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쿠르스크 전투 당시 불운했던 독일군의 D형 판터 전차대 - Abandoned German Ausf D Panther Tanks in the Kursk Battle Field

슈트름게슈쯔 2019. 3. 20. 15:19










쿠르스크 전선에 투입된 독일 48 기갑군단의 D형 판터 전차들 -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장에 버려진 독일군의 D형 판터 전차들과 

834번 판터 전차에 올라가서 살펴보는 소련군  -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장에 첫 출전 투입된 200대 D형 판터 전차들의 최대 결점은 잦은 엔진 화재 빈발 사고엿다.

그것은  44톤 중량의 판터 전차 내부에 25톤 중량의 4호 전차에 사용되었던 CMK-3007  트랜스미션을 

장착시켰기 때문에  출력 확장의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발생했던 화재 사고였다.

그러한 이유로 독일군 판터 전차 승무원들을 변속기 고장을 일으킨 차량들을 

쿠르스크 평원에 버리고 밖으로 나와 도망칠수 밖에 없었다.

버려진 D형 판터 전차들을 소련군에게 수거되어 수리후 재활용되게 된다.




동부전선 독일군의 H형 4호 전차의 CMK-3007  트랜스미션  분리 작업 




판터 전차 G형의  AK 7-200 트랜스 미션 



독소전쟁 중반기 독일군에 있어서 판터 전차는 동부전선 전투의 분깃점이자 독일군 승패의 사활이 걸렸던 

쿠르스크 전투의 작전명 치타델 작전의 필수 구성 요소로 여겨졌다.

하지만 판터 전차는 신형 전차에 발생하는 기계적 결함으로 인해  소련군 진영에 대한 독일군의 공격이

 몇 번 지연되었고 쿠르스크 전선의 독일군 진영에는 더 많은 판터 전차들을 비축시켜야 했다.

 판터 전차들이 쿠르스크 전장에 마지막으로 이송된 후 6 일만에 전투가 시작되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형태는 전선에서 전차 승무원들의 전술 훈련과 무전기에 의한 송수신 주파수 조정 훈련및 

조종수들의 주행 훈련이 모두 심각하게 결핍되어 있던 쿠르스크 전투에서 중요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1943년 6월 23부터  29일까지 독일 48기갑군단의 판터 전차 연대에

독일 뉘른베르크에 소재한 마쉬넨파브리크 -아우스부르크-파브리크(MAN)사에서 생산된 

총 200 대의 판터 전차들이 최종적으로 전달되었다. 

그러나 2 대는 화물 열차에서 내려질때 엔진 화재로 인해 그 즉시 손실의 피해를  입었다. 

7 월 5 일까지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될 때  판터 전차들은 184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2일 이내에  전투에 투입시킬수 있는 사용 가능 판터 전차들의 보유 댓수는 40대로 가동률이 떨어졌다


1943년 7월 17일 히틀러가 독일군의 공세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은 판터 전차에 대한 예비 평가를 다음과 같이 히틀러에게 보냈다.


적의 공격과 기계적 결험으로 인해 전투력은 처음 몇 일 동안 급속히 하락했습니다.

 7월 10일 저녁까지 전선에는 단 10 대의 사용 가능한 판터 전차들이 있었습니다.

판터 전차  25대를 잃었습니다 (23대는 타격을 입었고 2 대는 화재 진압 중에 공격을 당했습니다). 

판터 전차 100대는 수리가 필요했습니다 (56대는 적의 포탄에 명중및  대전차 지뢰로 손상되었으며 

44대는 기계 고장으로 손상되었습니다). 

기계 고장의 60 %는 쉽게 수리 될 수 있습니다. 

약 40 대의 팬더가 이미 수리되어 가동시키고 있었습니다. 

7월 11일 저녁 38 대의 판터 전차들이 작전 중이었고, 31대는 대파되었고 131대는  수리가 필요했습니다. 

전투력의 느린 증가를 관찰 가능했습니다.

7월 10일까지 판터 81대의  많은 손실은 전투가 격렬했던 것을 증명합니다.

치타델 작전 동안 267 대의 판터 전차들이 소모되어 파괴되었습니다.



