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인.괴인열전

불의에 대한 김두한의 응징

슈트름게슈쯔 2011. 8. 5. 18:50

얼마전 부산의 모 고교 동창회가 열린 부산 연제구 연산동 OO횟집의 연회석에서는

48년전에 대한민국 국회에서 벌어졌던 일이 다시 재현되는 희안한 일이 벌어졌다.

그 고교는 부산지역에서 꽤 역사와 전통이 깊은 학교였는데

그 고교의 설립된 역사는 근 50여년이나 된 이름있는 사립고교였다.

 

그 고교 동창회에서 벌어진 일은 흡사 1966년의 김두한 의원 국회 인분 투척사건과

닮은 형태를 보여주었다.

또한 그러한 일을 발생시켜  불구속으로 입건된 서모(58세)씨의 동기도

김두한 의원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한다.

 

전국 각지 각계에서 동창들이 부산의 모교에 발전 기금으로 보내온 후원금의 일부를 동창회 관계자들이

몇년동안 몰래 유용하여 유흥비와 도박등으로 1600 여만원을 탕진한 사건이 밝혀졌던 것이었다.

이에 그 공금 횡령 비리 사건을 서로 입을 맞추어 덮어버리고 자기들의 체면을 위하여 은폐하려고 했었던

전직 동창회 간부와  현직 간부들을 향해

그 사나이는 동창회 연회장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던 그들에게 그동안 동창들을 속이고 우롱한데 대하여

일말의 양심 가책이라도 깨달아 정신을 차리라고 똥물을 퍼부었던 것이었다.

이는 그동안 잠자고 있는 비겁자들에게 대하여

대한민국인의 떳떳한 정기를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아무도 행동하지 않는 양심에 대하여 의기있는 한명의 사나이가 나서서

그야말로 불의에 경종을 울리며 몸과 행동으로 말해준 경상도 남아의 멋진 모습이었다. 

   

 

 

金斗漢(1918~1972) - 대한민국  의리의 상징이었던 김두한

 

 

김두한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호는 의송(義松)이며  별명은 잇뽕(일본어: いっぽん)이다.

일제 강점기말 19세 약관의 나이로 당시 조선의 대표적 주먹이었던

신마적과 구마적및 상하이 박등을 제압하고

종로 우미관의 주먹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거부하는 등 일본 제국에 저항하였다.

해방기에서는 잠시 조선 공산당의 산하인 조선청년전위대 대장으로 있었으나

부친 김좌진의 죽음(고려 공산청년회의 김일성,박상실에게 암살당함)에

대해 알게 된 후

 이를 탈퇴하고 우익으로 전향하여 반탁운동등 좌우대립에서 투쟁하였다.

한국전쟁에는 대한 학도의용군 등 전선에 참전하였고 노동운동에도 투신하여

노동운동가로서도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 제3대 국회, 대한민국 제6대 국회등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이승만정권,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비판하며

반독재등 민주화 운동에도 투쟁하였다.

6대 국회의원에 당선 직후 한국 독립당 내란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한국 비료 주식회사가 사카린을 밀수하여(사카린 밀수사건) 국회에서 삼성 이병철과과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며 국무위원등에게 오물을 투척하였다.(국회오물 투척사건)

경기도 수원 신민당후보로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에서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전깃불 관련 발언이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으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에는 유신 벽보를 뜯는 등 비판해오다 

1972년 11월 19일 사람을 만나러 나간다며 나간 뒤

어딘가에서 쓰러져 의식 불명상태로 가망 없는 퇴원 직후

11월 21일오전 9시 5분에 사망하였다.

대변에도 능하여 연설 등에서 지지를 받기도 했다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1966. 9. 15)

 

삼성그룹 계열사인 한국비료가 일본에서 자재를 수입하면서

 

그 안에 수천만원 어치의 사카린을

 

밀수입해 들여온 사건이 1966년 9월15일 터졌다.

 

그런데 부산세관은 이를 검찰에 고발하지 않고 추징금만 받고

 

밀수품을 돌려주는 등 사건을 흐지부지했다.

 

국민들은 세관 경찰 등 관련기관의 삼성 비호에 격앙됐다.


