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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들판에서 파괴된 소련군 IS-2 전차들- Destroyed Soviet Red Army IS-2 Heavy Tanks in the Field Poland

슈트름게슈쯔 2018. 11. 8. 21:30



제 2차 세계대전 말기 비스툴라-오데르 공세 당시 폴란드에서 파괴된 소련군 IS-2 전차 -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4년후 들판에 버려진 소련군 IS-2 중전차 포탑위에 올라선 폴란드 트츠치아나 주민들 - 1949년 


1945년 1월 이 IS-2 전차는 트츠치아나 지역 들판의 600m 정도 떨어진 지점

숲속에 매복해 있던 독일군 3호 돌격포의 사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비스툴라-오데르 공세는 1945년 1월부터 2월까지 치루어진 소련군의 독일을 향한 마지막 대공세였다. 

이름은 소련군이 독일을 향해 진군하면서 건넌 폴란드의 주요한 두개의 강인 비스와 강과 

오데르 강에서 딴 것으로 영어식 명칭인 비스툴라-오데르 공세로도 알려져 있다.

 이를 기점으로 소련군은 전쟁 4년 만에 독일 국내에 진입하게 된다. 

바그라티온 작전을 통해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발트해에 이르는 지역을 해방시킨 소련군은 

기나긴 진군으로 길어진 보급선 문제로 공세를 멈추어야 했다.

히틀러는 이를 마켓 가든 작전의 전략적 실패로 주춤거리는 연합군을 괴멸시킬 절호의 기회로 보고 

아르덴 대공세를 계획했지만 연합군의 맹렬한 저항에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군의 서부 공세에 당황한 서방 연합국은 압력을 덜기 위해 소련군에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해줄 것을 요청했고, 

소련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흔쾌히 이에 응해 공세를 개시했다.   

 공세에 참가할 소련군은 세갈래로 편성되었다. 주공은 체르냐홉스키 대장의 제3벨라루스 전선군이었고,

 조공은 우익(북방)에 홉하네스 바그라미안 대장의 제1발트 전선군, 

좌익(남방)에는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 원수의 제2벨라루스 전선군이 포진해 있었다.

 총 병력은 170만명이었다. 이에 맞서는 독일군 부대는 제3기갑군, 

제4기갑군과 전에 붕괴된 중부집단군의 잔존부대였으며 

병력은 겨우 58만 명 정도에 불과하여 병력비부터 3대 1로 열세였다. 

여기에 민병대인 국민돌격대(Volksturm)가 20만 명이 있었으나 무장이나 훈련이 빈약한 그들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 등 전투 경험을 겪으며 숙련되고 고도로 기계화된 

소련군에 대항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 없었다.  

공세는 독일군의 아르덴 대공세가 거의 실패로 마무리될 시점인 1945년 1월 13일에 개시되었다. 

독일군은 아르덴 대공세 때문에 정예부대가 서부전선에 있었으므로 

병력의 질과 장비가 모두 상태가 안좋은 2선급 병력이 주력인 상태였으나 

이제는 자국의 방어를 위해 싸우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에 완강히 저항하였다. 

여기에 동프로이센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이 개전되기 전부터 독일이 구축한 참호선이 

몇겹으로 만들어져 있었으므로 제대로 된 산맥이나 강을 이용한 방어선이 없다는 약점을 상당부분 보충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이런 저항 때문에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착실히 전진했다. 

1월 28일 바그라미안의 전선군은 메멜을 탈취하였고 더욱 더 전진하여 

잔존 독일군부대를 쾨니히스베르크 방면에 몰아넣고 베를린으로 가는 진격로의 우익을 차단하였다. 

소련군은 이들을 포위하고 계속 공격했고, 4월 9일 이곳을 지키던 독일군은 항복하였다.  

이후 소련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이 차지했던 폴란드 동부를 그대로 소련 영토로 흡수하였고, 

그 대신 오데르 강 동쪽의 독일 영토와 동프로이센을 폴란드 영토로 내어주었다. 

한편 쾨니히스베르크는 종전 후 칼리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어 

소련의 영토가 되었고 소련이 역사속으로 사라진뒤에도 

옛 독일의 영토였던 쾨니히스베르크는 러시아 연방의 영토로 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