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6.25 전쟁 Korean War

1.4 후퇴 당시 영국군과 피난민들- British Army Soldiers and Korean refugee during January–Fourth Retreat

슈트름게슈쯔 2018. 8. 20. 23:16


평안남도 순천에서 중국 공산군의 거센 공세에 의해 남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유엔군과 북한 민간인 피난민들1950년 12월 1일 


미 제 8군 제 2 보병 사단은 지난 5일 동안 만주지역 매복해 있던 

중국 공산군의 잔인하고도 격렬한 공격을 견디어 냈다.

 미군은 중국 공산군의 한국전 개입을  중대한 분쟁으로 인식하여

 중국 공산군대의 인해 전술 작전에서 경각심을 느끼고 

신속히 남한으로 돌아와 군대를 재편성하고 증원을 기다렸다.

1951년 2월에 그들은 공세를 다시 개시했고 중국 공산군대를 상대하여 이기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한국전 개입은 전쟁이 궁극적으로 

교착 상태와 휴전 협정으로 끝날 조짐을 의미했다.




한국 6.25 전쟁중 1.4 후퇴 당시 경기도 어느 마을에서 우물물을 길어 

수통에 담는 영국군 병사들피난민들의 행렬 - 1951년 1월 


영국군은 한강에서 수비 라인이 확립 될 때까지 한강 이남으로 후퇴 조치를 취했다. 
그들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며 살을 에이는 듯한  혹독한 영하 40도의 

추위로 얼어 붙은 한국의 동토에서 중국 공산군대와 싸워야 했다.




임진강 전투 당시 C레이션 캔으로 식사를 준비하는 영국군 제29여단 예하

 제 8후사르 연대의  센츄리온 전차 승무원들 - 1951년 


1951년 10월 제 1 연방 사단은 중국 공산군대의 공격 잠재력을 교란시키기 위해 

제한된 공세인 코만도 작전(Operation Commando)에 참여하여 

38선을 가로 지르는 전선을 지배하고 외교적 압력을 확대했다. 

그들의 주요 활동 영역은 '후크 (Hook)'라고 알려진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등성이 주변이었다.

1952년 11월  영국 왕립 하이랜드 연대는 중국 공산군대의 공격을 격퇴시켰다. 

1953년 5월  웰링턴 공작 연대에 의해  다시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다.






한국 6.25 전쟁중 임진강 전투 이후 영국 글로스터셔 연대의 생존자들 - 1951년 4월 


1951년 4월  북한의 김일성을 지원하여 한반도를 침략한 중국 공산군대와 

북한 공산군대는 반격을 시도해 한국 수도 서울에 다시 침공했다. 

그들은 4 월 22 ~25일 경기도 기평과 임진강 근처에서 유엔군의 공격에 의해 저지되었다.

임진강 라인은 주로 영국 제 29 여단 (British 29th Brigade)에 의해 방어되었다. 

적군은 숫적으로 우월했지만 영국 제 29여단은 퇴각을 지시하기 전에 3일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