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야기

민심은 천심과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함수관계

슈트름게슈쯔 2011. 7. 23. 12:22

 

 

Niccolo Machiavelli (1469~1527)

 

 

 

근대적인 사고를 논하는데 있어 결코 마키아벨리를 빼놓을 수 없다.

그의 '군주론'은 덕과 윤리라는 고전적인 덕목으로부터

정치의 독립까지 포괄한 가히 혁명적인 저술이었기 때문이다.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로 케플러 갈릴레이 뉴턴으로 이어지는 과학 혁명이 있었고,

그와 더불어 데카르트의 철학적 혁신이 있었다면,

사회와 윤리를 보는 관점에서 근대 이전과 이후를

결정적으로 나누는 기점이 바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다.

 

 

근대 사회철학의 대표적인 사상을 사회계약론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사회계약론은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는 자연법의 원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과 비교하면 마키아벨리의 이론이 얼마나 정직하며 현실적인지를,

그래서 얼마나 '현대적'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를 읽을 때

우리는 어떤 사상가들의 책을 읽을 때보다도 더 분명하게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나는 상상적인 견해보다 사물의 구체적인 진실을 따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현실적 존재로서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방식과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이상(理想)사이에는 많은 괴리가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열중한 나머지 현실을 포기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멸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서 완벽한 선(善)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착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파멸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 지위를 보전하고자 하는 군주는 좋지 않은 짓을 행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언제 그것이 필요하고 언제 그것이 필요치 않은가를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악덕이 없이 그의 권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는

그런 악덕의 오명(汚名)을 뒤집어쓰는 것을 결코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모름지기 군주는 두려움과 사랑을 동시에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두 가지를 함께 누리기는 어려우므로,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사랑을 받기보다 두려움을 받는 편이 안전하다.

사람들이란 일반적으로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이고

위험을 피하기에 급급하며 이익을 탐낸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군주가 은혜를 베푸는 동안은 전적으로 군주의 편이어서

자신의 피 재산 목숨과 자식까지도 바치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실제로는 그럴 필요성이 별로 없을 때 하는 말이다.

막상 그래야만 할 때가 닥치면 그들은 배반한다.

그래서 그들의 말만 믿고 다른 준비를 해놓지 않은 군주는 몰락하게 된다.

 

 

위대하고 고상한 정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돈을 주고 얻은 우정은 매수한 것일 뿐

 진정으로 확보한 것이 아니며,따라서 위기에 몰리면 군주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또 인간은 두려움을 주는 사람보다 사랑을 주는 사람을 해칠 때 덜 망설인다.

사랑은 의무의 사슬로 묶여 있는 것인데,인간은 이기적이어서

자기 목적에 도움이 될 때는 언제든지 그 사슬을 끊어버린다.

그러나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심으로 유지되는데 그것은 실패하는 법이 없다.

 

 

 

마키아벨리(1469~1527)는 르네상스 시대의 인물이다.

동시대인으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미켈란젤로(1475~1564),

라파엘로(1483~1520) 등이 있다.

 이들이 살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는

마치 비스마르크 이전의 독일과도 같이 여러 개의 공국으로 나뉘어

 각각의 제후들이 지배하던 '분열 상태'였다.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1469년은 프랑스 샤를 8세가 이탈리아 정복을 감행한 해였다.

이탈리아는 그 뒤로도 지속적인 외침과 내분으로 혼란상태에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일찍이 공직에 나갔으나 그리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난 뒤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게 된다.

그런 점에서 공자와도 비슷하지만,제자들을 길러냄으로써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고 했던

공자와는 달리 마키아벨리는 군주(제후)를 위한 조언을 하기 위해 역사연구와 전술연구 등에 몰두한다.

 

 

 

마키아벨리의 재능은 매우 뛰어났다.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풍자적 코미디인 '만드라고라'를 비롯해 여러 편의 희곡을 완성하기도 했다.

군주론은 그가 썼던 여러 편의 저술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하며 중요한 저술임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 자신은 이 책을 생전에 공표하지 않았다.

 

 

당시 교회측의 반발을 우려해서라고 추측되지만 어쨌거나 죽은 다음에

발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한동안 금서로 취급됐다.

 당시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지나치게 '솔직'했던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라]

 

 

'군주론'은 도발적인 책이 아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처세술을 가리켜

마키아벨리즘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충성심과 혼란으로 인해

고통받던 민중의 삶에 대한 깊은 공감을 무시하는 처사다.

마키아벨리는 감정을 앞세워 남을 선동한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학문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로 정치를 분석했을 뿐이다.

 

 

군주론은 군주국의 역사와 종류를 분석한 뒤 실제 사례들을

조목조목 들어가면서 군주의 덕목에 대한 실용적 처세술을 논했다.

"군주가 구축하는 요새와 그 비슷한 것들은 과연 유익한가"라는 제목은

아주 실용적인 이야기로 보이지만 "운명은 인간사에서 어느 정도 힘을 가졌으며,

또 운명의 힘에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라는 제목을 접하면

이것이 단순한 책은 아니라 현재에도 꾸준히 읽혀지고 있는 인간경영학의 고전이자

전 세계 유수한 회사의 경영자나 각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이 우선적으로 탐독해야하는 필독서 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군주들은 왜 영지를 잃었는가"나

"이탈리아 해방을 위한 권유"라는 제목의 장은 당대 이탈리아의 현실과

그것을 변화시키려 했던 마키아벨리의 포부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 글은 전체 26장으로 이뤄진 군주론에서

제17장(잔인함과 인자함에 대하여,

그리고 사랑받는 것과 두려움을 주는 것중 어느 편이 나은가)에서 발췌했다.

