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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조의 리훙장과 미국제 맥심 기관총 - Chinese Qing dynasty Li Hung Chang & USA Maxim gun

슈트름게슈쯔 2018. 7. 3. 15:05



중국 청나라 난징 진링 무기고의 미국제 개틀린 기관포를 살펴보는 리훙장- 1865년 




열강의 중국 침략시기 미국제 맥심 수냉식 기관총의 연발 사격 테스트 후 

미국 맥심 기관총 회사 사장 알버트 빅커스및 지그문드 로웨와 

기념 촬영을 하는 중국 청조의 리훙장 - 1896년





사망하기 몇개월전의 리훙장 - 1901년 



중국 청대 후기의 실질적인 통치자이자 한족계 거물급 정치가였던 

리훙장(李鴻章 : 1823~1901)은 안후이성 허페이 출신이었다. 

그는 한족의 향신층 출신으로 전 세대의 개혁가이자 유학자인 청꿔판(증국번)의 직계 제자였다. 

리훙장은 지방 과거시험부터 진사를 거쳐 진사 출신에서도 최고 등급이 임용되는 한림원의 관리에 임명되었다. 

여기서 진사는 과거시험 최종 합격자로 황제 앞에서 등수만 가리는 시험인 전시를 볼수있는 자격을 뜻한다. 

조선시대 생원진사에 해당하는것은 '수재'나 '거인'에 해당하고 지방시험에서 합격해 

북경과 남경에서 열리는 과거시험(회시)에 볼수 있는 자격을 '거인'이라고 한다.

 거인이면 사대부 취급을 해주고 지방에선 유지로 행세가 가능했다.

물론 회시를 거치지 않고도 하급직이나 납연(합법적으로 돈으로 벼슬임용)이 가능했다.

진사 출신은 명청시대 과거 시험을 거친 최고 엘리트였다. 

특히 진사 출신중 높은 등수로 합격하면 한림원으로 가는 게 관례였다. 

중국의 과거시험은 조선시대보다 더 경쟁률이 높았다.

그것은 중국 청나라 때는 인구도 대폭 늘어난데다가 

(명나라 말기에 1억 근처이던 중국인구가 이미 4억이 되어 있었다) 

만주인 우대로 한인들은 관료로 들어갈수 있는 문이 더 좁아졌기 때문에 

그야말로 바늘구멍을 뚫고 나온 것과 비슷했다.  

훙슈취안(홍수전)에 의해 한족이 중심이 된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났지만 

그들의 혁신적 주장을 두려워 한 지배 향신층은 이를 기득권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가담했다. 

당시 청나라 정규군인 팔기군과 녹영은 이미 18세기 말 백련교도의 난때 

무력함이 입증된 상태였으며, 태평천국진압에는 향신층이 조직한 의병들이 주로 나섰다. 

그렇다고 관군이 아예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몽골 팔기군은 높은 전투력으로 유일하게 실전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준가르부 정벌에서 막강했던 팔기군은 50년도 안되어 완전히 쇠락했다. 

의병을 조직한 사람 중엔 유학자인 증국번도 있었다. 

증국번의 의병은 "상군"(호남성군), "회군"(안휘성군)이라고 한다. 

리훙장은 이들을 물려받으면서 태평천국을 진압, 군벌이 되고 청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다.  

리훙장은 문관출신이기는 하지만 태평천국 진압에서 발군의 진압 역량을 보여줬다. 

이후 태평천국 이후 중원 일대를 쉽쓸었던 반청운동으로 태평천국처럼 특정한 이념은 없었고

 마적과 별로 다를 바도 없었던 염군 진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리훙장은 자신의 고향에서 모집한 의용군인 회군(淮軍)을 거느리고 

상해 수비 등에서 공적을 올렸고 전후 1등 백작의 직위를 수여받았다.

 그후 서태후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운동인 양무운동을 전면에서 주도하며

 막대한 예산을 들여 당대 아시아 최강이라는 북양함대를 조직한다. 

정적이자 같은 양무파인 좌종당과 새방해방(塞防海防)을 두고 청나라에서 논쟁을 벌였는데, 

좌종당은 영국-프랑스-미국 같은 해양세력보다는 북방의 러시아 세력을 견제할 것을 주장했지만(새방),

 리훙장은 러시아보다는 영불미가 더 위협이 될 것이라고 보았고(해방), 해군력에 힘을 쏟는다. 

그리고 리훙장은 러시아 세력을 이용하여 영국세력을 견제하려고 했는데 

이것은 그가 나름대로 국제적 안목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러시아세력은 러일전쟁 패배 이후 극동에서 손을 떼었다. 

하지만 그는 청의 군사력이 청일전쟁에서 처참히 무너지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실각했다. 

그것은 리훙장의 잘못이 아니라 당시 서구문물의 수입으로 중국 경제가 붕괴 직전에 이르자 

불가피하게 경제 자립화를 위해서 군사력 강화를 중단한 것이었다. 

그 시점에 하필 청일전쟁이 터진 게 불운이었다.

그후 그는 일시적으로 재기용되기도 했으나 변법자강운동 당시 서태후와 연합할 것을 우려한

 유신파들이 그를 멀리하였고 결국 다시 한직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결국 다시는 재기하지 못한 채 신축조약으로 청나라가 사실상

 반식민지화가 된 두 달이 지난 1901년 11월에 향년 78세로 사망한다.

유언으로는 "인재를 키우고도 나라를 망쳤으니 그야말로 한스럽도다!" 

이후에도 의식은 있는 채 하루를 더 생존했으나 병이 심각해져 말을 하지 못했고

 끝내 눈을 뜬 채로 눈물을 흘리기만 하자 좌우에서 

"공께서 하지 못하신 일은 저희가 이루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눈을 감았다고 한다.  

리훙장은 조선에도 꽤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운요호 사건 이후 조선은 일본의 무력시위에 당황해 청나라 조정에 의견을 물었다.

그에 따라 청의 리훙장은 조선이 일본과 통상조약을 맺을 것을 권고하면서도,

 일본이 "종주국"인 청나라를 대신해 조선에 주도권을 행사할까 싶어서 

서방 열강과도 통상조약을 맺으라고 권고했다. 

당시 청나라의 일부 관리들은 번속국이라고 생각하는

 조선을 아예 병합하여 성을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홍장은 이를 "비현실적"인 제안이라며 물리쳤다. 

  그것은 당시 청나라의 국력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리훙장은 정치적으로 조선을 중국 청나라와 별개의 나라로 인식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