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스탈린그라드 설원의 소련군 마지막 공격과 항복한 기진맥진 독일군 포로들-Exhausted German POWS surrended by the Soviet Red Army's last attack in the snowfield Stalingrad

슈트름게슈쯔 2020. 8. 28. 08:56

스탈린그라드 설원으로 마지막 공격을 가하는 소련군 병력과 영하 30~40도의 혹한 추위와 굼주림에 의한

티푸스 질병으로 기진맥진 전의를 상실하여 항복한 독일군 포로들 - 1943년 2월

 

 

 

코카서스 산맥 너머 산유국 소련의 최대 석유 생산시설이 있는 유전지대인 카스피해 연안의 바쿠 유전을 차지하기 위한

히틀러의 야망으로 독소전쟁을 일으켜 소련을 침략한 나치 독일과 그 침략자들로 부터 국가를 지켜내기 위해

수많은 병력을 투입시켰던 소련과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제 2차 세계대전중 연합국 군대와 추축군 군대의

전쟁 승패가 달린 가장 중요한 전쟁의 분깃점으로 작용이 되었던 형세에 따라

세계인들은 스탈린그라드 전황 결과의 뉴스를 기다리는 가운데 그 전투의 종말은

1943년 2월 2일 독일군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소련군에 항복한 독일군 포로들은 22명의 장성급을 포함한 9만 1000명이었다.

그들은 기아와 질병에 싸울 기력을 잃어 도저히 더 싸울 수 없었다.

처음에 스탈린그라드에 갇혔던 25만 명의 추축국 병사 중 항복한 포로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사망했다.

파울루스의 항복에 대해 아돌프 히틀러는 “그는 영광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앞두고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택했다.”라며 화를 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 규모의 전투였다. 이 전투는 199일간 지속되었다.
전투의 범위가 광대했고, 사상자 수가 지나치게 많을 것을 두려워 소련 정부의 금지 때문에 정확한 집계도 어려웠다.

전투 초기에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심한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소련군이 독일군의 약한 측면(주로 루마니아군)을 공격 돌파하여 독일 제 6군의 나머지 병력을

포위하기도 전에 독일 제 6군은 이미 큰 손실을 입고 있었다. 어떤 때는 독일군이 시의 90%를 장악하기도 했으나

소련군 병력은 독일군의 점령 지구 안에서 필사적으로 싸웠다.

독일 제 4기갑군의 일부도 이를 것이라고 추산한다. 독일이 40만 명, 루마니아가 20만 명,

이탈리아가 13만 명, 헝가리가 12만 명에 달하는 인명 손실을 본 것이다.

전투에서 살아남아 포로가 된 9만 명도 1943년 봄에 대부분 티푸스로 사망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소련에 억류되어 전후 복구 사업에 강제 동원되다가

최종적으로 1955년 독일로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자는 5천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물론 독일도 소련군 포로를 가혹하게 다루기는 마찬가지였다.

5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 출신 독일 부역자(히비:Hiwi))들도 소련군에 사살되거나 잡혀 처형되었다.

각종 문헌 자료에 따르면 소련군의 손실은 총 1,129,619명이라고 한다.

478,741명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650,878명이 부상당했다.

이 수는 작전의 범위를 넓게 잡아 추산한 것이다. 또한, 독일 제 6군과 제 4기갑군이 시내로 진격해 온

첫 주의 공습에서 4만여 명의 소련 민간인이 시내나 교외에서 사망했다.

스탈린그라드 시 이외의 민간인의 총 사망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소련과 추축국의 전체 인명 피해는 170만에서 200만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