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인.괴인열전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슈트름게슈쯔 2011. 7. 30. 12:48

 

 

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이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로켓 무기 

 

 

 

 

V2 로켓의 발사 실험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밀려 궁지에 몰리게 된 독일의 히틀러에게 한 편의 영화가 전달됐다.
지상에서 발사된 길이 14m, 무게 125t의 거대한 로켓이 100km를 넘게 날아가는 모습을 영화로 본 히틀러는

“6년만 일찍 개발됐었더라면…” 하며 가슴을 쳤다고 한다.
히틀러는 즉각 탄두만 980kg인 이 거대한 로켓을 만들 대규모 공장을 짓도록 지시했다.

그로부터 2개월여가 지난 9월 8일 이 거대한 로켓이 영국 런던 하늘에 나타났다.

단 한 대의 폭격기도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거대한 폭탄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본 런던시민들은 경악했다.

보복무기(Vergeltungswaffe) 2호의 머리글자를 따 ‘V2’로 명명된 이 로켓은 이후 6개월여 동안

3000여 발이 발사됐고 런던을 포함한 연합국 주요 도시 시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V2 로켓이 떨어진 참혹한 결과 - 벨기에  앤트워프 1944년 11월 27일


 

대형 트럭을 이용한 이동식 발사대에서 쏘아지는 데다 당시로는 요격이 불가능한 시속 5760km의 속도로

날아오는 V2 로켓에 연합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V2 로켓의 명중률이 매우 낮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목표 지점에서 몇 km씩 떨어진 지점에 떨어졌고 런던으로 발사된 V2 로켓 중에는

해협을 건너지 못해 바다에 떨어진 것도 적지 않았다.

V2 로켓의 비싼 생산비용은 오히려 독일군의 골칫거리가 됐다.

V2 로켓 한 발의 제조비는 전투기 한 대의 제조비와 비슷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독일이 만든 V2 로켓은 6000여 발로 탱크 4만8000여 대를 만들 수 있는 비용이 V2 로켓 제조에 들어갔다.

1945년 전쟁이 끝났지만 V2 로켓의 주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국과 소련은 V2 로켓 개발 연구원과 발사되지 않은 V2 로켓 확보 경쟁에 나섰다.

미국은 V2 로켓 개발자인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를 포함해 126명의 주요 연구원을 수백 발의 V2 로켓과 함께 미국으로 데려갔다.

소련으로 압송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미군에 붙잡힌 브라운 박사는 1950년부터 미국 육군병기공장의 유도탄 연구 기술부장으로 장거리로켓을 연구했다. 1960년부터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소속돼 아폴로계획을 포함한 우주개발계획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덕분에 V2 로켓에 사용된 엔진구조와 유도제어 기술은 아폴로 우주선인 새턴 5호에 이용될 수 있었다.

소련도 V2 로켓 발사 연구원과 V2 로켓을 확보한 덕분에 소련 최초의 미사일인 R1을 만들어냈다.

 

 

 

 

로켓공학자 폰 브라운은 미국의 유도미사일 연구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려 시사잡지 타임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Ethicsd Science need to shake hands. 윤리와 과학은 서로 악수를 할 필요가 있다.”

 

– 리차드 카봇(Richard Clarke Cabot 1868~1939) 미국의 내과의사, 사회봉사활동가~

과학적 전리품을 탈취하기 위해 벌인 승전국들의 치열한 경쟁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D데이를 얼마 남지 않은 1944년 6월5일 영국에서 분명히 밝혀졌다.

“독일 장비와 기술은 뛰어나다. 수단을 동원해 탈취하라!”

이날 영국의 총 부사령관 로널드 위크스 중장은 “독일의 장비는 우리 것만큼 좋거나 우월하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그는 또 “독일의 연구와 설계, 그리고 설계프로그램을 획득하는 것은 전후 우리가 즉각적으로 취해야 할 목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독일로부터 빼낼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의 배상금이 될지도 모른다.

 

이를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이 동원될 것이다.”라는 확신을 표명하기도 했다.