전체 글의 중간 부분에 있는 '군주의 덕목'을 말하는 부분이다.

 

 

 

 

[마키아벨리의 근대성]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를 논했을 때

그것은 바람직함,덕,완전함 등의 덕목과 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동양철학의 고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학이란 윤리학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전혀 그러한 구속감을 느끼지 않는다.

"상상적인 견해보다 구체적인 진실을 따르는 것이 낫다.

우리가 실제로 살고 있는 방식과 이상 사이에는 많은 괴리가 있다."

 

 

 

근대 철학을 가리켜 '신이 사라진 시대에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한 철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신을 전혀 거론하지 않을 때 인간의 지식은

어떻게 완성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 근대 인식론의 출발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키아벨리의 철학은 근대적이다.

정의의 명령자이자 그 자신이 정의인 신을 전혀 거론하지 않을 때 정치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마키아벨리는 감히 그것을 묻고 생각했으며 글로 남겼다.

 

 

 

그래서 군주는 "어떤 규범을 따라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가장 나은 결과를 나을 수 있는가"를 묻는다.

마키아벨리는 윤리라는 것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인간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관점은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을 썼을 때

묘사한 현실적 인간(르네상스의 현실주의)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계몽사상과 차이가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마키아벨리즘]

 

 

마키아벨리는 두려움을 심어주되 민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법가와 잔혹한 독재정치가 동의어가 아니듯,

마키아벨리의 현실적인 정치론과 권모술수의 정치술은 같은 것이 아니다.

비난을 받아야 하는 대상은 마키아벨리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 '마키아벨리즘'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 책을 현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마키아벨리적'인 우리들 자신이다.

 

 

 

<군주론>을 읽으며 독재자가 왜 실패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들은 마키아벨리의 말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에 실패한 것일까,

아니면 마키아벨리의 충고를 제대로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일까?

 

 

 

 

인간, 특히 군주가 찬양받거나 비난받는 몇 가지 이유

 

 

 

 이제는 군주가 신하들이나 자기편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떤 수단이나 태도를 취하여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이 점에 관해서는 많은 논자들이 이미 여러 가지로 저술한 바 있고,

여기서 내가 새삼스럽게 이 문제를 다룬다면 나의 주제의 취급방법이

 다른 사람들과 상이하니만큼 나를 건방지다고 판단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의도하는 바는 독자에게 유익한 것을 쓰려고 하는 데에 있다.

쓸데없는 사변을 논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추구하는 것이 훨씬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지도 알지도 못하였던 공화체제나 군주체제를 고안하여 냈다.

그러나 상상이란 무엇에 소용된다는 말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명제로 해서 인간이 실제로 살고 있는 실태를 놓친다면

이는 자기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파멸에 빠뜨리게 하는 것이다.

또 무슨 일에서나 그리고 어디에서나 스스로를 선한 인간으로만 내세우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많은 악인들의 무리 속에서 파멸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군주는 선하기만 해서도 안 되며

필요에 따라서는 선인도 악인도 될 줄 알아야 한다.

 

 

결국 군주의 본분은 가공적으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특히 군주는 이 높은 신분 때문에 자기가 지닌 특성중

한 면이 두드러지게 찬양받거나 혹은 비난받게 된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은 관대하다고. 또 다른 사람은 인색하다고 평받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네 언어로 탐욕이란 뜻은 소유욕이 과해서 도둑질까지도 할 수 있는 인간을 말한다.

그런데 토스카나 방언으로는 인색하다는 말이 자기 것을 가능한 한 내놓지 않으려는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토스카나 방언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사람은 친절하게 저 사람은 욕심이 많다든가,

저 사람은 잔인한데 이 사람은 자애심이 많다든가, 저 친구는 말뿐인데 반하여

이 친구는 신의가 두텁다든가, 저 사람은 유약하고 겁이 많은데 반하여

이 친구는 단호하고 용기가 있다든가, 저 사람은 호인인데

이 사람은 오만하다든가. 저 쪽은 방탕한데 비하여

이 쪽은 절조가 있다든가,저 자는 솔직한데

이 자는 교활하다든가, 저 사람은 신심이 없다든가의 평판도 있을 수 있다.

 

 

 물론 여기에 열거한 여러 기질 중에서 좋은 점만을 한 몸에 갖춘다면

이에 더한 일이 없으면 이런 경우 주군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찬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일뿐더러 인간 조건이 그렇게는 허용치 않는다.

따라서 무릇 군주라는 최소한 자는 자기의 나라를 잃게 할 수치스러운 악덕만은 피하여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너무 신경을 쓰지 말고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두어도 상관은 없다.

아니 오히려 어떤 때는 몇 가지 결함을 짊어져야만 나라를 위기에서 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을 잘 살펴볼 때 일견 미덕으로 보이는 몇 가지 자질도 군주를 파멸로 이끌 수 있으며,

또 첫눈에는 악덕으로 보이더라도 결과적으로는

군주의 안전과 번영을 얻게 하는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상주의적인 입장에서 군주의 자세를 논한 종래의 사상가들,

 말하자면 고대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크세노폰, 중세의 성 토머스, 단테, 

 마르실리오다 파도바, 거기에다 초기 인문주의 자들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도 현실을 중시하고 그런 관점에서

독창적인 의견을 설립한 미키아벨리의 면모를 볼 수 있다.

