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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카 내전 당시 란스베르크 L-60 전차와 AMX-13 경전차 Dominican Civil War Lansberk L-60 Tank and AMX-13 Light Tank

슈트름게슈쯔 2021. 1. 7. 23:20

 

도미니카 공화국 내전 당시 수도 산토 도밍고 시내의 란스베르크 L-60 전차에 올라탄 호헌파 시민들 - 1965년 5월 

 

 

1965년 4월 24일 발발한 도미니카 공화국 내전은 1963년 2월 수립된 보쉬 대통령과 민주정부를 무너뜨린 

보수적 군부권력에 대한 1963년 헌법을 지지하는 호헌파의 반격이었다. 미국 존슨행정부는 보수적 군부권력의 편에

서서 내전에 무력 개입했다. 그러한 내전 상황에서 미국인의 보호를 위해 필요한 병력을 투입했다면 그

렇게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 존슨 대통령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도미니카공화국을 사실상

점령해 버렸다. 그것도 도미니카공화국이 ‘제2의 쿠바’가 될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과장한 형태였다.

존슨 대통령이 그런 결정을 이유는 세 가지였다. 하나는 베트남전쟁과의 연계였다.

존슨 대통령은 미국의 코앞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베트남전쟁에

미국이 쏟을 인적 물적 자원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 수 없을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에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 도미니카공화국 내전을 신속히 해결해야 했다.

다른 하나는 민주정부가 아니라 미국이 원하는 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진보동맹의 취지에서 보면 미국은 보수적 군부권력에 저항하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보쉬와 호헌파를 당연히 지지해야 했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과 그의 뜻을 따르는 관리들은

내전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보쉬와 그의 추종자들을 제외시켰다.

도미니카 공화국 호헌파가 봉기하자 당황한 미국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호헌파 지도부를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것으로 왜곡하여 미국의 군사개입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오도했다.

마지막으로 존슨 대통령은 도미니카공화국 내전을 계기로 자신의 새로운 정책을 선언하고자 했다.

그는 ‘제 2의 쿠바’를 막는다는 구실로 주권 국가에 무력으로 개입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물론 존슨 대통령은 자신의 행동이 자유주의자에게는 자유와 평화의 보호를,

보수주의자에게는 공산주의에 대한 과감한 대응을, 그리고 국내외 모두에게는 자신과 미국이

약골이 아님을 입증하고 싶었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목적은 존슨독트린의 선언이었다.

 

 

 

 미 해병대 M50 온토스의 무반동포 공격에 의해 파괴된 산토 도밍고 시내의 도미니카 공화국 헌법 지지 

호헌파의 스웨덴제 란스베르크 L-60 전차 - 1965년 5월 9일 

 

 

1965년 5월 9일 카리브해에 위치한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산토 도밍고에 미 공수부대가 투입된다. 

미군은 도미니카의 내란으로 억류된 미국인을 구출한다는 명분으로 침공을 감행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친미파 군사정권을 몰아내고 집권한

반미파 카마뇨 대령 일파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미국은 앞서 1965년 4월 말부터 같은 목적으로 만명이 넘는 해병대 병력을 도미니카에 상륙시켰다.  

그후 반미적인 카마뇨 대령은 외국으로 쫓겨나고 도미니카에 미군이 주둔하게 된다.  

도미니카 내전과 미군의 침공이 있은 지 1년 뒤인 1966년 6월 실시된 선거에서

결국 친미파인 호아킨 발라게르가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도미니카 내전 당시 산토 도밍고 시내에 투입된 미 해병대의 M48 패튼 전차와

미 공수부대의 106mm 무반동포 장착 지프 - 1965년 5월 

 

 

도미니카 내전 당시 휴전을 성립시키하기 위해 도미니카 공화국 내전에 개입한 미군은

서반구 역사상 보기 드문 전차 전투를 경험했다.  

전차는 미국의 뒷마당으로 간주되는 서반구의 분쟁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기에

그곳에서의 전차 전투는 더욱 드물었다.

하지만 그러한 전차 전투중 한 전투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발생했었다.

그것은 1965년 도미니카 호헌파 군대가 스웨덴제 란스베르크 L-60 전차를 이용하여

전투를 벌인것으로 수도인 산토 도밍고에서 미 해병대의 기갑차량과 조우했을 때였다.  

미국은 도미니카 공화국에 반복적으로 개입하여 그 나라의 세관을 점령하고 운영하기도 했다.

1961년 도미니카 공화국의 지도자 라파엘 트루히요가 암살된 후

미국으로 부터 군사 지원을 받는 자들에 의해 도미니카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쿠데타가 계속 발생되었다.

1962년 12월, 후안 보쉬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진보적 정치, 사회 개혁, 정치적 자유,

군대 예산 삭감을 촉구했다. 그러나 도미니카 군부는 7개월 만에 보쉬 정부를 전복시켰다.

1965년 4월, 도미니카 공화국은 프란시스코 카마노 대령의 친 보쉬 성향의 호헌파 헌법 지지주의자들과

도미니카 공군 엘리아스 웨신 장군의 지도 아래 군부세력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휘말렸다.

윌리엄 베넷 도미니카 주재 미국 대사는 헌법 주의자 호헌파들에 대한 개입을 제안했지만,

미국 린든 존슨 대통령은 도미니카 공화국 군부세력이

도미니카 헌법 지지 호헌파를 다룰 수 있기를 바라며 주저했다.

