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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 3제국의 제 2인자였던 괴링 [The German Third an Empire Second Man Hermann Göring]

슈트름게슈쯔 2012. 1. 19. 16:26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1893~1946)


 

영국의 저명한 전사가 밥 캐러더스는 히스토리& 아더 에서 괴링을 이렇게 평가했다.
괴링은 지구 역사를 통털어 제일 멍청했던자가

제일 높은 독일 제3 제국의 제 2인자 자리까지 올랐었던

아이러니했던 인물으로서 한마디로

 전세기에 보기 힘든 희안했었던자 였다.

 

 

 

 

 

괴링은 곧잘 무능력한 돼지같은 자로 불렸으며

2차대전 독일 지휘관중 그만큼 조롱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없다.

 

히틀러의 제1후계자로 선택받았던 헤르만 괴링은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곧잘 "오늘도 어제도 나는 변함이 없다.

나는 언제나 마지막 르네상스인이다." 라고 했다.
또 거창하게 폼을 잡는 게 그의 특징이었다.

"히틀러를 제외한다면 독자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사람은 나 한 사람뿐이다."

 

 

 

 

 

 

1940년 프랑스가 허무하게 손을 들고, 38만 (혹은 30만) 연합군은

덩케르크  해안에 총이고 차고 몽땅 내다버린 뒤 몸만 간신히 영국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영국에 "우리 독일이 유럽의 지배자임을 인정한다면,

 대영제국의 존재를 용인하겠다"라는 통첩을 보낸다.

그러나 이는 영국에게 굴욕적인 통고였고,

결국 히틀러는 영국을 박살내기 위해 공군에게 영국의 예봉을 꺾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2,500대의 전투기를 가진 독일과 650대 -

그것도 한달 안에 크게 늘린 수-를 가진 영국의 전력차는 거의 4:1에 달했고,

이러한 숫적 우세를 앞서운 독일은 7월과 8월 동안 영국을 마구 두들겨댔다.

이러한 소모전에 영국 공군이 서서히 지쳐갈 무렵,  작은 사건이 일어나는데,
야간 폭격에 들어간 독일 폭격기 부대가 실수로 런던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이것은 히틀러를 크게 자극했고,

괴링 원수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

그리고 잘못된 전과보고로 인해

독일 공군은 거의 다잡은 영국 공군을 내버려두고 런던에 모든 전력을 집중시킨다.

 

개전 초기 괴링은 "내 루프트바페를 뭘로 보고 그런 소릴 하는거요?

 '만약.. 베를린에 단 한 발의 폭탄이 떨어진다면..

나를 개자식이라고 불러도 좋다...

라고 호언장담을 한다.

 

그러나 영국 공군은 1940년 8월25일 보란 듯이 베를린을 두들겼고,

문제의 폭격기 파일럿들은 그 광경을 보면서

 "결국 우리 원수님은 바보가 되버렸군요."하고서 괴링을 비웃는다.

그러나 이건 결정적인 실수였다.

게다가 폭격기 부대의 손실이 급격히 늘어나자

괴링은 전투기 조종사들을 "겁쟁이들"이라고 몰아붙이면서 폭격기 편대에

근접 엄호를 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한다.

그리고는 "좋아. 이제 문책은 충분하겠지.

난 자네들을 도와주려고 프랑스에 온거야.

대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저 영국 놈들을 몰아낼 수 있겠나?

자네들에겐 세계 최고의 전투기가 있지않나?

자!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봐!

내가 뭐든지 지원해 주겠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손발을 묶고서 뭘 도와주겠다는 건지 회의가 들기 시작한 전투기 조종사들은

그저 시큰둥하게 괴링을 바라볼 뿐....

결국 괴링 원수는 가장 존경받는 에이스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그리고 이걸 기다렸다는 듯, 아돌프 갈란트가 대답한다.
"네, 각하! 저희들에게 스핏파이어 전투기를 주십시오!"

이 말 한마디에 괴링의 얼굴은 삽시간에 얼어붙는다.

사실 갈란트의 이 말은 엉뚱한 것 같지만 상당히 커다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는데,

 간단히 말해서 괴링을 비웃는 말이었다.

괴링도 이걸 알아챘기 때문에 얼굴이 굳어버렸다.

결국 영국본토 항공전에서 영국 왕립공군과 연합군은

독일 공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잔인했던 두달을 버티어 낸다.