 

 

 

관대함과 인색함에 대하여

 

 

 전술한 기질들 중에서 첫 번째 것들은 우선 논한다면 관대하다고

평받는 것은 확실히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관대한 행위를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으로 한다면 도리어 해를 입을 수 있다.

말하자면 고결한 행동이 통칙인 입장에서는 고결하게 행동한다해도

남의 눈에 띄지는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른 오명까지 뒤집어쓸 염려가 있다.

그 이유는 대중으로부터 관대하다는 평판을 많이 들으려면 어쩔 수 없이 사치에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주는 그런 이에 자기의 전재산을 탕진하게 된다.

더구나 더욱 도량이 넓다는 평판을 잃지 않으려고 하면,

필요이상으로 민중을 억압하게 되고 무거운 과세로써 어떻게든지 돈을 긁어내려고 애쓰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지고

또 자기자신도 차차 빈궁해져 누구에게서도 존경을 받지 못한다.

따라서 절약을 모르는 군주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결과적으로 다수의 사람들에게 해를 주는 꼴이 된다.

그리고 이쯤되면 매사에 있어서 처음부터

장애물에 걸려 우기에 빠져도 헤어나올 수가 없다.

군주가 설혹 이를 알아 차렸다 하더라도 때는

이미 늦어 몸을 빼려고 할수록 인색하다는 악평을 듣게 된다.

 

 

요컨대 군주가 관대하다는 세평을 한 몸에 지니려고 한다면,

오히려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수가 있다.

따라서 현명한 군주라면 인색하다는 악평쯤에는 신경을 쓰지 말아야만 하겠다.

그러면 오히려 군주의 절약심으로 해서 주입이 풍요하여 지고,

외적으로부터도 몸을 지킬수 있으며, 또한 민중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대사업(전쟁)을 추진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알려지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욱더 이 군주는 관대하다는 평을 받게 된다.

그러게 되면 그는 수많은 사람에게 대하여 물건을 주지 안고서도

관대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되고, 소수의 사람에게만 특혜를 베품이 없기 때문에

이 소수로부터만 인색하다는 평을 받게 된다.

우리가 보는 바로는 현대에 있어서의 대사업은

보다 인색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인심 좋은 사람들은 다 멸망하였다.

예컨대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교황의 지위에 오르기까지는 관대하다는 평판을 이용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전쟁을 치르기 위하여 이 평판의 허락따위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또 현재의 프랑스 국왕은 국민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담시키지 않으면서도 수차에 걸친 전쟁을 감행하였다.

이것도 한결같이 장기에 걸친 절약이 막대한 지출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역시 현재의 에스파니아 국왕도 만약 자유 분방하다는 평을 받았더라면,

도저히 그럼 큰 사업에 몸을 바쳐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군주는 자기 방어의 명목으로 백성에게 금품을 강요하지 않으려면,

 그리고 가난 때문에 경멸을 받지 않으려면,

또 탐욕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인색하다는 평판쯤 조금도 개의치 말아야 한다.

이 인색하다는 결점은 바로 군주에게 지배자의 지위를 보장하는 그런 반가운 결점이기 때문이다.

 케사르도 저 관대한 마음으로 해서 로마 제국을 다스렸고

또 많은 사람들이 관대하다는 평판으로 해서 지극히 높은 자리를 얻지 않았느냐?

 라고 만약 어느 누가 반박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겠다.

먼저 그 사람이 이미 군주이지, 쪼는 앞으로 군주가 될 사람인지를 생각해야만 한다.

첫 번째 경우라면 관대함이 해가 된다.

그러나 두 번째 경우에는 관대하다고 보여짐이 필요하다.

케사르는 로마의 최고위를 바라본 사람들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만약 그가 집권 후에도 오래 생존하여 그 낭비를 고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스스로가 제국을 뒤집어 엎고 말았음에 틀림없다.

 다음에 누가 또 반박하고, 많은 군주들이 지극히 관대하다는 세평을 받으면서도

군대를 사용하여 대사업을 이룩하지 않았느냐고 한다면, 나는 이같이 대답하겠다.

 즉, 군주가 돈을 씀에 있어서 자기의 돈이나 신하의 돈을 쓸 때와

  전혀 자기의 돈이 아닌 타인 돈을 쓸 때의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 번째 경우에서는 절약자가 되어야 하며,

두 번째 경우에서는 얼마든지 관대해도 좋다.

 

 

 사실은 한 군주가 군대를 이끌고 정복자가 되어, 전리품을 얻고 약탈을 행하고 징발을 마음껏 하며,

남의 재보를 얻을 수 있다면 이럴 때 관대함은 하나의 필요성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병사들이 뒤따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나 신하들이 것이 아닐진대 사이러스나 케사르나 알랙산더대왕이

행했던 것처럼 얼마든지 관대하게 분재해도 무방하다.

타인의 것을 낭비하면서도 그것은 당신의 평판을 떨어뜨리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한층 더 드높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당신 자신의 것을 낭비할 경우에는 결국 당신에게 해가 돌아온다.

하여간 관대함처럼 스스로를 탕진해 버리는 것도 없다.

관대함을 발휘하는 동안 언젠가는 그 자력을 잃고 만다.

그래서 빈궁에 빠져 남에게 업신여김을 받든가,

또는 빈궁에서 벗어나려고 욕심이 많이 생겨 남의 원망을 사는 것도

한결같이 군주가 엄격히 경계하여야 하는 것이다.

관대함이란 이 중 어느 한쪽으로 당신을 이끌어간다.