1945년 헨리 A. 월러스 미국 상무부 장관도 나치가 전쟁에서 사용한 기계들을 기술적으로 강탈하는 기준을 발표했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뛰어난 독일 과학자들을 우리의 과학과 산업발전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시키는 것은 현명하고도 합리적인 일로 판단됩니다”고 제안했다.

이미 아려진 사실이지만, 현재 미국의 최첨단 과학은 독일 과학과 독일에서 이주한 과학자들의 도움으로 더 한층 발전했다.

 

비록 정도면에서는 미국이나 영국보다 덜 했지만 소련과 프랑스도 자신들이 장악한

 

독일 지역에 정보팀을 보내 배상금 대신 기술을 탈취하려고 시도했다.

 

독일의 과학기술을 놓고 승전국 4개국 간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때때로 연합국의 정보팀들은 상대방이 취득한 이익까지 넘보면서 마치 폭력배처럼 굴었다.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손에 넣기 위해 위협을 가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납치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미군에 검거된 폰 브라운

 

 

독일 공학자들 미국 공학자들보다 너 우대 받아


한편 바이에른에서 미군에 의해 검거된 폰 브라운은 그 후 몇 주 지나서

 

자신이 엄선한 120명의 로켓과학자들과 함께 미국 텍사스에 있는 엘파소 부근 포트 블리스로고스란히 이송된다.

 

그리고 미국의 유도미사일 연구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처음에 이 독일 과학자들은 군 막사에 거주 했지만 좋은 음식을 풍족하게 먹었고 봉급도 많았다.

 

약간의 통제가 있었지만 주말마다 버스를 대절해 영화관에 가는 특권도 누리며

 

독일에 있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혜택을 누렸다.

반면 같은 막사에 미국의 일반 공군 기술자들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적국의 포로와 다름 없는 기술자들에게 후한 접대를 하고 자신들은 완전히 찬밥 대접을 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 만이 아니었다.

당시 독일 공학자들과 함께 머물렀던 한스 암트만이라는 항공 엔지니어는 이전부터 라이트필드에 거주했다.

 

그는 독일 공학자들을 위해 동료들과 함께 테니스 코트를 고치며 고생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독일인들이 테니스 치려면 미국 공학자들은 나가야


“독일인들이 테니스를 시작하면 미국 장교가 나와 우리들을 내몰았다.

 

그에 대한 미국 기술자들은 너무나 분개했다.

 

이곳이 패전국 독일인지, 승전국 미국인지 도저히 모를 정도로 그들은 칙사대접을 받았다”

어쨌든 미국 정부가 폰 브라운을 비롯해 그가 데리고 간 과학공학자들 중요한 나라에서 온 사신처럼 영접했다.

 

유도미사일 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나가기 위해서다.

 

독일 과학공학자들이 지은 죄를 처단하려는 의지는 애초 처음부터 없었다.

과학자들이 유능한 과학자라는 이유로 항상 면죄부를 달고 다니기 시작한 전통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죄의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돈으로 매수하는 과학과 기술로 매수했다면 심한 지적일까?

 

 

 

미국의 달 탐사계획인 아폴로 프로젝트는 사실상 로켓공학의 아버지 폰 브라운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The dangers that face the world can, every one of them, be traced back to science. The salvations that may save the world will, every one of them, be traced back to science. 세상이 당면하고 있는 위험들, 그 모두는 과학의 탓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들, 그 모두 역시 과학일 수 있다.” –이삭 아시모프, 러시아 출신의 미국 SF 작가-

세상에 위험이 되고 구원이 되는 것이 과학이다.

그러나 역사는 다시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과학이 이미 만들어낸 숱한 문제는 이제 다시 과학으로 풀어야 한다.

인류가 원하는 과학은 구원과 자비의 과학이다.

그를 외면하는 것이 바로 위험한 과학이고 위험한 과학자다.

폰 브라운과 그의 핵심적인 과학기술자들은 앨라배마, 헌츠빌의 레드스톤 아스널로 이주해 정착했다.

거기에서 그들은 A4를 개량한 레드스톤 미사일과 주피터 미사일, 퍼싱 미사일 개발에 착수했다.

1960년 폰 브라운과 독일인으로 구성된 핵심연구팀은 다시 마셜 우주비행센터에 있는 미우주항공국(NASA)로 이주했다.