결국, 이 전투는 나치 독일의 몰락을 알리는 전주곡이 된 셈이었다.

훗날 연합군이 유럽 침공을 위해 모인 집결지가 바로 영국이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과의 영국 본토 항공전 (Battle of Britain)에서

독일 공군 사령관으로써의 무능함에 의헤

작전 실패로 대패한

형태를 보여준 소련군에 의해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되었던 30만명의 독일 제6군에 대한 

공중 보급품 수송에 문제없다고 히틀러에게 호언 장담한 형태를 보면 자명하게 느낄수 있다.  

이 1차대전 공군 에이스는 어떻게 히틀러를 따르게 되었으며

어떤 생각으로 제3제국의 핵심 간부로써 전쟁과 학살을 일구었을까.

어린 괴링은 어머니의 대부 덕분에 부유하고 귀족적인 환경을 경험할 수 있었다.

거기서 르네상스적이고 중세적인 낭만에 푹 빠졌다.

전설 속의 기사와 영웅들을 숭배하며 동일시하는 그의 성격은 그의 인생 전반에 나타난다.

무절제하고 반항적이던 괴링은 탐욕 또한 대단하여

그의 어머니는 그가 위대한 사람이 되거나 악랄한 범죄자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반항적이고 모험을 좋아하던 괴링은 1차대전이 벌어지자 공군 조종사로 지원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무모한 공격성을 비판했음에도

그 덕분에 그는 빠르게 진급했고 많은 격추수를 올릴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패전한 독일의 공군이 해산되자

그는 원치않게 일시적인 민간인 생활로 들어갔다.
 

 




나치독일의 공군원수였던 헤르만 괴링은 귀족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문가에서 태어나 엘리트 군인 코스를 밟았다.



1907년. 14세 때의 헤르만 괴링.




1912년 경.


그는 사교계의 총아였다.



1916년 경. 공군 에이스 파일럿. 작전회의실에서.


그는 굉장한 격추수를 자랑하는 에이스 파일럿이였으며

"붉은 남작" 만프렛 폰 릭토펜이 지휘하는 릭토펜 비행전대의 부지휘관이었다.



전용기에 탑승한 괴링

1차세계대전 종전 후, 괴링은 항공사에 취직한다.

 

 

이 때 즈음에 첫 아내 카린 폰 칸쵸우와 결혼한다.



중매결혼이 아니라 첫눈에 반해서 구애를 시작, 골인한 연애결혼이었다.


그리고는 국가사회주의노동당에 가입한다.

 

 

1나치 돌격대 지휘관이 된 괴링 - 1923년

이 때 즈음부터 그는 마약 중독에 빠졌다.

마약에 탐닉하고 운동량은 줄어들었다.



1928년 경.


그리고 그의 당은 정치적으로 대성. 정권 수립.

히틀러와 나치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지배하게 된다.


1931년경. 첫 아내 카린 괴링이 폐렴으로 급사.





그와 동시에 당 간부이자 히틀러의 수하였던 괴링도
1932년에 국회의장 (라이히슈타크 프라지덴트) 에 임명된다.
그 직후의 사진. 그는 이 자리를 1945년까지 유지한다.

슬슬 덩치가 불어난다.

그,는 카린과 사별한지 4년 후 1935년에 에미 소네만과 재혼한다.

 

 



좌측이 에미 괴링.



그리고는 1933년 항공장관 취임.


1938년. 괴링.

미묘한 거짓 미소가 인상적이다.




2차세계대전 개전. 폴란드 침공 즈음.

그의 공군(루프트바페)는 대성. 활약한다.




나치 독일 공군원수 괴링의 상당히 미화된 초상화.

 





1940년대(?) 펠덴슈타인 성의 별장에서 사냥을 즐기는 괴링.




이건 그 유명한 '괴링의 장난감 전기 기차'다.

그는 철도 동호인이었다.

그래서 장난감 기차 세트도 장만해 가지고 놀곤 했다.

이 점 때문에 후대에 '덕후' 별명이 붙는 것.



1942년. 전선 시찰중인 괴링. 살이 최대로 불어난 시점.


그리고는 거듭되는 무능력함을 보여주기 시작하더니 결국 독일공군을 괴멸시켜 버린다.

