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합포 해전이 있었던 곳은 진해인가 마산인가?

슈트름게슈쯔 2009. 10. 14. 12:04

 

 

 

이민웅님의 [임진왜란]해전사 81쪽을 보면

 

합포는 임진장초에 밝힌바와 같이 웅천(지금의 진해시)에 있는 합포이다.

20세기 중반이후 이은상이 [완역 충무공 전서]등의 저서에서 1차 출전의

두번째 해전 장소인 합포를 현재의 마산으로 비정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상황적으로도 거제도 북단에서 오후 4시부터 추격하여 해질녘에

상륙이 가능한 곳은 웅천 합포외에는 찾을수 없다.

더구나 현재에도 진해에는 합포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뿐만아니라 임진장초에는 창원땅 마산포(고려시대의 합포)라는 지명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는 뭍으로 올라 도망한 일본 수군의 배를 모두 불태우는

전과를 거두었고 밤중에 건너편 창원땅 남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라고 기술한다.

 

 

그런데 이봉수 저 [이순신이 싸운 바다] 36쪽에는

 

최근 합포해전을 치렀던 장소에 대해 일부 논란이 있으나 합포해전을 치렀던 곳은

마산 왜성의 흔적이 남아있는 지금의 산호공원 즉 용마산 아래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작성된 가장 정밀한 지도인 동여도에 합포는 마산포 ,월영대와 함께

뚜렷이 표기되어 있으며 마산 이외의 근처 어디에도 합포라는 지명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현재 진해 근처에는 원포라는 지명이 있었을뿐 합포는 없었다.

 

근자에 진해 인근에 학개(鶴浦)라는 지명이 등장했지만 조선시대의 合浦와

연결시키기에는 무리다.

합포는 임진왜란 당시 마산포라고도 했던 곳이다.라고 기술한다.

 

위의 두 주장을 놓고 좀더 검토해보자.

 

동여도로 좀더 자세히 보면 마산포와 합포는 병기되어 있고 고려시대 뿐 아니라

조선시대에도 창원땅 합포라 했던 것이 분명하다.

현재의 마산 근처에는 월영대,두척산 (무학산),반룡산 등과 함께 합포 마산포가 같이 나온다.

 

동여도 상에 진해 근처에는 장복산,안민령(안민고개)

원포,풍덕포,하서 등이 있었고 합포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현재에도 진해에 합포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2004년판 진해시 행정지도에는

진해시 풍호동 수치 인근에 학개(鶴浦)가 남아 있을뿐 합개(合浦)는 보이지 않는다.

 

상황적으로 오후 4시에 추격하여 해질녘에 거제 북단에서

현재의 마산까지 갈수 없다고 했으나 합포해전이 있었던 날은

양력으로 6월 16일로 하지와 가까워 저녁 8시 까지는 해가 있었었다.

 

그리고 여름철이라 순풍인 남풍이 불었으므로 돛을 두개씩 다는 조선 함선은

노를 함께 저을 경우 2~3시간이면 마산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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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보도]

 

현장에 가면 이순신 장군이 보입니다.옛 서적이나 작가적 상상력만으로

그를 재단하려 해서는 안됩니다.

 

40대의 평범한 한 직장인이 최근 일고 있는 이순신장군 재조명과 관련

천편일률적인 찬양과 고증작업에 일침을 가하는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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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싸웠던 현장을

하나하나 되짚었으며 현장에 거주하는 토박이들을 만나 지금까지

전해져오는 이순신장군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모았다.

 

그 결과 이씨는 이순신 장군이 임란 당시 기록에 나오는 진해는 현재의 경남

진해시가 아니라 마산시 진동면 일대이며, 사천 해전이 있었던

사천 선창은 해안 매립 때문에 지금은 흔적을 찾아 볼수없다는 점 등

그동안 알려진 것과는 다른 몇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또 이씨는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합포해전의 장소가

진해 인근 이라는 주장에 대해 조선시대 지도인 동여도를 이용해

실측해보니 현재의 마산이 분명하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못 박았다.

.............................(하략).............................................

 

염창현 기자 (2004년 10월4일)

 

                                                                                          출처 : http://cafe.naver.com/kbsleesoonshin/3483

                                                                                               

 

 

 

 합포해전  진해 합포의 의문점

 

 

진해 합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진해 합포의 의문점에 관해 풀어야 할것이다.

그냥 이순신 장군의 장괘에 나와있는 내용만 가지고 진해 합포라고 주장하는데 진해 합포의 의문점은 너무 많다.

 

1.오후 4시에 출발하여 해가 떨어질때까지 왜선을 추격하였다고 했는데 합포해전이 있었던 6월 16일날 해가지는 시간이 오후 7시 50분 였는데 영등포에서 진해 합포까지는 1시간 10~30분 내외다.

그럼 오후 4시에 출발한 이순신 함대는 오후 5시 10분에서 30분 사이다.

해가 지기 전이라는 이야기다.

 

2.왜선이 도망가면서 왜 하필 진해 합포로 갔을까?

바로 옆 수치나 행암으로 갔으면 도망가기 더 좋은곳인데 왜 하필 합포냐는 이야기 이다.

도망을 가는 입장에서 앞뒤를 따질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이야기 도 있을수 있겠지만 바다에서 보면 진해 합포와 수치는 보인다.

보기에도 합포와 수치 포구의 차이가 나는데 왜 하필 합포라는 곳에 들어갔느냐는 것이다.

 

3.진해 합포의 지명 문제이다.

이순신 장군이 살았던 그 시대에 정확한 지도가 없었기 때문에 자로 잰듯이 정확히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기에는  그렇지만 그후 제작한 동여도에는 진해땅 합포는 없다.

그리고 진해 합포라는 곳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는지에 관해서 문헌에 나온 자료는 없다.

내가 진해 합포라는 곳을 찾아갈때 2007년 3월14일(화이트데이날) 그날 수치에서 합포로 오는 도로포장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전에는 좁은길을 통해서 차량이나 사람이 이동했다.

그 말은 바꾸어 말하면 진해 합포라는 곳이 오지중에 오지라는 이야기이다.

아래 그림지도는 동여도중 안골포와 웅천에 관련된 지도이지만 이곳에도 합포는 보이지 않는다.

웅천 밑에 제포 성지는 보인다.우측 아랫쪽에 안골포가 보인다.

 

 

 

 

4. 진해 제포 성지를 쌓으면서 1437년에 마산 합포에 있는 해군 기지(수군령 절제사영 - 절제사는 종3품 관직)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쌓았다고 한다.

그만큼 마산 합포라는 곳이 해군에게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는 이야기인데 진해 합포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없다.

 

5.2000평 남짓 밖에 되지 않는 진해 합포지역으로 왜 도망을 갔을까?

뒤로 가파른 산이 있어 도망을 갈수도 없는곳인데 왜 그곳으로 갔을까?

 

6.근래 이순신장군의 흔적 찾기 재조명 바람이 불고 있는데도 진해에서는 진해 합포를 합포해전이 있었던 곳으로 주장하지 않을까?

 

                                                                                           

 

                                                                                                                     출처: http://kr.blog.yahoo.com/ds5jbw/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