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考古學]

700여년 만에 밝혀진 청산별곡의 비밀

슈트름게슈쯔 2009. 10. 15. 14:27

              

 

 파키스탄 염소의 작대기타기 중심잡기 노상 서커스 공연

 

 

염소의 나무 토막 타고 중심잡기 노상 서커스 공연

 

 

 

              [고려가요 청산별곡 中에서]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에정지 가다가 드로라

 

                  사스미 짐대에 옴아셔

 

                  해금을 혀거든 드로라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700여년 만에 밝혀진 청산별곡의 비밀

 

고려시대 후기의 대표적 향가인 청산별곡의 "사스미 짐대에 옴아셔  해금을 혀거든 드로라" 이부분은

그동안 학계에서의 연구와 해석이 분분하였다

 

사미 짐대에 올아셔 奚琴을 혀거를 드로라

      

사(鹿)의 주격형- 양주동 박사(해학적 표현)

       ‘사미’의 오자 - 김형규

       사슴으로 분장한 인물, 山臺雜戱를 공연하는 광대 : 박병채, 서재극, 김완진, 박노준

      

지배계급, 당시 부조리한 사회에서의 귀족계층 : 전규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기적을 의미하며 기적을 바란다 : 정병욱, 이승명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을 비유하거나 마음의 소지를 듣는 것 : 이인모, 홍기문, 김복희

 

김형규는 짐대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사람이므로 사미는 사미의 誤記라 보았고,

 

정병욱은 있을 수 없는 일, 즉 기적이라 보았다.

 

이승명은 네다리가 장대에 묶인 사슴이 애처롭게 울어 대는 것을 해학적으로 비유한 것이라고 보았고

 

김완진, 박병채, 서재극등은 사으로 분장한 사람이라고 보았는데

 

이 설은 사미는 단어를 변형시키지 않고서 해금을 켜는 주체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위의 이러한 가설들은 고려시대 당시 고려와 고려 주변의 북방 민족과 그들과 교류한 중앙아시아및

남부 아시아인 인도 지역의 세계 인류 문화를 대입시켜 볼때

사슴으로 분장한 사람이 해금을 켠다는 것은 너무나 아둔한 가설이라고 보인다.

고려시대 청산별곡이 생성된 연유는 외부적으로 거란·여진·몽고족 등 외족의 끊임없이 계속되는 침략과 ,

내부적으로 이자겸(李資謙)의 난, 묘청(妙淸)의 난에 이어, 정중부,이의방,이의민,경대승,최충헌,최우,최의,최항의

무단정치가 지속되는 고려시대의 어지러웠던 정치적 사회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래서 청산별곡의 지은이는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는 학설이 제기된다.

 고려시대 후기의 대표적 향가인 청산별곡의 부분중 후기 학자들의 해석이 분분한  그 부분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인 서울대학교의 국사학자 노태돈 교수나 화랑세기 필사본을 옮긴

박창화의 화랑세기를 번역한 서강대 이종욱 교수및

일본의 고대 한반도 임라 일본부라는 거짓 식민지 학설에 장단을 맞춰주는 한국의 강단 사학자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정설 사학으로 유명한 한국의 걸출한 사학자인 이덕일 교수도 밝혀내지 못했던 수수께끼였다.

과거의 해석중 2가지는 사슴모양의 탈을 쓴 광대가 장대에 올라가서 해금을 켠다고 해석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해석도 대단히 아리숭하면서 역학적으로 이치에 맞지않는 해석이라고 볼수있다.

그러한 입장의 반론을 취하는 연유는 고려시대 당시 각 사회상의 계급을

인용한 인물들의 탈을 쓰고 경연한 산대극이라면 모를까,

애니미즘에 의한 짐승탈을 쓰고 부자연스럽게 장대에 올라가 해금을 켠다는게 보통 가능한 일인가.

상고시대의 토속 신앙적 주술행위가 아닌이상 이러한 해석은 과학적으로나

시대 배경적으로나 와닿지 않는 해석이라 할수있다.

 

또 한가지 사슴은 고관대작을 의미해서 탐관오리가 출세하여 그 명성으로

항간에 이름이 자자한 이야기를 나그네가 길을 가다 어느집의  부엌 앞에서 이 말을 듣고

사슴이 벼슬에 올랐다고 노래를 했을것이 아닌가 하고 의인법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그와 같은 형태의 해석은 어떤자가  세상에 대한 불만을 품고  

내뱉은 조소가 섞인 성격의 노래 가사로 해석하는 또 한가지의 예인데

그것도 역시 그 해석이 온당치 못하다고 할수 있다.