일주일 뒤인 6월22일 국회 본회의장. 민주공화당의 이만섭 의원과

 

민중당의 김대중 의원은 삼성의 사주 이병철 씨를 구속해

 

법정최고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이어 한독당의 김두한 의원이 연단에 나섰다.

 

그는 하얀 보자기로 싼 통을 들고와서는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시키는 당신들은 총리나 내각이 아니고 범죄 피고인에 불과하다"고

 

고함을 지른 뒤 "맛을 봐라"며 국무위원석으로 냅다 집어던졌다.

 

통 안에는 파고다공원에서 퍼 온 인분이 담겨있었다.

 

정일권 국무총리 등 국무위원들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인분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의사당은 아수라장이 됐다.

 

코를 찌르는 냄새가 가득했다.

 

 

 


국회 인분투척사건 직후 정일권 내각은 일괄사표를 제출했다.

 

민복기 법무장관, 김정렴 재무장관이 해임되고

 

이병철의 둘째아들 이창희가 구속됐다.

 

삼성은 한비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그러나 정 총리의 사표는 반려돼 6년7개월이라는 최장수 총리기록을 남겼다.

 

김두한은 이 사건 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뒤

 

구속되는 등 이후 불우한 인생을 마쳤다.

 

 


1966년 9월 24일 밤, 구속 수감되고 있는 김두한 의원

 

 

 

 

생생증언 '김두한 국회오물 투척의 진실'

 

 

2002년 말 SBS 드라마 '야인시대'로 다시 드라마에 등장했던 

 

김두한 전의원의 66년 국회오물투척 사건의

전모가 36년만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김 의원의 국회 비서였던

채원기씨(63)가 오랜 침묵을 깨고 스포츠서울에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함으로써 밝혀졌다.

 

현재 건실한 중견기업인 (주)트리닉스 전광판을 경영하는 기업인으로 변신한 채씨의 증언으로 그동안 잘못 알려졌던 역사적 사실과 정치비사들이 고무마덩굴 딸려 나오듯이 줄줄이 나왔다.

새롭게 규명된 역사적 진실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바로 당시 국무위원들에게 뿌려진 인분이 알려진 것처럼

파고다공원에서 퍼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거사 전날 김의원의 집인 서울 신문로 주택 화장실에서

김의원과 채 비서가 코를 막으며 직접 푼 것으로 확인됐다.

 채씨와의 만남은 우연찮게 이뤄졌다.

김두한이 마지막으로 사랑했던 박정인 여사를 취재하면서 그 진위여부를 캐는 과정에서 연락이 닿았다.

흐르는 세월을 거꾸로 돌릴 수 없었을까.

풍운의 꿈을 안고 정치판에 뛰어들었던 20대 청년은 이제 켜켜이 쌓인 세월의 나이테를 감당하지 못한 듯 시원하게 벗겨진 머리의 초로의 신사로 세상에 나왔다.

부리부리한 눈매에서 범상치 않은 인상을 풍긴 채씨는

조리있는 말투로 얘기 보따리를 풀며 기자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36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침묵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온 이유부터 설명했다.

김두한 의원을 평가할 때 '정치인 김두한'에 대한 실체적인 접근은 없고 마냥 주먹쓰던 협객시절의 잔상으로만 비쳐지고 있는 게 가슴 아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그분의 인생에서 짧았지만 가장 드라마틱했던 6대 국회의원시절을 그림자처럼 수행했던 사람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에 비어있거나 왜곡돼 있는 '정치인 김두한'의 올바른 조명을 위해 일종의

역사적 책임감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김두한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했던

66년 9월 22일 국회 오물투척사건은 당시 세간에

큰 반향을 몰고 왔지만 '엄청난 태풍'이었던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에 파묻혀

한갖 해프닝으로 치부된 채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려 안타까움이 들었다고 했다.

 

 

채 비서는 김두한이 65년 용산보궐선거에서 한독당 공천으로 국회에 두번째(54년 3대 민의원 종로에서 당선) 등원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금배지를 달면서도 기거할 집이 없었던 김의원은

당시 청진여관 아랫채 3칸을 빌려 생활하고 있던 중

역량있는 젊은 비서를 뽑기 위해 공고를 냈고 18명의 지원자중

 

이찬오(전 현대자동차 부사장) 서용화(강릉대학교 철학과 교수) 채원기씨 등 3명이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네요.

