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6.25 전쟁 Korean War

한국 6.25 전쟁 당시 대구역의 국군 기병부대- Korean Army cavalry regiment in the Dae Gu Railkway Station

슈트름게슈쯔 2019. 6. 14. 15:17







한국 6.25 전쟁 당시 대구역에서 전선으로 향하는 육군 기병부대- 1950년 9월 16일 



한국 6.25 전쟁 당시 남한에는 500필의 말로 구성된 기병 부대가 있었다.

기병부대를 지휘했던 자는 항일유격대 출신이자  중국군관학교 기병과를 졸업한 장철부 대대장이었다.    

그는 총탄과 포탄이 쏟아지는 와중에서도 마상에서 늠름하게 지휘를 하며 부대원들의 사기를 고양시켰으며 

기관총과 박격포로 타격하며 적군의 병력과 화력및 위치등을 예리하게 간파했다고 한다.

 그러한 명석한 판단은  북한 공산군의 공세를 최대한 지연시켰으며 한편으로 상당한 피해를 끼쳤다.

장철부 대대장은  7월 금강 방어작전 당시  미 63포병대대 B중대가 수백의 공산군대에게 포위되어 위험에 처하게 되자 

직접 기병부대를 지휘하여 적의 배후를 급습했다. 그런데 이때 장철부 대대장이 구사했던 전술은

현대적인 기병 운용과는 달리  무모하면서도 과감한 돌격전술이었다. 

그렇게 국군 기병부대가 공산군대의  대열에 난입하여 사분오열 시킨 덕분에 

미군 포병 중대는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었다.

장철부 대대장이 그렇게 과감한 돌격전술을 벌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50년 6월 29일 한강 순찰 중  거룻배로 도하하는 공산군의 소대를 기습 돌격하여 전멸시킨 적도 있었다고 한다.

 공주에서는 정찰 경계 임무 중에 적 1개 대대가 침입해오자, 기습하여 섬멸시키고 적 대대장의 지프를  

노획하기도 했다.  그렇게 분전하기는 했지만, 국군 기병부대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6.25 전쟁  발발 초기에는 기병 훈련이 부족해 총성에 놀란 말들이 전투 중에 달아나 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호주군 전투기의 오인 사격을 받아 말과 기병들이 죽기도 했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점은 보급이 여의치 않았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말의 발바닥에 붙이는 편자였다.

당시 닮아버린  편자를 갈아주지 못해서 눈물을 머금고 말을 버리고 가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그렇게 열악한 와중에서도 기병부대가 분전을 하며 아군의 후퇴를 돕고 적을 타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자

북한 공산 인민군은 정예 12사단을 동원하였고  김일성의 수하 오진우가 766여단을 동원해 기병부대를 압박했다. 

결국 기병부대는 경북 청송에서 공산군대에 포위되어  상당수의 전력을 상실해 버렸다.

그와 같이 새로 보충된 보충병도 전투 경험이 없는 전투경찰들이었기에 인민군의 공세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장철부 대대장과 기병부대원들은 전투중 극히 불리하고 위급한 상황에서도 

야간에 기습한 적들을 뿌리치고 포위망을 벗어나려 애썼다.

 그러나 그 와중에 장철부 대대장은 중상을 입었다.

장철부 대대장은 부상으로 인해 권총 자살로 결국 굵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