그렇게 되면 관대하다는 평판을 얻으려고 발버둥쳐도 필연적으로 탐욕자가 되고 미움과 오명을 사게 된다.

이럴 바에야 오명만을 얻고 미움을 사지 않는

인색자가 되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고 하겠다.(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중 참주의 설을 인용하고 있다.)

 

 

잔인함과 인자함에 대하여. 그리고 사랑받는 것과 두려움을 받는 것 중 어느 편이 나은가

 

 

앞서 기술한 여러 가지 기질들을 계속 다루어 나감에 있어서

모든 군주들이 잔인하다기보다는 인자하다고 평판을 받으려고 원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그러나 인자함도 역시 서투르게 사용하면 못쓴다.

 예컨대 체자레 보르지아는 잔인한 인간으로 통했었다.

그러나 그의 이 잔인함은 로마냐의 질서를 회복하고 이 지방을 통일하여 평화와 충성을 다하도록 하였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 피련체 시민들이 냉혹무도하다는

악평을 듣지 않으려고 피스토이아의 붕괴를 막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보르지아가 훨씬 더 자애로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 1501년에서 이듬해까지 일년간 피스토이아에서는 두 맥의 권력 다툼이 간단없이 있었다.

마키아벨리 자신도 피렌체의 조정자로서 이 쟁투를 지켜보았다.

이때 피렌체는 최초로 우맥의 지도자를 추앙하여 평화를 되찾으려고 하였었다.  ) 

 

 

따라서 군주는 자기의 백성을 결속하고 이들이 충성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잔인하다는 악평쯤 조금도 개의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너무도 자애심이 깊어 오히려 혼란상태를 초래하고 급기야는

살육이나 약탈을 횡행케 하는 그런 군주에 비하면,

약간의 엄격한 시범을 보이는 군주 쪽이 결과적으로 훨씬 더 인자스럽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는 군주가 내리는 엄격한 재판이 개인을 다치는 데에 그치지만,

 전자의 경우는 사회 전체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군주 중에서도 특히 신생 군주는 나라가 새롭기 때문에

위험도 많아 잔인하다는 평판을 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베르길리우스도 디도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곤란한 사태와 나라의 새로움이 나에게 이 같이 조치를 취하게 하였고,

국경을 구석구석 감시치 않을수 없게 하였노라."( 베르길리우스의 ‘Aeneis'  )

 그러나 군주는 경솔하게 남을 믿거나 경거망동하여서는 안된다.

또 스스로의 그림자를 두려워해서도 못쓴다.

그래서 상대방을 지나치게 믿어 분별을 잃는다든가,

반대로 너무 불신에 사로잡혀 편협에 빠지지 않도록

사려와 인간미를 갖추어 침착하게 일을 해나가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즉 사랑을 받는 것과 두려움을 받는 것 중 어느 쪽이 좋은가 하는 점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양쪽을 다 갖추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둘을 겸비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따라서 만약 그 중 어느 한쪽을 택하여야만 한다면,

사랑받는 것보다는 오히려 두려움을 받는 편이 더 안전하다.

( 사랑을 받기보다 두려움을 받는 편이 안전하다는 생각은 ‘전략’ 제3편 제121장에서도 기재되어있다.)

그것은 인간이란 원래 은혜도 모르고, 변덕이 심하며, 위선자요,

염치를 모르고, 몸을 아끼고, 물욕에 눈이 어두운 속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이 은혜를 베푸는 동안은 모두가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며,

피도, 재산도, 생명도, 아들마저도 당신에게 바친다.

그러나 이미 내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런 모든 헌신도 아직 위험이 먼 곳에 있을 때 뿐이다.

 그러다가 정작 위험이 닥치게 되면 그들은 금방 등을 돌린다.

 따라서 이들의 약속만 전적으로 믿고 있던 군주는 다른 준비를 소홀히 하기 때문에 결국 멸망하고 만다.

숭고하고 위대한 정신이 담보되지 않고, 그저 보수라는 미끼로 얻어진 우정은

그만큼의 가치밖에 지니지 못한다.

그래서 정작 우정이 필요한 때 가서는 힘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거기다 인간은 두려워 하는 자 보다도 애정을 느끼는 자를 더 쉽게 배반한다.

그 이유는 원래 인간이 사악하여 단순히 의리의 기반에 매인 정 같은 것은

 자기의 이해가 얽히는 기회 앞에서는 언제나 서슴없이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 앞에서는

처형의 공포로 꽉 얽매여 있기 때문에 결코 모르는 체 할 수가 없다. 

 

 

하여간 군주란 설사 사랑을 못받더라도 남으로부터

일정한 한도 내에서 두려움을 받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즉, 두려움을 받는 것과 원한을 사지 않는 것은 얼마든지 양립될 수 있다.

이것은 군주가 자기 백성의 재산이나 부녀들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면

( 제19장 참조. 여기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엿보인다. 또 ‘전략론’ 제 3편 제19장에서도 참조. )

반드시 성취될 수 있는 것들이다.

또 누군가를 기어코 죽여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명백한 이유가 따라야만 그 행위가 정당화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남의 재산을 억지로 빼앗는 일은 삼가야 된다.

인간이란 어버이의 죽음은 쉬 잊을수 있어도 자기 재산의 손실은 여간해서 잊기 어려워하는 법이다.

백성의 재산을 빼앗는 기회는 사실 번번이 있는 것이며, 그 구실과 방법은 항상 얻을 수 있다.

거기에 비하면 피를 흘리는데 있어서의 구실은 그리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못된다.