괴링의 많은 정치적, 전략적 무능때문에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는 괴멸되어 버리고

루프트바페에게 보호받아야 할
독일의 지상군과 해군도 연합군에게 제공권을 뺏겨버려 수세에 몰리게 된다.


영국 상공에서의 나치 공군 "루프트바페의 괴멸"


그런 점에서 괴링은 독일의 패전 요인이기도 했다.

마약 때문에 정신을 망쳐 판단력을 흐린 것일까?

아니, 애초에 그는 너무 사욕이 많았다

1선 에이스 파일럿이던 1차세계대전 때부터도 그는 너무 욕심이 많았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식탐, 식욕도 너무 많았던 것일까?




 

 

 

1945년 4월. 독일의 패색이 짙을 무렵 괴링과 히틀러.

 

그와 히틀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히틀러 자살 직전 괴링은 히틀러를 배신하고 쿠데타를 획책한다.
하지만 그것도 아무 소용없이 그는 붙잡히고 전범재판에 회부된다.

 

 

 


1946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수감되어있는 괴링.
그는 나름 호감을 주려고 노력했으며 자기 주장을 뚜렷히 피력했다.



재판정 안의 괴링.

늘어난 주름살과 약간은 빠진 살이 눈에 띈다.



 


기립해서 자기변호중인 괴링.


하지만 자기합리화의 변설도 아무 소용없었다. 그 역시 나치독일의 지도자중 하나였고
최악의 전쟁과 유대인 대량 학살에 동조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교수형 판결이 내려진다.

그러나 그는 군인의 명예로 교수형이 아닌 총살형으로 요청했으나 기각된다.

그래서 스스로 자살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에이스였던 괴링


 

1922년 어느날, 뮌헨에서 그는 히틀러를 만났다.

괴링은 그의 연설과 카리스마에 흠뻑  빠졌으며

그는 히틀러가 그야말로 독일의 새로운 황제가 될 자격이 있으며

독일을 구원할 사람이라고 믿게 되었다.

히틀러 또한 괴링에게서 많은 매력을 발견했다.

그의 외모는 매력적이었고, 독일 최고훈장을 수여받은 전쟁 영웅이었다.

그의 이런 프로필은 대중에게 써먹기 아주 좋은 것이었다.

또한 사업에 능했던 괴링의 재력은 히틀러의 정치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괴링은 나치스 돌격대(SA)의 지휘관이 되었지만,

나치즘 활동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괴벨스는 언제나 괴링이 숭고한 나치즘의 이상에는 관심 없고 재물에만 관심있다고 혐오했다.

그는 간부로써의 의무와 활동보다는 높은 직위에서 오는 편안함을 더 즐겼다.

뮌헨 폭동이 실패한 후 부상을 당한 그는 통증을 억제하기 위해 헤로인 아편 약물에 의존했고

그 결과 모르핀 중독에 빠졌다.

그의 모르핀 중독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히틀러와 괴링


 

뮌헨 폭동 관계자들이 사면되자 괴링은 히틀러와 함께 다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전쟁영웅으로써의 면모는 히틀러가 고위층과 접촉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히틀러에게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면담할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독일 대기업들로부터 후원을 받아내 당의 재정을 윤택하게 만들었다.

그는 히틀러와 함께 권력의 최상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정력적으로 일했다.

히틀러는 괴링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충실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가 헌신적이고 신뢰할 만한 인물임을 인정했다.

괴링은 그 엄청난 탐욕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에게 완전히 혼을 빼앗겨 그의 노예가 되었다.

수많은 정적들을 거리낌없이 해치우는 과정에도 히틀러에게 반발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괴링은 정적들을 물리칠 때마다 그 자리를 차지하여 제국에서 가장 많은 직책을 겸임하는 사람이 되었다.




 

1928년 뉘른베르크 나치당 집회때의 아돌프 히틀러와 괴링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아돌프 히틀러가 나의 양심이다."


 

 

그는 분명 반유대주의자였고, 뉘른베르크 인종법을 이끈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의 인종주의 수준은 히틀러나 히믈러, 괴벨스에 비해 여전히 불명확하다.

 그는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유태인(예를 들면 예술품 거래상) 들에게는 신변을 보장해주었으며,

주변 사람들이 자신들과 친한 유태인에 관해 도움을 청해올 때면 곧잘 특권을 발휘해주곤 했다.