청진여관 넓은 방에서 가운데 김의원이 그 큰 덩치로 보료에 턱하니 걸터 앉아 요즘으로 말하면 1시간 가량 자유토론을 시켰지요.

이 분 성격이 워낙 급해요.

판단을 내리자마자 '채 동지 서동지 이 동지만 남고

나머지 분들은 다음에 봅시다'하는 거에요.

 김두한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세 사람 가운데 채 비서는 김두한씨와 한 집에 기거하면서

수행비서로 69년 말까지 그의 분신이 돼 격동의 세월을 보냈다.

 구구한 얘기를 뛰어넘어 채 비서로부터 오물투척사건의 진상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거사를 약 1주일 앞두고서부터

김 의원은 이상한 말을 자주 꺼냈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해야 할 때가 됐다

 66년 9월 15일자 경향신문의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 보도를 발단으로 당시 온 나라는 발칵 뒤집혔다.

따라서 이 소리는 정치인으로서 흔히 내뱉는 소리쯤 으로

여겼다는 게 채 비서의 회고다.

그러나 말과 행동이 엇박자로 나가는 법이 없는 김의원은

거사 하루전날인 9월 21일 자신이 속한

국회 건설분과위원회 저녁 회식을 마친 뒤

뜬금없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한정식집 '오진암'에서 회식을 하시면서 오후 9시까지

신문로 자택으로 갈테니 대기하고 있으래요.

이 분이 워낙 호주가라 회식을 하면 끝을 보는 성품인데

이날만큼은 달랐어요.

짚차를 타고 집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는데 9시 땡하자 마자

김의원은 들어왔다.

표정이 평소와는 달랐다.

채 동지 내 말 잘 들어요.

지금 빨리 밖에 나가 한말짜리 사각깡통,신문지,노끈

그리고 약국에서 횟가루를 구해오세요.

 

 

난데없는 지시에 두 눈만 멀뚱거렸지만

이내 백방을 뛰어다니며 지시한 물건을 다 구해왔다.

채 비서는 당시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무슨 꿍꿍이 속이 있겠거니하면서도 정말 궁금했다며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데 김의원은 또다시 집 대문옆에 붙어있는

재래식 화장실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는 깡통으로 두레박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최 동지 궁금하지만 참아요.

우리는 역사를 새롭게 쓰는 일에 나선 거니까요.

한말들이 통에 약 반말쯤 똥을 채우고 냄새를 풍기지 않기 위해

횟가루로 주위를 막고 신문을 덮고 노끈으로

통을 묶는 일까지 김 의원이 꼼꼼히 지시를 내렸다.

그만큼 그는 치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김 의원으로부터 채 동지 내일 중대한 역사를 쓰게 돼니

나만 믿고 따르십시오라는 말을 듣고

각자 방으로 헤어져 잠을 청했다.

 

 

결국 오물은 33인의 독립열사의 얼이 숨쉬는 파고다 공원에서 퍼온 것이 아니라

 김의원의 서울 신문로 자택에서 퍼 온 것이 최초로 확인된 셈이다.

오물투척사건은 치밀한 계획보다 당시 어지러운 시국상황에서

김의원의 머릿속에서 돌발적으로 터져 나왔다는 게 거의 확실했다.

당시 항간에는 김 의원의 오물투척 사건의 배후에는 공화당 내 주류와

비주류의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김종필 공화당의장의

사주로 터져 나왔다는 음모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채 비서는 이같은 소문에 대해 쐐기를 박았다.

저는 그 당시 잠 자는 시간을 빼고 늘상 김의원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만약 특정 정파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면

거사 전 접촉과정이 있었을 것이 아니겠느냐면서

이같은 음모설을 일축했다.

 김 의원은 9월 22일 국회 정기국회 이틀째 본회의를 D-데이로 잡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특정재벌 밀수사건'이라는 안건으로 삼성계열의 한국비료공장

사카린 밀수사건을 다루는 국회에서 발언권을 얻기 위해

무척 노력했음이 채 비서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대정부 질의에서 발언권을 반드시 따내라는

김의원의 지시를 받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지요.

