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 병기

독일군의 열차포 패리스건 스케치 - WW2 German Army painter sketch Railway Gun Paris Gun

슈트름게슈쯔 2017. 9. 21. 18:32




2차 세계대전 말기까지 사용되었던 독일군의 1차 세계대전식 

중구경 열차포 카이저 빌헬름 구스타프 210mm 패리스 건 




독일군 화가의 패리스건 스케치 



제 1차 세계대전 말기였던 1918년 3월 23일 토요일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도심 한 가운데에 거대한 포탄이 떨어졌다. 

파리 시민들은 파편 조각을 통해서 그것이 포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포탄이 어디서 발사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주변에 대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적의 항공기가 지나간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포격 초반 공군 장교들은 대 항공기 감시병들의 증언에 의해 

독일 공군의 항공기라고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증언에 의아해했다.

독일군이 포격을 개시한 3월 23일 당일 발사한 25발의 포탄은 

 16명의 사망자와  21명의 부상자와 7개의 가옥및  파리 시내를 

7시간 동안 마비시키켰지만  의외로 피해는 적었다. 

이 대포의 사격을 통하여 독일은 그들이 원래 노리던 

독일군의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심리전의  성과는 충분히 달성하였다.

 공포에 빠진 파리 시민들은 의외로 빠르게도 다음날 4시쯤 

군의 발표에서 그 포탄이 독일에서 개발한 신형 대포의 포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3월이 지나 4월이 되자 프랑군의 레인저들도 

이 파리 대포의 위치를 어느정도 추정해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주도면밀하게 파리 대포 주변에 적당한 

다른 대포들도 같이 설치하여 그저 그런 방열 대형으로 보이게 하거나. 

위장포를 씌워 공중 정찰에 보이지 않도록 하고, 무엇보다도 열차포라는 

장점을 최대한 살려 계속해서 이동시켰기 때문에 포격이 계속되던  

8월에 이르기까지 프랑스군은 파리 대포를 찾아내지 못했다. 

프랑스군은 마지막 공세에서 실제로 파리 대포를 발견하여 

공격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였으나 파리 대포가 곧바로 출발해버리는 바람에 눈앞에서 놓치고 만다. 

 3월부터 8월까지 무려 320~367발의 포탄이 날아와 많은 건물이 파괴되었고 

사망 250여 명, 부상 620여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중에는 금요일 성당에 인파가 모였을때 포탄이 성당 기둥에 직격하여

 무려 88명을 일격에 사살한 기록도 남아있다.  

포격이 계속되는 동안 파리에서는 무려 1만이 넘는 인구가 도시를 빠져나갔다.

파리 시민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차나 마차를 거부하고 철도와 버스를 고집했다고 한다. 

패리스건의 포신길이는 34m,이며 구경 211mm(후기형 238mm),이고 

포탄중량 90~120kg이며  유효사거리 는130km였다.

80명의 인원으로  운용되었던 패리스건 열차포는.  현대의 장사정 포가 

보통 15~20km, 부스터를 달아서 40km 정도의 사거리를 보이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사정거리를 자랑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가벼운 포탄을 공기 저항이 적은 성층권을 경유해 쏘아 보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만든 대포들중 중 최초로 성층권을 통과한 대포가 었다. 

패리스건 다음은 독일의 로켓 V2 였다.

그러나 사거리와 포격 기간에 비해 파리건의 효과는 작은 편이었다. 

그 이유는 사거리를 위해 가벼운 포탄을 선택했기 때문으로, 

상대적으로 폭약 탑재량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과 더불어 

탄두에 별다른 유도장치를 심을 기술이 없었던 때라 

초장거리에서 포격했을 때, 명중률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독일군이 파리라는 넓은 지역을 목표로 선택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때문에 공장이나 항구, 비행장 같은 작은 목표는 노리기조차 포기했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94kg짜리 포탄을 130km 떨어진 곳까지 

쏠 수 있는 성능을 가진 거대한 대포였다고 한다. 