군주가 바야흐로 군대를 이끌고 많은 병사들을 지휘할 때에는 잔인하다는 악평같은 것을 꺼려할 필요가 없다.

즉, 이런 평판이 없이는 군대의 결속을 이룩하고 군사행동을 취한다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한니발(한니발(기원전202~183):카르타고의 용장. 기원전219년 알프스를 넘어

로마에까지 육박하였다가 배후를 찔리어 카르타고 돌아갔다.

기원전202년 스카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패배하였다.)

그 혁혁한 활약의 이면에는 이런 점들이 있었다.

그는 수 많은 인종으로 조직된 대단히 방대한 군대를 이끌고

이국 땅에서 전쟁을 일으켰지만, 전세가 유리할 때나 불리할 때나

한결같이 그의 군단에서는 병사끼리의 내분도 지휘관에 대한 모반도 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바로 한니발의 비인도적인 잔인성의 덕택이었다.

부하 병사들의 눈에는 몇 가지 다른 덕성과 아울러 극도의 잔인성을 갖춘

이 지휘관이 항상 숭고하고 두려운 인물로 비추어졌었다. 

 이런 기질없이 그의 덕성만 있었다면 그는 그처럼 성과를 올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점을 깨닫지 못한 저술가들은 한편으로는 그의 위업에 경탄하면서도,

 그 성공의 기본 동기였었던 그의 잔인성에 대해서만은 비난을 퍼붓는다. 

 

 

다른 덕성들만 갖고는 한니발이 성공치 못하였으리라는 것은,

스키피오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

스키피오는 오늘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모름지기 역사의 전 기간을 통하여 실로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부하병사들은 스페인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태는 군사훈련에는 결코 불필요하였던

온정주의를 병사들에게 지나치게 허용한 데에 기인한다.

그 때문에 그는 원로원에서 파비우스 막시무스로부터

로마 군대를 부패시키는 장본인이라고 탄핵을 받았다.  

 

 

또 로크리스의 주민들이 스키피오(스키피오(기원전1226년경~184년):로마의 장군. 

기원전209년 스페인에서 카르타고.노바를 함락,

이듬해는 한니발의 동생 하스도르발을 격파하여 로마의 스페인정복을 확립하였다.

그 후 아프리카로 전쟁터를 옮겨 기원전202년

한니발을 패배시켜 카르타고를 굴복시켰다.

이래서 제2차 보에니 전쟁이 끝난 것이다.)

 파견한 장관으로 해서 시달림을 받고 파란을 겪은 일이 있었다.

스키피오는 그후 이주민들의 원마을 보상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그 장관의 횡포를 규탄하려고도 않했다.

이것은 그의 관대한 기질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원로원에서 스키피오의 변호에서,

‘그는 남의 과실을 나무라기보다는 스스로가 과실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런 형의 사람'이라고 설명하였던 것이다.

스키피오가 만약 이런 기질을 가진 채 최고 권한을 계속 누렸었더라면

그의 영광과 명성은 흐려졌을 것이다.

다행히 그는 원로원의 명령에 스스로 복종함으로써

이 유해한 기질이 표면에 나타나지 안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영광의 좌석에 앉혀놓았던 것이다.  

 

이제 본론에 돌아와서 결론을 맺는다면,

백성이 군주사랑함은 신민(臣民)들의 뜻이다.

그리고 그들이 두려워 함은 군주의 뜻이다.

요컨대 현명한 군주는 자기의 방침에 따라야 하지,

 남의 생각에 의존하여서는 안된다.

다만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미움을 받는 일만은 결코 피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마키아벨리/ 군주론(君主論 )    Machiavelli I 1 Principe   에서

 

 

이해와 감상

 

 

 솔직 담백하고 하등의 수식도 없이 직설적인 문체로 이루어진 '군주론'은

 마키아벨리 자신이 팜플렛이라 부를 만큼 부피가 작은 저술이다.

그러나 이 저작만큼 그렇게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위정자들과 이 방면의 전공자들 사이에 널리 애독된 책은 그리 흔치 않으리라.

 자신의 글이 공표됨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후유증을 염려하였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닌게 아니라 이 책이 발간되자 빗발치는 듯한 비난이

먼저 그 시대의 정신적 지배 자격이었던 교회측에서 일어났다.

마키아벨리는 교회 그 자체의 권위와 교황의 종교적 주도권을 의심 또는 부정하지 않았지만,

교황측의 무능ㆍ탐욕ㆍ타락을 신랄하게 반박하였다.

 

 

더구나 루터의 종교혁명으로 인하여 가톨릭교회의 뿌리인 교황권 자체가 크게 위협을 받고,

 전 유럽 그리스도교 사회가 양분되면서 동시에 이를 쟁점으로

피비린내 나는 전란을 맞이하게 된 교회측으로선 마키아벨리의 글은 좌시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리하여 교황 옹호파인 예수회를 중심으로 '군주론'을 소각하는 등 배격운동을 벌이고,

1559년에 공포된 금서중에 '군주론' 뿐이니라 마키아벨리의 전저서를 포함시키면서 전면적 탄압을 가했다.

이 금서조치는, 그 당시 지식인에게 그것을 널리 선전 알리는 계기가 되어

그들의 호기심을 끌게 하는 반작용까지도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뒤  단순히 감정적인 탄압이 아니고, 학문적으로 '군주론'에 대해

노골적인 편견과 악의에 찬 비판이 시작된 것은,

그 당시의 프랑스법학자 이노 센트젠틸레이다.