1943년 7월 20일에 발표 된 보고서에 따르면 41대의 판터 전차들이 작전 가능했으며

 85대는 수리가 가능했고 16대는 심하게 손상되어 독일 본국에서 수리가 필요했고 

56대는 소련군의 행동으로 소각되었으며 2대는 엔진 화재로 파괴되었다.

독일군이 쿠르스크에서 공세를 끝내기 전에 소련군은 반격을 시작했고 독일군을 꾸준히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따라서 1943년 8월 11일의 독일군 보고서에 따르면 파괴된 판터 전차들의 댓수는 

156건으로 온전한 형태의 판터 전차들은 9 대에 불과했다. 

독일 군대는 쿠르스크 전투 동안 후퇴를  강요당했고, 전투에서 판터 전차들을 잃었을뿐 아니라 

소련군의 접근으로 손상된 차량을 버리고 자폭시키는 일도 점점 더 어려워졌다.

판터 전차는 쿠르스크 전투에서 장거리 포격으로 소련 기갑 전투 차량을 파괴시킬 능력을 보여 주었지만 

전체적으로 높은 소모율을 보였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이 배치시킨 장갑 전투 차량은 총  2,400 ~ 2,700 대로  그중 7 % 미만이 구성되었고, 

그 효과는 기계적 결함과 쿠르스크 전선의 소련군에 의한 심층적인 방어 체계에 의해 제한되었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이 실시한 가장 중요했던 역할은 2개월 동안의

엄청난 대전차 지뢰 지대 구축이었다고 볼수있다.

그것은 독일군의 치타델 작전 개시를 연기시켜 전투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쿠르스크 전투가 끝난 후 독일 군대는 소련군이 수복한 쿠르스크 돌출부 전선으로부터 영구적인 퇴각을 시작했다. 

판터 전차의 배치 수효는 동부 전선에서 다시 천천히 만들어졌으며 

차체의 안정성이 향상됨에 따라 작전 투입 비율이 증가했다. 

1944년 3월 구데리안은 "거의 모든 결점이 해결되었지만" 많은 장치중 특히 최종 주행과 관련하여 

트랜스미션의 중대한 기계적 결함을 제출 보고했다. 

전선에서 사용 댓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판터 전차는 소련군의 공세로 부터 방어하기 위해  

적의 이동 준비 구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44년 9월에 동부 전선에서 가장 많은 수의 판터 전차들이 투입되었으며 

투입된 총 728대 중 522대가 작전애 투입되었다. 

나머지 기간 동안 동부전선애서 독일군은 판터 전차대에 닥칠 상황은 점차 악화되었다. 

1945년 3월 15일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차량은 동부전선에서 740 대가 기록되었으며, 

그 중 361대가 운용되었다. 

그때까지 소련군은 동 프로이센에 진입하여 폴란드를 통해 전진했다.

1944년 8월에 독일군 판터 전차대는 바르샤바 봉기 중에 자주포 부대의 지원으로 배치되었다. 

그 판터 전차들중 적어도 두 대는 바르샤바 레지스탕스와의 조우 전투 초기에  노획되어 

8월 5일에  겡시우프카 강제 수용소가 해방 된 것을 포함하여 독일에 대항하는 봉기에 사용되었다. 

폴란드 레지스탕스 와첵 소대가 노획한 판터 전차는 마그다(Magda)라는 이름을 붙여져 

겡시우프카 강제수용소 공격에 사용되어 수용소의 벙커와 망루를 파괴시켰다.

그리고 겡시우프카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살해되었다. 

폴란드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인원 2명을 잃었지만 그곳에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 350 명을 해방 시켰다. 

몇 일 후 노힉된 판터 전차는 연료와 배터리 전력이 끊겨 재사용되지는 못했다.



판터 전차의 작동법에 대한 매뉴얼 설명서는 1944년 소련군에 의해 출판되었다.

소련군이 노획했던 독일군의 판터 전차들은 대부분 전리품의 전시용으로 사용되었다.

몇몇 소련군 장교들은 판터 전차에 T-34/85 전차의 85mm 전차포를 장착시켜 

다시 무장시킬 것을 제안했으나 그것은 실행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군은 노획한 독일군 판터 전차들의 댓수가 좀 있었으나 

그들의 군대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전쟁말기 나치 독일측 편에서 

소련측으로 돌아서서 그들과 동맹을 맺은 루마니아군과 불가리아군에 제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