당시 이곳에서는 미국의 유인우주선 발사용 로켓 ‘새턴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다.

“기술시스템 전체를 고스란히 옮겨 설치한 것은 유례 없는 일”

과학저술가로 폰 브라운과 친하게 지냈고 훗날 스미소니안 NASA박물관 우주역사담당 책임자가 된 마이클J. 뉴펠트는

“기술 시스템 전체를 패전국에서 승전국으로 고스란히 옮겨 설치한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특별한 경우일 것”이라고 기술한 바가 있다.

레드스톤에서 자리를 잡은 폰 브라운은 미사일 연구개발에 관해 핵심기술자들을 ‘한 지붕 아래 모이기’ 원칙을 재점검했다.

그리고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일부 시스템에 대해서는 하청을 주기도 했다.

폰 브라운이 지휘한 미사일 연구에서 빠진 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노예 노동력일 것이다.

그러나 강제 수용소에서 제공된 것과 같은 노예 노동력에 상당하는 노동력은

미국에서는 이미 풍부하게 공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46년 ‘페이퍼클립 프로젝트’가 오버캐스트 프로젝트를 대체했다.

새 프로젝트는 적국 독일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장기적으로 활용하고,

나치 전범 처리에 관한 트루먼 대통령의 원칙을 강화하는 법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일 과학자와 기술자는 전범에서 제외시켜라”

다시 말해서 독일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전범분류에서 제외시키는 프로젝트였다.

따라서 미국이 필요한 독일 과학자들은 나치와의 협력이나 동조여부와 관계 없이

선량한 이민자로 대우받아야 하며, 또한 미국입국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무려 3천여 명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한 일본의 세균전부대 731부대에도 해당됐다.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마루타에 대한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넘겨받는 대신 어느 누구도 처벌하지 않았다.

이러한 생체실험정보가 훗날 미국의 의학 및 약물학, 화학, 그리고 생물학 발전에 이바지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부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비밀에 싸여 있으며 정확히 알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부대를 이끈 세균학 박사 이시이 시로(石井) 중장도 전혀 처벌받지 않았다.

 전쟁 후 대학 학장까지 지냈다.

 

폰 브라운의 A4 로켓 제조에 강제 동원된 노동자들 - 1945년 도라 미텔바우

 

 

미국의 나치 전범 조사팀이 미텔바우-도라 수용소에서 인체실험을 비롯해

잔인한 노예노동에 대한 증거와 증인을 찾는 일에 착수했을 때

토프티 대령은 자신이 접수한 V1, V2 로켓과 관련된 독일 기술팀은 수사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미국은 모든 책임을 나치 친위대에 전가했다.

 

그리고 합성화학물질 생산공장인 도라에서 자행된,

잔인한 노예노동력 착취에 대해서도 과학자들은 책임이 없다고 밝혔다.

 

독일 과학자들을 고용한 미국의 무기산업체들도 그들을 기꺼이 변호했다.

 

냉전이 심화될수록 그들의 건망증은 더해 갔다.

 

독일의 페네뮌데 로켓 실험기지 - 1942년 6월

 

 

 

 

 

 

 

 

 

독일 페네뮌데 로켓 제작소의 폰 브라운과 나치 장교들

 

 

독일의 페네뮌데 헌츠빌에서 재탄생

독일의 페네뮌데는 미국의 헌츠빌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이곳은 미국의 대항공기 미사일과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연구개발의 핵심기지였다.

어떤 독일 기술자는 농담 삼아 헌츠빌을 페네뮌데 남쪽지역이라고 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곳에서 일하는 나치 엔지니어 수가 나중에는 500명까지 늘었다.

그렇다면 나치의 과학과 기술을 이용하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

이에 대해 <히틀러의 과학자들>의 저자 존 콘웰 교수는 이렇게 답변한다.

“나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가 스스로를 방어하는데 나치의 기술적 노하우를 절대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치 과학의 범죄성을 중요한 역사로 기록하고 있는 우리가 서방세계를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미사일이 사실은 노예 노동력이라는 이름의 인간이 흘린 피의 대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피가 아직도 상처처럼 고여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만약 그러한 역사적 인식을 갖고 있다면 나치의 과학과 기술을 이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폴로 우주선이 런던에 착륙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나요?