그는 '피렌체인 마키아벨리의 논(論) 을 반박하는

왕령과 기타 영국의 평화유지와 통치 방법을 논함'이란 글을 발표하면서,

'군주론'에 담긴 전치사상을 반박하며,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의 오류를 열거하고,

 자기의 정치사상과 정책요강을 표시하였다.

그가 바로 이 글을 ‘군주론’의 본의를 곡해한 ‘마키아벨리즘’을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그리하여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자기의 권력과 세력을 얻기 위해서

어떤 수단 방법도 허용된다는 정치방법을 주장한 지적 괴물로 낙인 찍히게 되었다.

그후‘군주론’은 마키아벨리즘이란 괴물로 둔갑하여 각 시대 전제자들의 애완품으로 타락하고,

 오늘날까지 비정한 정치세계의 하나의 행동지침이 되었던 것이다.

 

 

먼저‘군주론’에 대한 모든 선입관념을 배제하고 그 저작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이 책이 씌어진 동기와 작자개인의 입장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1512년 프리토 정변으로 메디치가문이 피렌체에 다시 집권자로 등장하자, 마카아벨리는 반 메디치의 혐의로 공직에서 쫓겨나, 청빈하게 독서를 벗삼아 시골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 해가 다 저물어갈 즈음 그는 그의 절실한 친구 베토리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나는 그 사건 이후, 피렌체엔 20일도 채 못있었고 줄곧 여기 시골에 와 지내고 있습니다

...... 저녁해가 지면 나는 집으로 돌아와 하룻동안 흙과 때묻은 옷을 정장으로 갈아입고 내 서재로 들어가 사색에 잠기게 됩니다. 나는 단테를 비롯해서 먼저 간 철인들에게서 더 얻은 것을 상기하면서 여기에 '군주론' 이라는 조그마한 책자를 쓰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글에서, 나는 문제된 점들을 최대란 심사숙고하면서, 국가의 성격, 종류, 형성, 유지, 패망에 관해 논해 보았는데, 귀하가 읽으시면 결코 지루하시지 않을 줄 믿습니다. 더우기 이 책은 새 군주에게 환영받으리라 생각하여 지울리아노 메디치 전하에게 바치겠습니다."

여기에 마키아밸 리가 '군주론'을 쓰게 된 직접적인 환경과 동기를 명백히 찾아볼 수 있다.

그가 공직에게 쫓겨난 후에도 피렌체에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절실하였는데, 그것은 상기 서간 끝 부분에도 역력이 나타난다.

이 서간 끝에서 "나 같이 43년간을 결백, 충실하게 지낸 자가 이제 와서 표변할 수는 없는 일이며, 나의 결백과 충신은 내가 이렇게 가난하다는 것으로 충분히 증거가 될 것입니다." 라고 썼는 바, 여기에서 이는 마키아벨리의 공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솔직 결백함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국가에 봉사하려는 열망도 꿈으로 사라지고, 끝내 그는 꿈속에서 유토피아를 헤매는 빈곤한 선비로서 일생을 마치게 된다. 그러나 '군주론' 이 지니고 있는 솔직하고 가식 없는 정열은 여러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오늘날에 이르렀고, 그의 조국통일의 꿈은 한낱 유토피아가 아닌 실재로 19세기말에 이르러 그대로 실현되었다.

마키아벨리가 비분의 은둔생활에서 착상한 '군주론' 은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한 것인가, 그것은 바로 외침의 대상과 내분에 허덕이며 로마제국의 영광을 져버린 조국 이탈리아의 구국이다. 그러기에 이는 일반적인 국가정치론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탈리아 구국을 위해선 먼저 국내통일과 외세구축이 필요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하기 위해 강력한 국가가 절대 필요했고, 그 실행은 오로지 새로운 폭군적인 전체군주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 새로운 군주와 그가 영도하는 국가는 과연 어떤 정책으로 이탈리아를 구제할 것인가.

마키아벨리의 염두에 일관된 이념은 조국·영광·힘·(원어로는 virtu)인데, 단테의 '신곡' 에도 이 단어는 힘으로 이해된다)이며, 이 세 개념은 조국이란 한마디로 집약할 수도 있지만 힘과 영광 없는 조국은 상상할 수 없으므로, 이들은 정삼각형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삼위일체 관계에 있다. 여기서 조국이란 물론 로마의 후광으로써의 이탈리아 전 반도를 뜻하며, 교황이나 황제가 지배하는 한정된 독립과 자유가 아니고, 외세로부터 완전 독립하고 자치권이 충분히 행사되는 통일조국을 그는 꿈꾼 것이다. 조국은 그에겐 지상에 있어서 유일한 절대적 존재였다. 여기에 그가 증세기적 국가관을 완전히 탈피하여 국가지상주의의 현대적 국가관을 가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국가는 신의 섭리에서가 아니고 그 자체의 존엄성에서 존재하며, 그러기에 국가의 법은 절대적이며, 그러기에 국가의 법은 절대적이며, 개인은 국가내에서만 그 존재이유와 목적을 찾을 수 있다. 국가를 떠난 개인은 상상할 수도 없고, 도덕과 종교도 국가의 법과 일치함으로써만 그 생명이 발휘된다. 단 국가의 법과 일치함으로써만 그 생명이 발휘된다. 단 국가의 법과 명령은 국민 모두가 존경하여 받들어지는 것이므로, 그 근원을 '국민의 소리'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을 그는 잊지 않았다. 또한 국가는 신의 섭리나 운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며, 국민정신과 자연법이 그 원리이고, 군주는 다만 이 국가를 실현하는 현실적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가 군주라고 말한 것은 교황·황제 또는 어느 특정한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앞에서 말한 내용의 국가 관념을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 국가를 이끌어 나가는 영도자를 뜻한다. 그가 군주 한 개인과 국가의 운명을 직결시킴으로써, 개인의 역량을 최대시한 것은 당시 개인의 능력, 활동의 가치를 중요시한 르네상스 풍조를 따른 것이며, 동시에 국가라고 할만한 조직사회를 갖지 못한 이탈리아의 당시 사정으로 불가피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 마키아벨리가 뜻하는 군주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존재인가. 그에 의하면 군주는 먼저 냉철한 심사숙고형이어야만 되고, 조국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어떠한 다른 것도 뒤돌아보지 않으며, 목적을 향해 지와 용으로 무자비하게 돌진해야 된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종교도 도덕도 문제시 않는 정. 부정을 초월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선정을 위해 국민의 마음을 항시 파악하고, 이를 이용, 또는 만족시킬 수 있는 총명함을 지녀야 하며 그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 바로 이 정신력과 군병이 절대 필요한 수단인 것이다. 군병 없이 외침을 막을 수는 없으며, 그러기에 마키아벨리는 군주교육 중에, 사냥을 제일 먼저 권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군주의 행동요강이 바로 이 '군주론'이다.