여러 사례를 볼 때 그는 다른 간부들 처럼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란 것을 알 수 있다.

히틀러를 따르는 의무로써 인종주의 정책을 실행하기는 했지만

그 자체에 큰 뜻을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느날 히틀러가 유태인들을 다 사면하고 시민권을 준다고 결정했다 하더라도

괴링은 별다른 이견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유태인을 친구처럼 생각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유태인과 독일인은 분명 구분되어야 한다고 선을 명확히 긋고 있었다.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괴링은 공포에 휩싸였다.

오스트리아, 체코 합병 때 그는 혹시라도 전쟁이 날까봐 극도로 불안해했다.

그는 연합군과 다시 전쟁을 벌이는 짓은 무모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독일군이 연합군에 승리할까 의문이 있어서일 수도 있고,

더 현실적으로는 전쟁으로 인해 자신이 얻은 많은 것을 조금이라도 잃을까봐 그랬던 것이다.

폴란드와 전쟁이 시작되자 괴링은 히틀러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개전 후 괴링은 히틀러와 다른 외교적 견해를 가진 경우가 많았지만

그는 히틀러에 결코 반대하지 못 했기 때문에 자신의 불안감을 속에 끌어안고 안절부절했고 침울해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그의 어께를 토닥여주며 격려의 한마디만 해주면 금방 기쁨에 넘쳐나며 활기가 돌았다.

히틀러가 죽기 직전까지 이런 패턴은 반복되었다.

슈페어와 되니츠는 히틀러의 영향 하에서 자존감을 빼앗긴 괴링과 카이텔을 동정했다.






 군사전략가 로써의 처참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괴링을 내칠 수 없었는데,

괴링이 대중과의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를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괴링 스스로도 주장했듯, 히틀러는 민중의 신이었지만

민중은 사실 극도로 이데올로기적인 히틀러를 어려워했다.

히틀러를 정말 이해하고 따르고 있다기보다는,

평범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생각을 가진 선지자 정도로 여겼기 대문이다.

그에 반면 괴링은 나치 정권의 ‘아이돌’이었다.

그는 붙임성이 좋았고 전쟁영웅이란 타이틀도 있었으며 기사도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속물이기는 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괴벨스나 히틀러와 달리 훨씬 인간적이었다.

그는 그런 자신의 매력을 십분 발휘했고, 심지어 뉘른베르크에서는 몇몇 연합군 장교와 병사들과도 친해졌다.

그런 괴링을 내친다는 것은 히틀러의 대중기반 중 상당부분을 내버리는 것이기도 했다.

히틀러는 군사적으로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괴링을 혐오했을 테지만,

괴링이 히틀러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듯, 히틀러도 괴링을 버릴 수 없었다.

 제3제국의 최후가 다가왔을 때, 괴링은 제국의 2인자,

제국원수의 자격으로 히틀러에게 권력 이양을 요구하는 전문을 쳐 히틀러의 마지막 분노를 샀다.

사실 괴링은 괴벨스와 달리 히틀러를 신의 경지까지 올리지는 않았고,

그의 세계관은 그런 것도 아니었다.

현실주의자 괴링은 어디까지나 히틀러 또한 인간이며 언젠가 힘이 다할 때가 될 것이므로

제국의 순조로운 승계를 위해 응당의 요구를 했으리라 생각했다.

그의 요구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미 노이로제 상태에 빠진 히틀러에게는 또다른 패배주의나 모반 혐의로 보일 뿐이었다.

비록 히틀러는 괴링의 목을 수배하지는 않았지만

괴링마저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에 더욱 우울해져갔다.

 히틀러의 분노에는 그의 정적이기도 했던 보어만의 과장된 어휘가 기여했을 수도 있었다.

나치 수뇌부는 최후의 최후까지 내부 권력투쟁을 그만두지 않았던 것이다.




 


아편중독자이자 예술품 도난꾼 괴링


 

패전 후 미군 의사들은 그의 아편 약물 중독을 치료하고 다이어트 시키는데 성공했다.

뉘른베르크에서의 경험은 괴링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히틀러가 죽은 지금 그는 이제 제국의 1인자로써(공식적으로 2대 총통은 되니츠였지만)

명예롭게 대접받길 원했지만, 연합군이 내놓은 대답은 전범재판이었다.