 

 

폰 브라운의 배우자 - 마리아 폰 브라운

 

 

 

폰 브라운의 가족 - 1970년

 

 

우주공학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나치 과학의 중심에 있던 폰 브라운의 범죄성은

 

로켓공학의 아버지라는 이름 속에서 거의 잊혀져 가고 있다.

최근 우주 탐사경쟁이 치열하다.

불모지대나 다름 없는 달에 물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리는가 하면 생명체흔적도 발견했다는 뉴스도 있다.

우주의 비밀이 점점 밝혀지고 있고, 인류의 비밀 역시 밝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눈부신 우주과학의 문을 활짝 여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 과학자가

바로 나치 과학자이자 로켓공학의 아버지 베르너 폰 브라운이다.

그렇다면 폰 브라운을 위험한 과학자로 ‘찍어내어’이제까지 그의 잘못을 늘어놓은 것은 혹독한 처사인지도 모른다.

아폴로 달 탐사선이 발사되기 하루 전의 일이다.

기자회견이 열렸다.

나치의 로켓폭탄이 런던 중심에 떨어져 시민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던 생생한 과거를 회상하면서

한 기자가 폰 브라운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만든 아폴로 탐사선이 런던에 착륙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나요?

” 이 질문을 받은 폰 브라운은 곧바로 얼굴을 붉히며

기자 회견장에서 큰 걸음으로 빠져 나와 승용차에 몸을 싣고 어디론가 황급히 떠났다.

 


사람들은 때로 우리의 역사가 바로 서지 못한 것은 해방 후 친일파를 단죄하고 못했다고 지적한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바로 친일파에 의해 왜곡됐다고 주장한다.

친일 논쟁은 65년이 지난 지금에도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단죄를 할 시기를 놓쳤다고도 할 수 있다.

“악마와 계약한 과학자들, 단죄 시기 놓쳐”

<히틀러의 과학자들>의 저자 존 콘웰 교수도 그렇다.

2차 대전 후 소위 나치 히틀러라는 악마와 계약을 한 학자들에게

역사적인 단죄를 가해야 했는데도 그 기회를 놓쳤다고 주장한다.

그들을 단죄해야 할 연합국 측이 오히려 그들을 두둔하고 감싸 안는 바람에 그 기회를 놓쳤다고 주장한다.

과학자의 윤리와 도덕적인 의무가 간과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 왜 단죄를 하지 못했을까?

2차 대전 후 로켓공학자 폰 브라운을 비롯해 나치에 동조했던

유능한 독일 과학자들과 그들의 기술을 모셔오는 것은 국가정책이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연합국은 각자 전쟁이 끝날 때를 대비해 이러한 정책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1940년대 초 폴란드, 베네룩스 3국, 그리고 이어 프랑스가 함락된 후 유명한 작가 두 사람,

즉 영국의 저명한 생화학자이자 과학 역사가인 조셉 니덤과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턴은

훌륭한 과학기술과 자유민주주의라는 덕목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월트 디즈니와 폰 브라운 - 1954년

 

 

체계적인 비판 속에서 훌륭한 과학기술 나와

과학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인간보다 지능이 우수한 인공지능이 나올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라는 과학기술의 여과장치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과학적 창의성은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와 정치적 분위기,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비판과

 다양한 여러 방면의 주장이 수용되는 환경이 조성될 때에 비로서 번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치 독일의 점령지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을 비춰볼 때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니덤과 머턴은 유럽대륙 전역에 걸쳐 자행된 시민학살을 규탄했다.

두 사람은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탄생한 과학과 기술의 성과물은

당연히 올바르고 윤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 개념은 나치 과학이 암시하는 파우스트적인 거래와는 명백히 반대된다.

파우스트적인 거래란 악마적인 히틀러와 계약을 맺는 것으로 너무나 충동적인 행위다.

그 거래는 비록 초기에는 강한 인상을 풍기며 어떤 기술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곧 오류에 빠져 비이성적인 목표에 헌신하게 된다.

