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萬物相]

중국 4대 미인 초선

슈트름게슈쯔 2011. 2. 16. 11:00

물고기는 물속으로 가라앉고(沈魚),    기러기는 땅밑으로 떨어지며(落雁)

 달은 구름뒤로 얼굴을 가리고(閉月) ,  꽃은 스스로 부끄러워 하노라(羞花)

 

 

초선(貂嬋)은 서시왕소군, 양귀비와 더불어 중국 "4대미인" 중의 한 사람이며, 이 4대미인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인 인물로 꼽힌다. 왜냐하면 그녀는 바로 영웅호걸의 혼을 흐트려놓았기 때문이다.

또 그녀들 중에서도 가장 미스테리에 싸인 인물로 지금도 그녀의 참 모습을 확실히 파악하기 어렵다. 그녀가 전설상의 인물인지 실존의 인물인지 학계에서조차 논란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중국 성도시(成都市)에서 초선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2000년 6월) 그녀의 실존 여부가 다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초선에 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주로 다음의 네 가지 설이 있다.

 

 1. 왕윤(王允)의 가기(歌妓)라는 설

왕윤(王允)은 동한(東漢) 태원기현(太原祁縣: 지금의 산서성) 출신으로 자는 자사(子師)이다. 처음에는 군(郡)의 향리였으나 영제(靈帝) 때 예주자사(豫州刺史)에 임명되었다. 헌제(獻帝)가 즉위하자 다시 사도(司徒)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동탁은 소제(少帝)를 폐위시키고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정권을 전횡하고 있었지만, 대신들은 동탁의 권세가 두려워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었다.

이때 왕윤은 동탁(董卓)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미인계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 동안 적합한 대상을 찾지 못하여 늘 고심에 차 있었다. 가기(歌妓) 초선은 그러한 왕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하여 항상 정성을 다해 가무(歌舞)를 연출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후 왕윤은 그녀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초선은 그러한 사정을 안 후 성심을 다해 왕윤을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녀는 왕윤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여포(呂布)와 동탁(董卓)의 갈등을 조성했다. 마침내 그녀는 여포의 손을 빌어 동탁을 죽이고 왕윤을 위해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 일이 성사된 후 초선이 화원에서 왕윤을 위해 달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마침 채색 구름이 달을 가리는 상황이 일어났다.

이 광경을 본 왕윤은 "초선의 미모가 달을 구름 뒤로 숨게 했구나."라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후세 사람들은 초선을 "폐월(閉月: 미모가 너무나 아름다워 달을 구름에 숨게 하다는 의미임)"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2. 동탁(董卓)의 시녀라는 설

동탁(董卓)은 동한 농서(陇西) 임조(臨洮: 지금의 감숙성 민현<岷縣>) 출신으로 자는 중영(仲潁)이다. 본래 양주(凉州)의 호족으로 영제(靈帝) 때 병주(幷州) 목사에 임명되었다. 동탁은 소녕(昭寧) 원년(189년)에 군대를 이끌고 낙양(洛陽)에 진입하여 소제(少帝)를 폐위시키고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정권을 전횡하였다.

이에 조조(曹操)와 원소(袁紹) 등이 군대를 일으켜 반대하자, 그는 헌제를 협박하여 장안(長安)으로 천도한 후 스스로 태사(太師)가 되었다. 그 후 동탁은 여포에게 피살되었다.

≪후한서(後漢書)≫ 「여포전(呂布傳)」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동탁은 여포를 기도위(騎都尉)로 삼고 부자지간이 될 것을 맹세한 후 그를 매우 아끼고 신임하였다. 그러나 항상 조금만 뜻을 이루지 못해도 동탁은 창을 뽑아 던졌으며, 여포는 권법으로 재빨리 그것을 피했다.