포탄은 마하 5의 속도로 발사되어 고도 40km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이 높이는 미사일을 개발할 때까지 인류가 도달한 최고의 높이였다.

물론 이 기록이 포로 도달한 최고 고도는 아니다. 

포로 도달한 최고 고도 기록은 제랄드 불이 계획한 HARP 포로 

고도 180km근처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너무나 높이, 그리고 멀리 쏘다 보니 포탄이 날아가면서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도 영향을 받아서 조준할 때 이런 것들까지 계산에 넣어야 했다고 한다.

파리 대포를 만든 독일의 철강 재벌 크룹 사는 19세기부터 대포에서 

잠수함에 이르기까지 많은 무기를 만든 회사였다. 

사실 처음부터 이런 사정거리를 노리고 개발한 것은 아니었고, 

우연한 실수와 그로 인한 발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제작된 포를 테스트하던 중, 실수로 고각으로 발사해버렸는데, 

각도상 근처에 떨어졌어야 할 포탄이 훨씬 먼 거리에서 착탄한 것을 발견하고, 

그 원인을 규명하니 공기 저항이 적은 성층권을 통과하여 

사거리가 늘어난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 인류가 로켓을 만들 때까지 성층권을 드나든 인공물은 크룹 사의 포탄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당시의 연구로 인해 성층권에 대한 것을 밝혀냈고,

 이것이  V2 로켓까지 이어지게 되었던것이다.

  이후 이 연구를 바탕으로 전함의 마모된 380mm 포신 안에 

라인을 입히고 또 그 포신을 연장하여 만든 것이 파리 대포로, 

처음에는 해군포로 제작되었다가 파리를 공격하기 위한 육상포로 전환되었다. 

당시 전차 기술의 부족으로 인해 후대에 나온 독일 구스타프 열차포처럼

 특수 열차에 탑재시키게 되었다. 

패리스건은 떨어지는 명중율과 한 발당 위력, 높은 운용 비용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파리 대포를 운용한 이유는 다분히 프랑스인에 대한  심리전 때문이었다.

 적국의 수도를 공격한다는 상황으로 인한 국내의 사기 진작과 

프랑스의 사기 감소를 노린 것. 심리적인 효과는 독일 국내에서 컸다고 한다. 

종전이 가까워지면서 프랑스의 공격이 시작되어 독일군은 파리 대포를 철수해야 했다. 

생산된 7문의 동형포 중에서 파리를 직접 공격했던 것은 3문이었고, 

그나마 폭격으로 1문이 소실된 상황이었다.

 8월에 파리 대포를 철수하며 독일군은 포신은 물론 제조와 

운영에 관한 모든 자료를 파기 및 은닉하였다. 

연합군이 파리 대포를 찾아내려고 샅샅이 뒤졌지만 찾아낸 것은 

포받침 역할을 하던 열차를 미군에서 발견한 것이 전부였다. 

현재 남은 자료는 크룹 사에서 일하던 프리츠 라우젠베어가(Fritz Rausenberger)가 

죽기 전에 남긴 짧은 기술이 전부이다.

  만약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열차포중의 하나로 볼거리를 제공했을 것이다. 

믈론 폭격기나 미사일 등의 원거리 타격 수단이 발달한 

현대에서는 그러한 열차포를 제작할 이유는 없다.

현존하는 대구경 대포 중에서 가장 큰 대포는 러시아 모스크바 

크레믈린 광장에 전시가 되어있는 이반 대제의 아들 

효도르가 제작했던 890mm 구경의 Tsar 청동대포인 차르 대포이며 

전장에 투입된 것들 중에서 가장 큰 대구경 대포는 

독소전쟁 초기 우크라이나 세바스토폴 요새 공방전에 투입되어 

소련군 포대를 괴멸시켰던 독일군의 800mm 구스타프 열차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