결국 나쁜 과학은 나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나치와 관계 없이 유능한 과학들을 모셔오는 것은 국가 정책

얼마나 올바른 지적인가!

그러나 니덤과 머턴의 주장은 ‘오버캐스트 프로젝트 (Project Overcast)’라고 알려진

미국 정부가 비밀리에 추진한 계획에 따라 나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는 다시 군에 의해 ‘오버캐스트 작전(Operation Overcast)’으로 불리게 된다.

1945년 7월19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합참의장은

이 작전을 공식 승인했으면 군은 작전에 들어갔다.

이 작전의 주용 내용은 350명의 독일 최고급 두뇌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6개월에 걸쳐 미국으로 모두 데려온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을 찾아내 설득하고, 회유하고, 협박하고…

그래도 안되면 강제로 정중히 모셔오는 일이다.

오버캐스트는 오버캐스트 수용소(Overcast Camp)를 의미한다.

이 캠프는 최고의 비밀을 요하는 미국 공군비행장인 라이트 필드(Wright Field)에 있었다.

 훗날 UFO, 외계인 사건으로 유명해진 바로 그 비행장이다.

다시 말해서 영국과 미국 정부는 폐허가 된 제3제국으로부터

기술과 그에 따른 결과물은 물론 도움이 될만한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빼앗아 오는데 있었다.

독일 과학자들이 나치와 직접적인 협력을 했건 하지 않았건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유능하고 도움이 되면 그 뿐이었다.

프랑스와 소련도 다 이런 프로젝트를 갖고 있었다.

오버캐스트 프로젝트가 얼마나 극비리에 진행됐던지 당시 이름깨나 날리며 영향력이 강했던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 상원의원조차 이 수용소에 가려다가

 문전박대를 당해 한때 의회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전리품은 승자에게 있다’는 말은 미국 정치에서 오랫동안 굳어져 내려온 전통이다.

독일 과학은 승자의 중요한 전리품이자 약탈의 대상이었다.

 바로 독일 과학자들이 그 대상이었다.

어떻게 그 소중한 전리품을 단죄라는 이름아래 훼손시킬 수가 있겠는가?

 

 

 

NASA 우주박람회에서 그를 보기 위해 방문한 열광적인 시민들과 접견하는 폰 브라운 -  1963년 10월

   

 


1971년 7월 26일 발사된 달착륙선 아폴로 15호는 11, 12, 14호와 다른 점이 있다.

 

바로 그것은 월면차이다.

 

이전엔 우주인들의 움직임이 무거운 장비 때문에 제약을 받았다.

 

멀리 갈 수도, 크레이터에 들어가 볼 수도 없었다. 그래서 월면차가 등장했다.
월면차 개발은 베르너 폰 브라운이 했다.

 

그는 히틀러의 지원으로 독일 페네뮌데 섬에서 V2 로켓을 개발했던 독일 과학자다.

 

로켓 개발을 위해 영혼까지 팔았다며 ‘20세기의 파우스트’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인 45년 5월 소련군을 피해 엄청난 양의 로켓 자료들을

 

동굴에 숨겨놓고, 5000여 명의 기술자와 함께 미군에 투항했다.


폰 브라운은 천재였다. 그는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지 넉 달 만에 미국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 발사를 성공시켰다.

 

이때 사용된 ‘주노 1’ 로켓은 그가 나치하에서 개발했던 V2로켓의 변형이다.

 

그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마셜우주비행센터(MSFC) 초대 소장을 맡았고, 달 착륙 프로젝트를 주도했다.

 

그리고 ‘주노’와 ‘주피터’ 로켓을 대형화해 ‘새턴V’ 로켓을 개발했다.

 

NASA 전문 취재기자 ‘레지널드 터닐’에 따르면, 로켓 이름 ‘새턴’은 ‘주피터’, 즉 목성 다음에 있는 것이 토성이었기 때문이다.

 

 

케네디 대통령과 폰 브라운 - 1963년 5월 19일

 


 

 

NASA 우주센터에서 새턴 로켓 시스템을 바라보는 폰 브라운과 케네디 대통령 - 1963년 11월

 

 

폰 브라운은 제미니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 중이던 66년 제미니 9A호의 우주인 유진 서넌을 불렀다.