이로 인하여 여포는 동탁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동탁은 또 여포에게 중각(中閣)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가 몰래 그의 시녀와 정을 통하자 동탁은 더욱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초선이 여포와 정을 통한 동탁의 시녀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여포(呂布)의 아내라는 설

여포(呂布)는 동한 말 오원구원(五原九原: 지금의 내몽고 포두<包頭> 서남) 출신으로 자는 봉선(奉先)이다. 처음에는 병주자사(幷州刺史) 정원(丁原)을 따랐다가 정원을 죽이고 동탁의 부하가 되었다. 그러다 다시 왕윤과 모의하여 동탁을 죽인 후 분위장군(奮威將軍)에 임명되어 온후(溫侯)에 책봉되었다. 마지막에는 결국 조조에게 붙잡혀 죽었다. ≪삼국지(三國志)≫ 「여포전(呂布傳)」에 인용된 ≪영웅기(英雄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여포는 유비를 보고 그를 매우 존경하였다. 그래서 유비를 장막으로 초빙하여 아내의 침상위에 앉게 하고는 아내에게 명하여 절을 올리고 술과 음식을 내오게 하였다."

 

이 기록에 의하면 여포의 아내는 항상 군대를 따라다니는 병영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건안(建安: 한<漢> 헌제<獻帝>의 연호) 원년 6월, 한밤중에 하내(河內)의 학맹(郝萌)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반군들은 여포가 다스리던 하비부(下邳府)로 진입하여 청사 밖에까지 와서 일제히 함성을 질렀으나, 여포는 반군의 장수가 누군지 몰랐다. 여포는 직접 아내를 데리고 모자도 안쓰고 옷도 입지 못한 채 담을 넘어 도독(都督) 고순(高順)의 진영으로 갔다."

"여포는 진궁(陳宮)과 고순(高順)에게 성을 지킬 것을 명령하고, 자신은 기병을 이끌고 조조의 보급로를 차단하려고 했다. 이에 그의 아내가 말하기를, '진궁과 고순은 본래부터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장군께서 출정하신다면 그들이 합심하여 성을 지키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차질이 생긴다면 장군께서는 어디에서 자립하시겠습니까? 소첩은 옛날 장안(長安)에서 장군의 버림을 받았을 때도 마침 방서(龐舒)가 몰래 소첩의 몸을 숨겨주었으니, 지금 소첩을 돌아볼 필요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여포는 아내의 말을 듣고 고민하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여기에 기술된 여포의 아내가 바로 초선이다.

 

 4. 여포의 부장(部將) 진의록(秦宜祿)의 아내라는 설

<華三川 作 - 초선>

≪삼국지(三國志)≫ 「관운장전(關雲長傳)」에 인용된 ≪촉기(蜀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조와 유비가 하비(下邳)에서 여포를 포위하였을 때 관우가 조조에게 말하였다. '여포가 진의록(秦宜祿)을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니 그의 아내를 첩으로 맞이하길 청합니다.' 조조가 그것을 허락하였다. 싸움이 끝난 후에도 다시 여러번 조조에게 그것을 말하자, 조조는 그녀의 미모가 뛰어난 것을 의심하여 다른 사람을 보내어 보게 한 다음 그것을 만류했다. 이에 관우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여기에서 진의록의 아내가 매우 뛰어난 용모를 지닌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관우는 자신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생각이었으나 조조가 그것을 만류하자 질투가 났다. 관우는 성미가 급한 사람인지라 벌컥 화를 내며 단칼에 진의록의 아내를 죽여 버렸다. 원대(元代)의 잡극(雜劇) <관공월하참초선(關公月下斬貂嬋)>은 바로 이 일을 소재로 한 것이다. 따라서 진의록의 아내도 전설 속의 초선이었던 것이다.

4대미인은 모두 자신들의 뛰어난 미모로 한때는 총애를 받았지만, 그녀들은 모두 통치자들의 쟁탈 대상이 됨으로써 결국 정치투쟁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 했듯이 그녀들은 모두 제명을 다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초선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초선이 왕윤의 가기였다면, 그녀는 동탁을 제거하기 위한 미인계의 주인공으로 이용되었으니, 그러한 정권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녀는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목숨이었을 것이다.

동탁의 시녀였다면, 여포와 정을 통한 사실이 동탁에게 발각되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결과는 뻔한 것이다. 동탁이 여포에게 창을 던졌듯이 그녀에게도 당연히 칼을 날렸을 것이다.

여포의 아내였다면, 그녀는 위험한 병영생활 속에서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진의록의 아내였다면, 그녀는 조조와 관우의 불화를 일으킴으로써 관우의 단칼에 결국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