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6.25 전쟁 Korean War

한국 6.25 전쟁 다부동 전투 당시 항복하는 북한 공산군 포로들 - North Korean communist POWs Surrendering at the Battle of Dabudong Korean War

슈트름게슈쯔 2019. 3. 7. 14:56







한국 6.25 전쟁 다부동 전투 당시 치열한 교전 후 국군에게 항복하는 북한 공산군 포로들과 

미 제 27 연대 지원 M 26 퍼싱 전차의  90mm포 공격에 파괴된 북한군의 소련제 T-34/85 전차들

- 1950년 8월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다부동 전투는 국군 1사단과 미군 일부 병력이 1950년 8월 초부터 약 한 달 동안 대구 북방 약 20㎞의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에서 남침한 북한군 3·13·15사단을 상대로 벌인 전투였다. 

다부동은 국군이 지키지 못할 경우 대구와 부산까지 내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북한군은 이곳을 공략하기 위해 최정예 병력으로 공세를 가했다. 

아군은 3400여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이곳을 방어했다. 

다부동 전투의 승리로 아군은 낙동강 전선의 최후 교두보를 지켰던 것이다.

그리고 다부동 전투의 승리로 인해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이 지휘하는 인천상륙작전을 가능케 했다. 

다부동 전투는 한국 6·25전쟁의 국면을 완전히 뒤바꾸는 획기적인 전투였다. 

그러했던 만큼 그곳에서는 실로 처절한 격전이 벌어졌다.  

당시 국군 1사단은 태반이 전라도 출신 병력이었다. 

그것은 사단의 첫 출발지가 호남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병으로 충원되던 병력의 대부분은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 병력이었다. 

말하자면 다부동 전투는 영남과 호남이 한데 뭉쳐 적을 막아낸 싸움이었다. 

그래서 다부동 전투의 의미가 특별하다. 

한국 6.25 전쟁시 다부동에서 왜 더 이상 후퇴를 할 수 없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다부동의 낙동강 전선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지연 작전이었지만, 도착 뒤의 전쟁은 방어전이었다. 

지연전과 방어전은 다르다. 방어전이 더 절실하고 처참하다.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지역을 내주면 대구와 부산은 위험했다. 

그것은 자칫 대한민국이 없어질 뻔한 위기였다.

 다부동 전투는 그래서 의미가 크다. 

한국 6.25 전쟁 당시 다부동에서 밀리면 미군이 한국군을 일본으로 데려가 

재편성해서 전투를 치른다는 얘기가 많이 나돌았다고 한다.

그리고 제주도로 옮겨가 최후 항전을 벌일 것이라는 풍문도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의 전투는 절박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