 

 

사카린 밀수 사건이 워낙 큰 사안이라

대 정부 질의 첫날 무소속인 김의원에게는

여야가 발언권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따냈습니다.

김의원은 한독당 후보로 국회에 등원했지만

원내교섭단체 요건을 갖추지 못해 무소속으로 활동했었다.

거사 아침에도 채 비서는 발언권 확보를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소선규 국회부의장의 자택인 서울 원남동 집을 방문해 다시 한번 다짐을 받아냈다.

 22일 오전 9시 신문로 집을 출발할 때 김 의원은

채 비서에게 오물통을 들고 국회 정문을 들어설 때 경위(국회 경비원)가

의심을 품지 않게 절대 무거운 표정을 짖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도 했다.

무사히 정문을 통과해 김의원에게 오물통을 전달한 채 비서는 2층 방청석으로 올라갔고

김의원은 헌정사에 영원히 기록될 거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일이 터지자 김 의원과 채비서는 취재진들을 따돌리며 부리나케

무교동 다동탕에 들러 목욕을 하고 을지로 4가의

서래옥에서 냉면을 먹은 뒤 세검정 자하문호텔로 몸을 피했다.

 웨이터에게 입막음을 단단히 시키고 라디오를 빌려 사건추이와

매스컴의 동향에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웨이터도 경찰에 불려가 치도곤을 당했다더군요.

 역사적인 사실로 굳어졌던 탑골공원 인분 얘기는

다음날 기자회견에서 기지넘친(?) 김 의원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자하문호텔에서 하루를 묵은 김 의원과 채비서는

이튿날 신문로 자택으로 돌아갔다.

50여명의 취재진이 물려 들어 김의원의 집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여기서 김 의원은 정치인 답게 사건의 파장을 극대화하고 명분을 쌓기 위해

전날 밤 33인의 독립열사들의 혼이 서린 탑골공원에 담을 타넘고

들어가 공중변소에서 인분을 퍼 왔다고 말해 각 신문에 보도됐다.

김 의원은 기자회견을 마친 뒤 1962년 군사혁명정부가

아버지 김좌진 장군에게 추서한 건국공로훈장과 휘장을 달고

국회까지 개선장군처럼 걸어가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김택수 당시 건설위원장실에서 경위를 설명하던

김 의원은 곧바로 남대문경찰서로 연행된 뒤 자신이 별장으로 지칭한

서대문구치소에 구속 수감돼 백일동안 영어의 몸이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 의원은 국회의원에서 제명되는 아픔을 겪는다.


 채 비서는 오물투척사건의 감춰져 있던 스토리도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 분이 그래도 인간미가 넘쳤던 정치인이었나 봐요.

똥을 뒤집어썼던 정일권 총리를 비롯해 장기영 부총리 전예용 건설부장관이

비서를 시켜 돈봉투를 보내왔으니까요.

국회 오물투척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사람 가운데 김택수 건설분과위원장을 뺄 수 없다.

연행당시 김 위원장은 김 의원에게 사식비로 사용하라고 10만원을 건넸는데

이게 나중에 수표 추적을 통해 김택수씨의 형이었던

경남모직 회장 김한수씨로부터 흘러나왔다는 사실이

중앙정보부에 적발돼 구설수에 올랐다.

또 하나 해프닝이 벌어졌어요.

교도소를 제 집 안방처럼 들낙날락했던

김의원은 연행 당시 저에게 2만원을 달라 했는데

이유가 뭔지 금방 드러났어요.

편하게 생활하려고 교도관들에게 뇌물로 줄 요량이었지요.

중정의 내사때 김의원에게 돈을 받은 교도관들도 수표 추적에 모두 걸려

내 기억으로는 7명이 모두 옷을 벗었지요.

나중에 김의원이 감옥에서 나와 이들을 모두 취직시켜준 걸로 알아요.

 

 

기억을 더듬은 채 비서는 병 보석으로 김의원이 석방된 이유도 자세히 설명했다.

평소 혈압이 다소 높았던 김의원은 교도관을 통해 구한 소금을 시도 때도 없이 복용했다.

