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전쟁시 쿠르스크 전투 5개월전 겨을 쿠르스크 인근에서 지도를 보며
독일군의 거점 위치를 살펴보는 소련 빨치산 부대 부닥 중대의 지휘관(왼쪽)과
콤소물(소련 레닌주의 청년 공산주의자 동맹) 출신의 빨치산 전투원
마리야 옐닉과 파벨 키세레프 - 1943년 2월
콤소몰은 소련의 청년정치조직이었다.
1918년 10월 29일 러시아 공산주의 청년연합으로
처음 창설되었던 콤소몰은 소련의 청년 정치조직이었다.
히틀러 유겐트가 나치 독일의 청소년단이었다면 콤소몰은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 내에서 인정된 유일한 청년조직이었으며,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려면 무조건 거쳐야 하는 필수조직이기도 했다.
보통 소련에서는 (공산당에 가입한 어린이일 경우) 9살까지 어린이들은 10월 단원(Октябрёнок),
14살까지는 피오네르(Пионер) 단원을 거친 다음 28살까지 이 단체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소련 공산당의 통제를 받던 조직인 만큼 권력자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어서,
소련 대숙청 당시 창립자 대다수가 스탈린에게 밉보이면서 굴락에 가거나 총살되는 운명을 겪었다.
콤소몰 중앙위원회의 리브킨, 샤츠킨, 체이틀린, 스모로딘, 차플린,
알렉산드르 밀차코프등의 콤소몰 총서기는 모두 스탈린에 의해 총살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전황이 급박해지자 스탈린은 콤소몰 단원들을 징병해 전선에 투입시켰다.
그리고 독일 점령지에서 콤소몰 단원들이 파르티잔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독소전쟁 이후 소련은 이러한 점에 주목해 군사훈련을 강화시켜 유사시 준군사조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스탈린 사후 소련의 분위기가 완화되면서 콤소몰은 공산당의 청년조직 및 교육기관, 인재풀 역할을 했다.
콤소몰 단원의 경우 미개발 지구를 돕는다는 명목 아래 시베리아로 노동봉사를 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정기적으로 열리는 공산주의 이론 수업 등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했다.
또한 타국 공산당들과 교류를 위해 해외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 중 활동 실적이 좋은 단원들의 경우, 공산당의 추천을 받아 공직에 진출하거나
직장에서 유리한 가산점을 얻을 수도 있었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친푸틴 성향의 조직으로 알려진 우리들(Наши, 나시)와
젊은 근위대(Молодая гвардия, 말라다야 그바르디야)는
청년들을 정치에 동원시키던 콤소몰의 운영방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