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 & 병기

스탈린그라드 소련군의 반격[Stalingrad Red Army counterattack]

슈트름게슈쯔 2012. 1. 10. 14:21

 

 

레닌그라드의 고립화된 민가에서 기관총이 발사되는 독일군의 거점에 PPsh-41 기관단총으로 사격을 가하는 소련군

 

- 1942년 12월 16일

 

 

 

스탈린그라드 광장 주위에 숨어있을 독일군 소탕작전에 투입된 소련군의 T-34/76 전차 - 1943년 1월

 

 

 

스탈린그라드의 건물 옥상에서 독일군에 사격을 가하는 흰색의 동계 위장복을 입은 소련군 - 1943년 1월

 

 

 

스탈린그라드 외곽의 부서진 건물 잔해 더미 위에서 독일군과 교전하는 소련군 - 1943년 초기

 

 

 

파괴된 스탈린그라드의 거리에서 MP-40 기관단총을 들고 소련군의 동향을 살피는 독일군 - 1943년 초기

 

 

 

눈 덮힌 전쟁터 어딘가에 있을 독일군의 거점을 미리 파악한후 선제 공격으로 포위망을 좁혀 들어 가는 위장복을 입은 소련군대

 

 - 1943년 3월 3일

 

 

 

독일 제6군과 주축국 루마니아 군대를 포위하기 위하여 눈덮힌 언덕을 가로질러 공격해 들어가는 소련군 - 1943년 초기

 

붉은 소련군대는 결국 퇴로를 차단 당한 30만명의 독일군대를 좁은 주머니 형태로 포위하게 된다.

 

 

 

기아에 허덕이며 전의를 상실한채 탈진되어 소련군에게 포로가 된 독일군 병사의 동상에 걸린 처참한 몰골 - 1943년 2월

 

소련군의 포위망에 둘러싸여 기아에 허덕이며 치열한 전투를 벌여 오다 결국 항복해 살아남은 병력은 20여 만명이었다.

이 방대한 병력은 포로가 되어 소련을 침공하여 살상행위를 가한 전쟁 범죄의 처벌에 따라 소련 영토내 곳곳의

파괴된 건설 현장의 노동 인력으로 동원되게 된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난후 잔존 독일군의 95%는 병사해 버리고

 1970년도 중반에 독일 본국으로 살아남아 귀환되어 돌아갔었던 독일군의 수는 500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소련군에 항복한 독일 제6군 파울루스 원수 - 1943년 3월 1일

 

그는 끝까지 목숨을 걸고 소련군대에 투쟁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소련군에 항복했다.

소련의 포로가 된 그는 훗날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도 나치 정권을 비판했다. 

 

 

 

쿠르스크 전투시 소련군 T-34/76 전차가 지나가는 참호속에 엄폐해 있는 붉은군대 병사들 - 1943년

 

 

 

스탈린그라드 남서쪽 도로의 길가에 널려져 있는 독일군의 시체 - 1943년4월 14일

 

 

 

누워서 적의 항공기에 단체로 사격을 가하는 소련군 저격병들 - 1943년 6월

 

 

 

1943년 7월 중순 쿠르스크 남쪽 지역 오률에 등장한 독일 타이거 -1 전차

 

독일군 모젤 원수는 쿠르스크 지역에 5000대 이상 투입된 소련  기갑부대의 전차들을 대응하기 위하여

1943년 7월부터 8월까지 3000대 이상의 전차를 배치시킨다.

이로써 소련의 쿠르스크는 역사상 가장 큰 전차전이 벌어지게 된다.

 

  

 

쿠르스크 평원에 집결된 독일군의 방대한 기갑차량 - 1943년 7월 28일

 

독일의 치타델 작전에 의해 쿠르스크 평원에 집결시킨 방대한 수효의 전차들은

그들의 목표에는 미흡한 숫자였지만 소련군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가하기 위하여 집중되었다.

소련은 연합군의 울트라 정보를 얻기 몇시간전

영국 런던의 브래칠리 파크 독일 암호 해독기관에 심어 놓은 영국인 스파이에 의해

독일군의 이니그마 암호에 따른 실시간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독일의 총공세를 대비하여 몇개월 동안 대전차호등 대규모 방어준비를 착실히 구축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독소전쟁의 마지막 분깃점으로 작용할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 쿠르스크 전투에 모든 희망을 걸고 대량의 전차 병력을 집중시켰다.

쿠르스크 전투 첫날 소련군은 암호 해독으로 제공받아 준비하고 있던 상황에서도

독일군의 공격 속도는 너무나 빨라 첫 대응 전투는 주춤거렸다.

하지만 소련군의 방어 전투 계획을 모르던 독일 모젤 원수의

기갑부대는 여러가지 상황으로 인하여 전투 초기부터

제대로 치타델 작전의 성과를 기대할수 없는 상황에 봉착되어 버렸다.

결국 독일군의 선제공격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던 소련군의 방어 작전에 따라

독일군은 소련군의 방어 작전계획에 휘말려 전쟁 물자를 조기에  일찍 소진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희대의 대전차전이었던 쿠르스크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독일군은 사실상 소련군의 공격애 대비하여 전쟁 말기까지

독일 본토 방어를 펼쳐 나갈 기갑부대의 전차 병력을 거의 90% 이상

소진시켜 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쿠르스크 전투중 타이거-1 전차 앞으로 진격하는 독일군 - 1943년 6월 ~7월

 

 

 

시커먼 연기의 엄호하에 독일 전차 사냥에 나서는 소련군 대전차총 소대 병사들 - 1943년 7월 23일

 

 

 

스탈린그라드 남서쪽 지역에 모아진 파괴되어 노획된 독일 전차들 - 1943년 4월 14일

 

 

 

독일군 포로들에게 담배를 나눠 주는 소련군대위 - 1943년 7월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이후 항공기에서 찍은 시가지의 폐허화된 모습 - 1943년 말기

 

인류 최대 최악의 잔인하고도 치열했던 전투였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이 도시의 건축물들은 6개월 만에 거의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photo from : Atlan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