 

 

참고 자료

마키아벨리

 

 

르네상스기(期)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정치이론가.

 피렌체의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498년부터 피렌체의 제2서기관장직(書記官長職)으로 내정과 군사를 담당하였으며, 대사로도 활약하였다. 1512년 메디치가(家)가 피렌체로 복귀하게 되자, 한때 음모의 죄명으로 체포된 후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실의 속에서 독서와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주요저서로 《군주론 Il principe》(1532) 《로마사론 Discorsi sopra la prima deca di Tito Livio》(1531) 《전술론(戰術論) Libro dell’arte della guerra》(1521) 《피렌체사 Istorie Florentine》(1532)가 있으며, 또한 이탈리아 연극사상 획기적인 작품이라는 《만드라골라 Mandragola》(1524) 등이 있다. 특히 《군주론》은 그의 대표작으로 마키아벨리즘이란 용어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 책은 군주의 자세를 논하는 형태로서 정치는 도덕으로부터 구별된 고유의 영역임을 주장하였고, 더 나아가 프랑스 및 에스파냐 등 강대국과 대항하여 강력한 군주 밑에서 이탈리아가 통일되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이 저서는 근대 정치사상의 기원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마키아벨리(1469~1527) 는 이탈리아의 피렌처에서 태어났다. 1498년 그가 29세 때 공직에 나서기까지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의 생장과 경력은 알 수 없다. 이때는 그는 외교업무와 국민군을 관장하는 ' 자유평화10인 위원회' ( 피렌체 최고 통치기관인 시뇨리아 4부처의 하나) 에서 일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정계에 참여하게 된다.  

 피사와의 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피렌치 내부에서 사회불안이 고조되고, 특히 재정면에서 큰 곤란을 겪게 되 자 1503년 당시의 권력자인 소데리니에게 ' 국가 재정에 관한 진언'을 권하고, 구국의 유일한 방법으로 국민국 방을 주장, 그의 우국충정에 감동한 소데리니가 국민 국 조직을 착수하면서 마키아벨리를 군부 비서로 임명함에 따라 시군정 확립에 크게 헌신하게 된다.

 그러나 1511년 피렌치에 또다시 혁명이 일어나 소데리니 가 실각하고 시는 다시 메디치가의 전제시대로 돌아 가면서, 마키아벨리는 구정권에 봉직했다는 이유로 억류 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다시 공직에 복귀했으나, 반 메디치혐의로 다시 투옥되었으나, 다행히 투옥기간은 단시일이었으며, 석방된 후에는 사회생활을 멀리 하고 산카시아노의 시골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외계와 단절한 채 저작 활동에 몰두하였다. 그의 대표작 '군주론' 과 '리비우스론 '은 바로 이 시기의 산물이다 . 그가 실의의 나날을 보내는 동안 유일한 벗이며 사상적 동지이기도 했던, 로마 주제 피렌재 사절 배토리아의 편지교신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박학 다재한 이 두 사람의 서간은 그 시대의 역사와 마키아벨리 사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전해지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이나, 파란만장한 그의 정치적 여정은

물론 정치사상사적 맥락에서 평가되는 마키아벨리의 의의 등은 사실 ‘스마트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별다른 수고 없이도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정보들이다.

또 『군주론』은 이미 ‘알려진 고전’이니까 무작정 중요하다고 교수의 권위를 내세워 강권하고 싶지도 않다.

 이런 권유처럼 고전 읽기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것이 또 있을까?

 대신 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고전’으로 남아 있는가를 설명하고,

이 설명을 토대로 우리는 다른 고전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독자들과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거나, 잔인하고 사악하고 간교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득을 구하는 태도를 우리는 흔히 ‘마키아벨리적(的)’이라고 일컫는다. 마키아벨리는 전통적으로 존중되어 온  기독교적인 덕(德)뿐 아니라, 신의(信義)나 인자함, 관대함과 같이 오늘날까지 인정받고 있는 모든 종류의 미덕에 반대하는 세계관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마키아벨리에 대한 낙인은 물론 『군주론』에 기인한다. 그러나 『군주론』을 한번이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본 사람이라면,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주장하는 바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마키아벨리의 이미지와 거리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이미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소위 ‘마키아벨리적’ 세계관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의도한 바가 아닐 수 있다. 편의상, 우리가 만들어 낸 마키아벨리적 이미지를 ‘마키아벨리즘’이라고 하자.