특히 괴링은 자신이 군사지도자가 아니라

인종학살범, 예술품 도난꾼 같은 죄몫으로 기소된데 심한 수치심을 느꼈다.

그는 과시적이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일면 아주 상처받기 쉽고 소심한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뉘른베르크에서 조차도 그는 그의 장기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애썼다.

약물중독에서 벗어난 그는 다시 냉철하던 과거의 괴링으로 돌아왔다.

그가 권력을 얻는데 도움을 주었던 고상한 이미지를 연합군에 심으려고 했으며,

말 한마디와 제스쳐에도 엄청난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심지어 몇몇 서방 대표들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전쟁범죄에 어떤 가책도 가지지 않았으며

히틀러의 명령을 너무나 열성적으로 수행했기에 감형의 여지는 없었다.

재판정은 그에게 교수형을 내렸다.




뉘른베르크 수감 시절의 괴링


 

설사 사형을 받는다 하더라도 군인식 총살형을 기대했던 그에게 교수형은 엄청난 모욕이었다.

하지만 그는 비굴하게 재심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형 집행 전날 군목사, 부인, 연합군 위원회에

마지막 분노의 편지를 남기고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어 자살했다.

그 청산가리 캡슐은 그가 친목을 텄던 미군 장교의 도움으로 손에 넣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마지막까지 낭만적인 면모를 고수했으며,

언젠가 자신들이 순교자로써 추앙받을 것이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자살하기 전날 그는 “50년 혹은 60년 뒤면

독일 전역에 헤르만 괴링 동상이 있을 것이다.” 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약간 머뭇거리던 그는 마저 이어서 말했다.

 “아마 동상은 없을지 모르나, 내 초상화는 집집마다 걸려있을 것이다.”

그는 나치 초기당원인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와 같은 날 태어났으며

자살하지 않았다면 같은 날 죽었을 것이다.

 군사적 무능함과 인격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여타 나치 간부들을 능가하는 정치외교적 수완과 비록 속물이라 혐오 당했지만

현실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그의 성격을 생각해볼 때,

그가 히틀러의 전쟁 명령을 거부하고

독일의 1인자가 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히틀러 없는 괴링은 무모한 전쟁을 시도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반유대정책 또한 학살까지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군주에 충성한다는 걸 자랑으로 삼는 낭만주의자 괴링은 절대 히틀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뉘른베르크에서 조차 공동수감 죄수들에게

히틀러의 편을 들어야 한다고 조장하기까지 했다.

히틀러가 죽은 뒤 자신을 제국의 1인자로 칭하면서도

히틀러를 비난하는 것만은 피했던 것은 독특한 점이다.

그 충성의 댓가는 제3 제국과 그의 파멸이었다.




 

 


청산가리 캡슐로 음독 자살한 괴링

 

1945년 11월 20일 뉘른베르크 재판(독일 전범에게 전쟁의 책임을 물었음)에 섰던

헤르만 괴링은 훈장이 뜯겨져 나간 나치제복 차림의 그는

 “전쟁의 승자는 언제나 재판관이 되고 패자는 피고석에 선다”며 자신의 행위가 정당했음을 주장했다.

아돌프 히틀러에 이어 2인자로 비밀경찰(게슈타포)을 조직했고

공군 총사령관을 지낸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을 ‘승자들이 정의라고 포장해 꾸미는 각본’이라고 여겼다.

 그는 “우리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처칠이나 루스벨트가 법정에 서야 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괴링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신을 인터뷰했던 미군 소속 정신과 의사 리언 골든슨에게

“유대인 홀로코스트(대학살)는 나의 기사도 원칙에 위배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는 “나는 여성을 존중하며 어린이를 죽이는 것은 신사답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유대인 말살 문제에서 내가 껄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그 점이다”고 덧붙였다.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기 자신을 열정적으로 변호했고

실제로 재판 초기에는 상황이 그에게 유리한 것처럼 비치기도 했다.

 괴링은 법정에서 유쾌한 농담으로 좌중을 웃기기도 했으며,

검찰의 기소 내용 중 허점이 있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들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 홀로코스트와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유대인들과 전쟁 포로들을 살해하라는

그가 직접 사인한 명령들이 속속들이 밝혀지면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는 형 집행 몇 시간 전 미리 숨겨놓았던 청산가리를 삼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끝까지 비겁했던 그의 최후였다.

 

 

 

 

photo from : holocaustresearchprojec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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