치하고 폭동을 일으킨 

철조망 너머의 인민군 포로들에게 무엇을 던지는 미군 병사 - 1952년 5월 




인민군 포로들이 수용소 내에서 훔친 철조망을 이용하여 만든 사제 무기 




한국 6.25 전쟁중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이 진압된 후 76 수용소에서 수거된 

인민군 포로들이 훔친후 비밀리에 숨겨두었던 무기들 - 1952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