 “달에 가는 것은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보낼 겁니다.

문제는 달에 착륙했을 때 무슨 일을 할 것인가인데… 당신은 차를 운전하게 될 겁니다.

” 서넌은 놀랐다. 당시는 사람이 달에 가는 것조차 요원한 상태였다.

그런데 폰 브라운은 한발 더 나아가 38만4400㎞ 떨어진 달에

사람이 가서 차를 운전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폰 브라운은 64년부터 MSFC에서 ‘차로 달 표면 횡단’ 아이디어를 준비했다.

기술팀에 일단 서류상으로 구상을 실천할 준비를 시켰다.

개념을 세우고 설계해봤지만 너무 크고 무거웠다.

그래서 기본 설계에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69년 4월 MSFC 내에 월면차 태스크팀을 구성했다고 발표했다.

 닐 암스트롱이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 착륙 비행에 나서기 3개월 전이다.

69년 7월 11일 NASA의 납품업체들에 월면차 공모를 했고, 두 달간의 심사 끝에 보잉사를 개발 업체로 선정했다.

입찰액은 1960만 달러, 납기는 71년 4월까지였다.

개발비 인상이나 일정 지연 가능성을 막기 위해 인센티브제를 도입했다.

계약서에 3개의 조항을 넣었다.

첫째, 1960만 달러 이하로 개발을 마쳐도 1960만 달러를 다 지급한다.

그러나 예산이 초과되면, 초과분의 극히 일부만 더 지급한다.

둘째, 달에서 월면차가 제대로 작동을 못하면, 계약 금액의 일정 퍼센트만 지급한다.

셋째, 아폴로 15호 일정에 못 맞추면, 돈을 전혀 지불하지 않는다.

가동 조건으로 ‘깊이·넓이가 각각 2피트인 크레이터 안으로 들어가고 나올 수 있을 것.

 1피트 높이의 바위를 타고 넘을 수 있을 것. 45도 경사를 올라갈 수도 있어야 하되 25도 기울기에서도 안정될 것’을 제시했다.

 

어려울 것이란 예상을 깨고 보잉사가 월면차를 완성했다.

비용은 두 배가 들었다.

보잉사는 월면차 개발을 위해 실물 크기 모형들과 전기구동·조향·바퀴·현가장치 등 무수히 많은 시험 시설을 만들었다.

 달착륙선 안에 들어갈 월면차 무게 계산도 복잡했다.

달의 중력은 지구의 6분의 1이지만, 지상에서 연습을 하려면

중력 1의 조건에서도 가동돼야 하니까 두 상황을 다 충족시켜야 했다.

발사 시와 달까지의 비행, 달 착륙 시 월면차가 받는 힘도 고려 요인이었다.

또 달에서의 시뮬레이션을 위한 장치들도 있었다.

주요 시스템을 보면, 구동장치 외에 36볼트의 은-아연 배터리와 4분의 1마력 DC모터,

각 바퀴의 구동을 위한 전기 시스템, 내비게이션 시스템, TV카메라와 라디오, 원격조정 등

커뮤니케이션 장치, 극한의 온도에서 견디는 내열 및 열 차단 시스템, 그리고 운전자용 장치 등이었다.

전체 무게는 209㎏이었다.

막상 아폴로 15호가 달에 도착해 월면차(사진)를 가동했을 때 앞바퀴는 작동되지 않았지만 뒷바퀴만으로 가동할 수 있었다.

협곡 근처까지 왕복했다. 먼지가 일어나 시야를 가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바퀴덮개가 역할을 잘해 그러지 않았다.

3일 동안 가동한 후 달에 차를 두고 지구로 돌아왔다.

서넌은 마지막 달착륙선 아폴로 17호의 선장으로 달에서 월면차를 운전한 마지막 우주인이 됐다.

NASA는 2020년을 목표로 달에서 6개월간 체류할 수 있는 주거형 월면차를 개발 중이다.

중국도 월면차 개발을 끝냈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2020년 자력으로 1단 로켓 발사가 목표이다.

지금쯤 누군가는 폰 브라운이 그랬던 것처럼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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