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독소전쟁 초기 북부 전선에서 항복한 소련군 장교 포로 - Soviet red army officers POWs surrendered In the Northern front during the early German-Soviet War

슈트름게슈쯔 2020. 11. 17. 00:39

 

 

독소전쟁 초기 북부전선 발트해 3국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서 독일군에게 항복한

인상적인 표정의 소련군 정치 지도원 장교 포로 - 1941년 6월 

 

 

독소전쟁 초기 소련군 정치 장교들은 전문 군사 지식이 없었기에 전투 지휘에는 도저히 쓸모가 없었다. 

물론 개중에도 쓸 만한 정치장교가 있긴 했지만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경우가 워낙 많았다. 

그들은 군사적 배경은 전혀 없이, 당에서의 지위가 높은 고급 당료들이 전쟁이 발발하자

소련군에 들어와서 사병 대신 정치장교를 한 경우가 꽤 많았으며, 스스로 대원수가 된 스탈린을 비롯하여

니키타 흐루시초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니콜라이 불가닌 등 모두 스탈린이 전쟁터에 가라고 하기 전에는

군대 근처에도 안 가본 사람들이었다.  그런 주제에 권한은 지휘관과 동등하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정치장교 체제가 처음 도입된 소련 적군은 부대 운용계획을 수립하는 장교가 당원이든 비당원이든

일단 지휘권이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원칙에 따라, 부대 지휘관이 수립한 작전을

프롤레타리아 병사 대중의 대표인 정치장교의 승인을 받아 병사 전원의 만장일치라는 형식으로

지휘를 받게 돼 있었으니 당연히 권한이 지휘관과 동등한 것이다.  

이 구조는 정치장교가 지휘관의 군사적 전문성을 철저하게 보장하는 경우에는 그럭저럭 쓸만한

구조임이 적백내전에서 입증되었으나, 정작 전문 지휘관들의 사상적 기반을 의심하는

정치장교들의 태클이 기본이 되다 보니 결국에는 아무리 좋은 경우라 해도 지휘체계가 이원화되면서

의사결정 및 작전지휘의 효율이 크게 저하되고, 최악의 경우에는 지휘체계가 군사적 문외한에게

완전히 넘어가는 대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독소전쟁 당시 전쟁을 총 지도해야 할 당 군사위원회가 군사 비전문가들이 워낙 많았고,

군사작전의 정치적 효과를 지나치게 중시했기 때문에 일선 지휘관들의 효율적인

건의를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당연히 정치장교는 당 중앙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덤으로 군사경험이 없는 관계로 눈 앞에서 소련군 병사들이 다 죽어나가는 판에도 자신의 지시로 인해

무슨 결과가 나올지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간신히 담당 정치장교를 설득했다고 해도,

상위부대의 정치장교가 압력을 넣으면 그러한 사항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버렸다.

상위부대로 올라갈 수록 정치장교의 숫자가 불어나기 때문에 지휘권의 혼선이 더 심해진다.

부대 지휘관과 정치장교간, 정치장교끼리 견해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싸움만 엄청나게 일어나지

뭔가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군대는 지휘관과 정치장교의 양립속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갈팡질팡만 하고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정치장교를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하자니

정치장교의 고자질이 두려워서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치장교가 상급부대에 있는 일 없는 일 전부 고자질을 할까봐 정치장교를 살살 달래는 일 역시

지휘관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가 되어버려 지휘관은 타국 군대에서는 전혀 관여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업무까지 추가되어 피로가 누적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심지어는 지휘관의 업무가 이건 부대를 관리하는 사람인지 정치장교의 뒷 치다꺼리를 하는 사람인지

헷갈리는 수준까지 가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지휘를 잘해도 정치장교가 트집잡고 고자질을 하면

총살까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정치장교가 전선에서 앞장서면 사기진작의 효과가 있겠지만,

그 정치장교가 선두에 서서 빌빌대거나 전투의욕을 상실해 버리면 답이 없다.

아무리 똑똑한 기운을 가득 채워도 정치장교도 사람이다. 포탄의 충격에 쇼크를 일으키거나

총성과 비명에 움츠려들어서 주저앉아버리면 주변의 사병들도 동요할 수 밖에 없는 관계로 전술적으로

옳은 돌격이나 진격의 발목을 잡는 미친 사태가 발생한다. 무엇보다도 많은 수의 소련군 정치장교들은

대부분 총 한번 집어본적도 없는 책상물림 출신들이 많았던지라 일개 사병보다도 더 바발거리는 경우도

보여지곤 했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1930년대부터 소련군은 내부에서는 정치장교의 권한을 줄이고

단일 지휘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커다란 노력을 했다. 정치장교에 관련된 문제점은 소련군 내부에서

이미 1930년대 초반부터 제기되었던 것이었고, 그 권한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었다.

그게 소련군 정치장교의 폐해를 막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일단 그런 노력은 있었다.

문제는 대숙청을 겪으면서 이 사항을 협의해야 하는 사람들이 지휘관과 정치장교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숙청을 시킨 덕분에 논의가 종잡을수 없었고, 지휘권 문제를 마무리짓지 못하고

신규 소련군 장교 인력으로 대숙청의 피해를 복구하는 상황이었던 상태에서

그러한 소련군 지휘관의 리더십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어수선한 상황에서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한 게르만족 강적 나치 독일의 침공이라는 대 위기를 맞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