  『군주론』은 얼마나 마키아벨리즘에 기초해 있을까? 역설적으로,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즘’을 대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군주론』이 정의, 절제, 용기, 지혜와 같은 그리스적 덕성이나, 기독교적 덕성을 지지한다는 것이 아니다. 『군주론』에는 분명 군주국의 성공을 위해서 백성에게 관대함보다는 폭력이나 잔인함을 보여야 하고, 백성으로부터 사랑받기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사악함, 기만, 잔인함, 폭력 등이 통치의 수단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은 늘 변덕스럽고, 시기와 질투에 의해 쉽게 변심한다고 주장한다. 『군주론』에 ‘마키아벨리즘’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마키아벨리즘은 『군주론』을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 세상을 살다 보면 할 수 있는 얘기다. 또, 이런 ‘마키아벨리즘’을 가장 일찍 대변한 사람을 가려내자면,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마키아벨리즘’을 확인하기 위해서 『군주론』을 읽는다면 무의미한 것이고, 또 ‘마키아벨리즘’을 담고 있기 때문에 『군주론』이 고전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면 오산이다. 

  그럼 『군주론』에 마키아벨리즘과 구별되는 마키아벨리의 의도는 무엇인가? 지난 학기에 바로 이 주제로 석사학위 논문을 쓴 제자가 있다. 나름대로 훌륭하게 의도를 밝혔다. 내가 지도한 학생이지만, 일부의 해석은 동의하지만, 일부는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은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군주론』의 마키아벨리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내 놓았다.

  마키아벨리즘과는 구별되는 많은 학자들의 해석 중에서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를 이 지면에서 논할 수는 없지만, 『군주론』 읽기에 여러 가능성이 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우선, 『군주론』에 마키아벨리의 음모가 숨어 있다는 해석이 있다. 이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사실 군주국을 무너뜨리고 공화국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는 공화주의자라는 것이다. 『군주론』은 군주국이 어떻게 유지될 것인가를 알려 주는 군주에게 주는 지침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군주론』의 전술을 그대로 따를 경우 군주국은 외세의 침입에 취약해 지고,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으로 군주를 속여 프랑스 군대에 의해 메디치 가의 군주국이 망해 공화국이 된 것처럼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마키아벨리가 기본적으로 공화주의자라는 입장에 동의하지만, 『군주론』은 군주의 전술의 실패를 꾀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혁명을 유도하여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군주론』이 군주에게 읽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시 혹은 후세의 일반 백성들에게 읽히기 위해 저술되었다는 가정에 서 있다. 이에 따르면, 마키아벨리는 소위 ‘마키아벨리즘’으로 일컬어지는 여러 요소들을 『군주론』에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군주의 사악함과 잔인함을 경계하게 하고, 나아가 혁명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어떤 해석은 군주의 ‘마키아벨리즘’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군주론』이 저술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미 군주가 된 자라면, 혹은 자신이 힘으로 군주의 자리를 쟁취한 사람이라면 사실 어느 누구의 조언 없이도 이미 ‘마키아벨리즘’은 터득한 사람일 터이다. 따라서 『군주론』은 오히려 지나친 ‘마키아벨리즘’이 군주국의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언급을 함으로써 군주의 잔혹함을 완화시키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구절은 『군주론』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혹자는 『군주론』에서 이탈리아 애국주의자 마키아벨리를 발견한다. 다수의 도시 국가들로 이뤄져 있고, 이 때문에 외세의 침입에 비교적 취약한 조국 이탈리아를 걱정한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이는 군주가 나타나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군주론』을 가장 ‘마키아벨리즘’에 가깝게 해석하고 있지만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조건이 달려 있다.     

  이 밖에도 『군주론』에 관한 매우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그러나 석사 논문을 쓴 내 제자의 해석을 포함해서 『군주론』 연구자들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아무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즘’을 발견한 것으로 끝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마키아벨리를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마키아벨리 연구의 전문가가 아니다. 따라서 어느 해석이 옳은지 확답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해석이 옳은가를 같이 따져 볼 수는 있다. 그런데 같이 따져 볼 수 있는 그룹에 들어오는 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군주론』을 처음 페이지부터 끝까지 찬찬이 읽어 본 사람이어야 한다. 앞에서 『군주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소개했지만, 구체적으로 『군주론』의 어떤 구절들이 각각의 해석을 지지하는지는 의도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군주론』을 심각하게 읽지 않은 학생들에게 나의 판단은 또 다른 ‘마키아벨리즘’을 만들어 낼지 모르기 때문이다. 고전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고전으로서 가치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 해석은 이미 만들어진 이미지의 확인이 아니라, 면밀하고 꼼꼼한 읽기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태도가 『군주론』를 고전으로 대하는 것이고, 『군주론』이 우리에게 고전이 되는 길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쓸 때, “하루 종일 입었던 흙먼지가 묻은 옷을 벗고, 궁정에서 입는 옷으로 갈아입고 서재에 들어갔으며” 거기서 그는 “옛 선조들을 만났다”고 한다. 마키아벨리도 고전을 읽은 것이다.

  『군주론』은 마키아벨리의 고전 읽기의 결과물이다. 이 글이 우리 중앙인으로 하여금, 『군주론』을 고전으로 대하고, 나아가 마키아벨리가 읽은 고전 읽기로 이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