그것은 고려시대의 토지 제도상 평민이 농사를 짓거나 장사로서 벌어먹기 상당히 팍팍했던바

 민초가 신분 단계의 벽을 뛰어 넘어 출세를 할수있는 신분 상승의 예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꿈도 꿀수 없었다.

즉 왕이나 왕비의 총애를 받았던 요승 신돈 같은자 이거나  무신정권때

의종을 살해한 공로를 무신들 사이에서 인정받은 천민출신 이의민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힘들었기 때문에 이것 또한 해당이 안된다고 볼수있다.

즉 천민이나 평민이 무슨 연유로 갑자기 출세한 탐관오리가 얼마나 많았길래

그러한 표현을 쓰겠는가 하는 의문점이 남는 것이다.

 

그러한 의문에 한국의 작가 김광수(필명 : 슈트름게슈쯔)에 의해 한가지 가설이 제기되었다.

청산별곡에서 말하는 에정지는 경상도 방언으로 부엌을 뜻하는 말로 해석 될수 있지만

사스미 짐대에 옴아셔란 말은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이제까지 뜻하는 바가 똑바로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우제류에 속하는 소목의 사슴이 무슨 자그마한 짐작대기에 올라가서 무었을 한다는 말인가?

이런 의문은 셜록 홈즈나 엘러리 퀸과 엘큘 포와로같은 명탐정의 뇌세포와 같은

추리력을 구사한다 해도 그당시 고려인의 문화로만 보아서는 도저히 답을 얻을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즉 고려인의 눈에 비친 상대적인 사물에 대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과거 한반도에서 뱃길을 통한 고려시대의 문물 교류는 활발했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같이 통일신라시대 장보고의 청해진 해상무역 주도권에 의하여

해적떼의 습격을 피해 고려시대까지 인도와 서남아시아의 아랍 상인들은 뱃길로 곧잘 고려에 드나 들었다.

그들중 소수의 상인들은 고려인 여자와 혼인하여 고려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도 했었다.

이러한 예는 이미 고려시대 이전에 가야국 김수로왕의 부인

 허왕후를 데려온 나라가 아유타국 이란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또 그러한 예는 신라 괘릉이라는 능의 무덤 수호신상의 얼굴 조각 형태를 보면

이미 삼국시대부터 인도와 아라비아인들이 한반도에 드나들어

신라인 여자와 혼인하여 살았던 역사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성강 어귀의 벽란도를 통해 활발 했던 국제 무역은 고려의 특산품들을 해외에 수출하고

 아라비아의 유리그릇 ,장신구,인도의 향신료,후추와 회회청,동남아의 물소뿔등

 여러가지 물건들을 상호교역을 통하여 국제 무역항으로서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그로 인하여 코리아의 꼬레란 국명의 기원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고려인들은 머리에 터어반을 감고 피부빛과 눈동자의 색깔이 고려인과 다른 이들 외국인들을 색목인이라 불렀다.

이들은 이슬람교를 믿었고 양과 염소고기를 주로 먹었는데 그것은 풍토성의 환경적 요인에 기인되었던 때문이었다.

건조기후의 특성상 방목 생존력이 뛰어난 가축은 양과 염소였던 것이다.

염소나 산양은 가파른 바위 비탈의 절벽을 곧잘 오르 내린다.

그만큼 발굽이 쐐기처럼 뾰족하여 다른 동물들이 접근할수 없는 험난한 지형에 서식할수 있는 것이다.

 

고려에 무역하러온 인도와 아라비아인들은 장사 수단의 하나로 좁은 공간에서

고려인들에게 보여줄수 있는 염소의 단계별 작대기 쇼를 보여줌으로써

난전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장만큼 사람이 붐비는 곳도 많지않다.

그러함에 염소가 짐대에 올라가 서있는 동안 인도에서 만들어진 해금과 유사한

 외줄 현악기를 켜는 색목인의 연주를 보고 들으며  지은 것이라 유추 해볼수 있는 것이다.

인도에는 해금과 꼭같은 외줄 현악기가 있다.

또한 한편으로 재래종의 까만 흑염소와는 달리 인도와 아랍의 염소는

고려인의 눈에 처음 비칠때 고려의 염소와는 달리

사슴처럼 뿔이 길었기 때문에 사슴처럼 보였던 것이라 사료된다.

이와같은 사실을 대표적으로 추리해 볼수 있는 것은 위의 사진에 보이는

인도와 파키스탄에서의 염소 층계 막대기 올리기 서커스 공연 

사진 두장을 눈 여겨 보면 이해가 될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인도대륙의 오지와 시골등의 곳곳을 가보면

고대와 근대가 교차된 문명의 나라임을 바로 육안으로 볼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