1965년 4월 27일, 미국 대사는 양측 간의 화해를 위해 회의를 열었지만 편견 혐의로 기소되어

헌법 지지 호헌파 지도자는 계속 싸우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 1,800명의 군부세력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구입한 AMX-13 경전차 12 대와 란스베르크 L-60 경전차 24 대,

란스베르크 링스 장갑차 13 대를 사용하여 수도 산토 도밍고 중심에 공격을 시작했다. 

 

 

도미나카 내전 당시 헌법지지 호헌파 세력의 프랑스제 AMX-13 경전차 [푸에블로] - 1965년 5월 

 

 

도미니카 공화국 군부세력의 병사들은 그들의 전차들을 지켜내지 못했다.

호헌파 병사들은 가스 폭탄, 소총, 기관총및 박격포로 적군을 공격할 기회를 가졌다.

군부 세력의 전차병들은 차량을 버리고 달아났다.

호헌파들은 다수의 스웨덴제 란스베르크 L-60 전차및 프랑스제 AMX-13 경전차를 노획하여

군부세력의 공격을 역학적으로 차단시켰다. 1965년 4월 28일 미국 존슨 대통령은 도미니키 공화국 내

미국 시민의 대피를 돕기 위해 제 6해병대대를 배치했다. 미 해병대는 헬리콥터에서 착륙하여 미 대사관 주변에

빠르게 바리케이드를 쳤고 미 해군 함정은 도미니카로 급파시킬 LVT 상륙용 장갑차, 온토스 대전차 차량,

M48 패튼 중전차를 수송선에 적재시켰다.미 대사관 근처에서 미군 병사가 총에 맞아 사망했고

이후 총격전으로 현지인 도미니카 소녀가 사망했다.

그러나 미국 시민의 대피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추가 손실없이 끝났다.

1965년 4월 29일 도미니카 군부세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베넷 미 대사는 호헌파들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미니카에 미국 군대를 보낼 것을 존슨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미국 존슨 대통령은 도미니카에 일방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파워 팩이라는 군사 캠페인을 시작했다.

하루 후, 미 제 82 공수부대 사단은 산 이시드로 기지와 6 해병 여단의 나머지 2개 대대를

파병시키기 위해 수송 비행을 개시했다.

당시 도미니카에 있었던 미군 병력의 총 수효는 21,900 명이었다. 표면적으로, 미국은 도미니카 공화국에

중립을 증명하기 위해 휴전을 제의했으며, 도미니카 공화국의 군부세력 라인을 보호하기 위해

호헌파가 통제하는 지역으로 진출했다. 미군은 모든 집을 점령하기 위해 호헌파들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들이 지정된 장소에 도착했을 때 미국인들은 구출할 군부세력이 철수하여

전선 사이에 틈이 생겼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투중에 미 해병대의 전차는 도미니카 호헌파 세력의 전차와 여러 차례 조우했다.

그것은 도미니카 호헌파 세력의 L-60 전차와 미 해병대 M48 패튼 전차 사이의 전투였다.

란스베르크 L-60 전차는 무게가 8 톤에 불과하고 무장의 화력이 약한 37mm 대전차포로 무장하여 

맞대결로 48톤 중량의 미 해병대 M48 패튼 전차에 손상을 끼칠 가능성이 별로 없엇다.

반면에 미 해병대 M48 패튼 전차는 90mm 대전차포로 무장했다.

도미니카 반군의 란스베르크 L-60 전차는 미 해병대의 M48 패튼 전차가 아닌

대전차 기갑차량으로 M40 106mm 6련장 무반동포가 장착된 M50 온토스에 의해 파괴되었다.

또한 미 해병대의 M50 온토스는 도미니카 호헌파 세력의 프랑스제 AMX-13 경전차를 상대로

히트앤드 런 전술을 사용하기가 좋게 차체가 낮았다.

미 공수부대와 미 해병대가 합병한 후 두 전투 파벌은 수도인 산토 도밍고에서 분열되었다.

1965 년 5월 6일, 미국은 휴전을 선언하고 도미니카 정부 아래 새로운 민간 군사 정부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측 모두 휴전에 만족하지 않아 작은 전투가 지속되었다. 도미니카에 대한 미국의 일방적인 개입에 대한

비판을 완화하기 위해 미국은 82 사단, 브라질 보병 대대, 파라과이, 니카라과, 온두라스의 중대로 구성된

공동 평화 유지군을 조직했다. 그 부대는 브라질 우고 파나스코 알빔 장군이 이끌었다.

과도기 정부에 대한 영향력이 약하다는 것을 두려워한 도미니카 호헌파 헌법 지지자들은 1965년 6월 15일

박격포와 기관총과 탱크로 브라질 군대와 미국 82 사단의 수비 진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로인해 67명의 도미니카 호헌파 세력 헌법 지지자들이 사망했고, 24 명의 미국인과

5명의 브라질 군인이 전투 중 부상을 입었다.

미국은 계속해서 M40 무반동포을 사용하여 란스베르크 L-60 전차를 격파시켰다.

항전에 실패한 호헌파 헌법 지지자들은 협상 테이블에 나왔다.

1966년 미국은 호아킨 발라게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도미니카에서 모든 군대를 철수했다.

도미니카군의 나머지 12대의 스웨덴제 란스베르크 L-60 전차들은 미국에 의해

정밀 검사되어 2002년까지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