자연히 혈압이 올라 최고 혈압이 수시로 250을 넘게 돼

그해 12월 창살밖 세상의 상쾌한 공기를 접하게 됐다고 전해줬다.

 무소불위의 중앙정보부 김형욱 부장은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과 함께

이 사건을 공화당 주류와 당시 실세였던

김종필 당의장을 제거할 목적으로 음해공작을 벌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채 비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저도 약 1주일간 중앙정보부와 치안본부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사건 배후를 김종필씨로 지목하고 짜맞추려고 갖은 획책을 벌였지요.

나중에 김의원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긴데 김의원은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자 마자 중정 부장실에 끌려가

권총으로 위협하는 김형욱씨로부터

김종필이 사주한 사실을 자백하라고 강요받았답니다.

이같은 사실은 이만섭 당시 공화당 의원이

박정희 대통령의 저녁식사를 초대받은 자리에서 김형욱 부장과

이후락 비서실장이 박대통령에게 오물투척의 배후에 김종필씨가

있다고 거짓보고를 올리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회고록에서 증언했다.

 김종필씨와 김 의원은 사실 인간적으로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고 채 비서는 증언했다.

  이 부분은 처음으로 공개하는 사항인데

그동안 오해를 불러 일으킬까봐 입을 다물고 있었다고

 잔뜩 뜸을 들인 채 비서는 신문로 김 의원의 집을 어떻게 마련할 줄 모르시지요.

65년 국회의원이 되자 마자 집이 없는 김의원의 처지를 어떻게 알았는지

김종필씨가 비서관인 김진봉씨를 시켜 100만원을 보내와 신문로에 전세를 얻게 됐습니다.

그러나 오물투척과 김종필씨와의 관련성은 결코 없었다고 지금도 확신합니다고 말했다.

 채 비서는 지금도 김의원을 우국충정으로 똘똘 뭉친 인간미 넘친 정치인으로 기억했다.

그는 국회의원중에서 돈푼께나 만질 수 있는 요직(?)인

건설분과위원회에 속해있었으면서도

기업으로부터 들어온 돈을 개인적으로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가난한 지역구민들과 지인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뿌리고 다니면서도

 제 집에는 쌀이 떨어져 끼니 걱정을 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정책과 이념을 뛰어 넘어 항상 약자의 권익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요.

제가 곁에서 지켜봐도 그랬으니까요.

김두한 하면 흔히 가방끈이 짧은 주먹대장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큰 오산이예요.

그는 정치계에서도 나름대로 뚜렷하면서도

올곳은 철학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는 시대를 잘못 만났다.

돈과 조직이 없는 정치인으로서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김 의원도 자신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았다.

오물투척사건도 따지고 보면 냉철한 자기분석으로

자신의 미래를 예측한 마지막 정치적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채 비서의 생각도 똑같았다.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는 독불장군이었던 그 분은 난세에는 빛을 발할 인물이었지만

 516 혁명이후 급속히 조직화된 정치세계에서는

활동할 토양과 공간이 맞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오물투척 사건은 정치인 김두한의 절정이자

퇴장을 의미하는 신호탄이었다고 정리했다.

채 비서는 마지막으로 뼈 있는 얘기를 던졌다.

잊을 만 하면 김의원이 신드롬처럼 떠오르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부정부패가 판 치는 현실에 대한 국민들의 울분이

역사에서 사라진 김두한이라는 인물을 통해 분출되는 게 아닐까요.

마치 난세에 민초들이 갈망하는 백마탄 흑기사랄까 뭐 그런 거 말입니다.

그 사실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김의원은 국민들로부터 인정받은 정치인입니다.

 의송(義松) 김두한의 폄하됐던 정치이력은 새롭게 조명받아야 한다는 게

국회오물투척 사건을 낱낱이 밝힌 채 비서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정치적 몽상가였지만

그의 기개는 자신의 호처럼 의에 죽고 의에 사는 의협심 강한

늘 푸른 소나무 다웠다고 36년만에

역사의 증언대에 선 채 비서는 확신하고 있었다.

 

 

 

 

고 김두한의원의 장남 김경민씨

 

 

 

 

고 김두한 의원과 장녀 김을동

 

 

 

 

탤런트 김을동씨

 

 

 

김을동씨의 가족

 



photo from : 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