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6.25 전쟁 Korean War

장진호 전투시 미 제 1 해병사단의 파괴된 황초령 수문교 복구 - Korean War US Marines traverse the bridged cliffside gap at Funchilin Pass

슈트름게슈쯔 2019. 6. 11. 21:27





한국 6.25 전쟁중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이 폭파시켜 파괴된  황초령의 수문교위로 공중 투하로 전달된

 부교 자재로 설치 작업을 끝낸 후 매우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미군 GMC 병력 수송 트럭 - 1950년 12월 9일 



황초령은 경남 창녕과 서울 북한산과 함경남도 이원군의 마운령과 더불어 신라 제 24대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진흥왕 24년이었던 568년에 함경남도 장진군에 순수비를 세웠던 4곳중 1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이 한국 6.25 전쟁 당시 북한 공산군을 지원하여 한반도를 넘어 쳐들어온 중국 공산군대

중국 인민지원군 제 9병단에 포위되어 수세에 몰린채 괴멸 직전에 이르렀던 

미 제 1 해병사단의 병력 본진을 무사히 후퇴시켜 기사회생시켰던 

마치 기적같은 퇴로를 열어주는 대단히 중요한 후퇴 이동로가 되었다.

장진강 발전소는 장진호의 수량을 황초령으로 역류시켜 전기를 생산하는 유로변경식 발전소였다. 

그래서 역류지점에 수문교가 있었다. 

1950년 12월  장진호 지역 전투시 중국 공산군은 

 미 제 1해병사단의 후퇴로를 차단시키기 위해  황초령의 수문교를 폭파시켰다.

중국 공산군이 황초령 수문교를 파괴하면서 연합군은 후퇴길이 막혀 버렸다. 

고토리 남쪽 6㎞ 지점에 있는 수문교는 전장 450m 구간 중 일부가 중공군이 다이나마이트로 

폭파시켜 끊어 놓는 바람에 미 제 1 해병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리를 복구시키는 데 총력전의 

노력을 쏟을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리를 복구시킬 자재가 없었다. 

그것은 다급한 후퇴 과정에서 다리 복구를 위한 자재와 설비를 챙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 제 1 해병사단이 이 다리를 복구하지 못한다면 여러가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우선적으로 미군 병력을 이동시키는 과정이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고, 

다른 무엇보다 40여대의 전차와 1400대에 달하는 차량을 적진(敵陣)에 

그대로 고스란히 남겨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탸개할 유일한 방도는 조립교를 미 공군이 수송기로 날라 전달해주는 길밖에 없었다.

그것은 실로 미군 병력을 제때 후퇴시키는 천금과 같은 시간을 벌어줄 공수(空輸)작전이었다. 

미 제 1 해병사단 공병대대장은 함경북도 흥남에 있는 공병창(工兵廠)에 연락하여

 수문교의 끊어진 다리를 복구할 수 있는 조립교를 공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작전이 결코  아니었다.  

일본 도쿄에 있던 유엔군 총사령부는 기술진을 흥남에 급파했다고 한다.

그것은 기술적으로 상당한 노하우를 요구하는 작전이었기 때문이었다. 

함경도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향해 막중한 교량 자재를 투하하는 일이었다. 

차칫 잘못하면 공중에서 투하한 자재와 설비가 지상에 닿는 순간 발생하는 충격으로 부서지기도 쉬웠다. 

그리고 지형이 오밀 조밀한 산악지형이라서 정확한 투하지점을 잡아내는 일도 결코 쉽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군의 움직임은 매우 신속하고 정교했다. 

자재 투하시 지상과의 충격으로 자재와 설비가 부서지는 상황을 감안해 

미군은 모두 8개의 조립교 자재를 준비했다. 

이어 C-119 수송기에 자재와 설비를 실은 뒤 800피트 상공에서 준비해 간 8세트의 조립교 자재와 설비를 투하했다.

  밤중에 넘어선 황초령 기록에 따르면 조립교 세트 중 1개는 적진에 떨어졌다고 한다. 

1개는 땅에 닿는 순간의 충격으로 부서졌다.

 8개 중 6개가 결국 황초령을 넘어서려는 미 제 1해병사단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에 따라 미 제 1해병사단 공병대대는 긴급 보수에 나서서 12월 9일 오후 3시경 다리 복구를 끝낼 수 있었다. 

  미군은 대담한 공수작전으로 끊겼던 다리를 복구한 뒤 교량을 통과해 후퇴중인 미 해병대원들은 

수문교 자재와 설비를 신속하게 현지에 투입하는 일은 훈련에 훈련을 거쳐야 가능한 일이었다.

 미군은 전쟁의 여러 수요에 대비해 그런 훈련을 반복해서 실시했던 셈이고, 

결국 퇴로 상의 매우 엄중한 기로(岐路)에 놓여 있던 미  제 1 해병사단에게 조립교의 자재와 설비를 

성공적으로 투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중공군 또한 체력은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문교 복구를 위해 미군은 매우 인상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작전 수행능력을 보여줬다. 

수문교 인근에 매복 중이던 중공군은 그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사기가 떨어졌을 법하다. 

수문교는 신속하게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공격을 펼치려던 중공군은 

미 제 1해병사단 7연대 1대대의 반격으로 어쩔수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미 해병사단의 수많은 차량과 전차는 다리 위에 선 유도병의 안내를 받으면서

 12월 9일 밤중에 수문교를 지날 수 있었다. 

중공군은 의외로 이 시점 이후부터는 제대로 공격을 펼치지 못했다.

 미 제 1해병사단은 중국 마오쩌둥 공산군대의 공격에 괴멸되는 것은 피하여 

가까스로 험난한 고개였던 황초령을 통과하여 결국 무사히 흥남 철수를 위해 진흥리에 진입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