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 극장

만다라 - 1981년[안성기,전무송,방희]

슈트름게슈쯔 2012. 5. 6. 11:49

 

 

 

만다라

 

개봉: 1981년 9월12일 

 

감독 : 임권택

 

출연 : 안성기,전무송,방희

 

 

 

 

 

 

 

 

 

 

구도승인 법운(안성기 분)은 우연히 버스에서 지산 스님(전무송 분)을 만난다.

지산과 법운은 옷깃을 스치듯 만나서 며칠 간의 생활을 같이 하지만

지산의 항시 술에 찌든 모습과 타락한 행동에 실망한 법운은 그를 떠나고 만다.

그러나 운명처럼 그들은 어느 절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법운은

지산의 자유분방한 의식과 거침이 없는 행동에 차츰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다.

 심산 암자에서 참선하던 두 스님은 무당이 모셔놓은 사이비 절의

부처 상에 점안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행사를 주관해 준다.

 

여기에서 지산 스님은 부처는 삼라만상에 존재하며 비록 정식 사찰이 아닌

사이비 절이라도 부처님의 손길이 똑같이 미친다고 설법한다.

며칠 간의 양식을 얻어 암자로 돌아오는 길에 지산 스님은 만취하여 동사하고

 법운 스님은 암자와 함께 지산 스님을 화장한다.

지산 스님의 죽음은 법운 스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어렴풋이 나마 지산 스님이 그렇게도 술과 파격적인 기행으로 스스로를 자학하며 얻으려 했던

구도의 길이 무엇이었던가를 깨닫게 된다.

지산을 만났던 길처럼 끝없이 뻗은 길을 법운은 홀로 걸어간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풀기 위해 출가한 후 6년 동안 구도의 길을 가고 있는

젊은 스님 법운(안성기)은 아직도 깨달음의 실마리를 풀지 못한 채 전국을 전전한다.

어느날 그는 한 버스에서 승적이 없어

곤경에 처한 땡초승 지산(전무송)을 돕게 되고

우연찮게 동행한다.

소주병이 떨어질 날 없고 심지어 자살 약까지 준비하여 가지고 다니는 지산은

어쩌면 달관한 부처 같기도 하고 또 어쩌면 세속의 병든 잡인 같기도 하다.

법운은 처음 지산의 기행을 단순히 겉치레의 그것으로만 생각하고 그를 경멸하지만,

점차 그에게서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는다.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던 그들은 마침내 법운의 주선으로

외딴 산중의 작은 암자를 빌어 동거에 들어간다.

그러던 어느날 산 밑에서 술에 취한채 산을 올라오던 지산은 눈덮인 산에서 얼어죽는다.

지산의 시신을 화장하고 법운은 어머니(박정자)를 찾아본다.

그리고 지산이 못 잊어한 옥순을 만난 뒤, 세속의 모든 인연이 덧없음을 재확인하고

청년 법운은 다시 고행의 길을 떠난다.

 

 

 

 

만다라는 "한국종교영화의 걸작이자,

임권택 감독의 가장 아름다운 영화 중의 하나이다.

 

 

 

영화 속, 진흙과 눈이 경계하는 가로수길을 걷는 수묵화와 같은 

두 사람의 롱쇼트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행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이 길은 번뇌와 깨달음, 삶과 죽음, 윤회와 해탈의 경계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 영화의 초반에서 지산의 이미지는 영화 속 법운의 말처럼 

‘옛 고승의 기행을 흉내’내는 인물로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의 이미지에 진정성이 붙어 나간다.

 이 영화의 서사는 지산의 캐릭터에 생명력과 감흥을 불어넣는 정보들을

 시의적절하게 제시해주는 과정이기도 하다. 

"중은 살이 쪄서는 안돼, 살 찔 자격이 없어"와 같은 시대를 증언하는 직접적인 대사와

 그 대사를 하는 인물들을 자연 속에 보듬어가는 간접적이고 안정된 촬영이 

묘한 대비를 이루는, 뛰어난 연출과 촬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만다라는 소설가 김성동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하였다.

제작사 화천공사의 소개로 원작을 접하게 된 임권택은  곧바로 이 원작에 매료되어

감독 본인의 표현을 빌면 "내 영화 일생에서 가장 적극성을" 보였던 작품이라 한다.

만다라의 제작을 전후하여 촬영감독 정일성은 직장암에 걸려 심각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임권택 감독은 이러한 정일성 촬영감독을 위로하며, 그

의 몸이 낫기를 기다렸고 정일성은  수술 후 몸이 완전치 않은 상태에서

 만다라를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종상(20회) 우수작품상 감독상 남우조연상(전무송)편집상 조명상 신인남우상(전무송)

한국연극영화예술상(18회) 남자연기상(안성기) 시나리오상(이상현,송길한)촬영상

영평상(2회) 남자연기상(전무송)촬영상(정일성)


 2013년 한국 영화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은 2013년 4월 2일 YTN 이슈&피플에 출연해 

임권택 영화 박물관'을 소개하고 영화 인생 52년의 뒷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는 자기가 연출한 101편의 작품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고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만다라'라고 밝혔


 임권택(1936 ~ )그는 한국 영화계에서 소도구 조수, 조명 조수 등을 거쳐 

충무로의 전통적 도제시스템 속에서 감독으로 성장했다.

 1962년 만주독립군을 다룬 액션영화 [두만강아 잘있거라]로 데뷔했다. 

70년대 작품 [잡초][짝코][족보]이후 80년대 들어오면서

[길소뜸][티켓][씨받이][만다라]등을 통해 서서히 '작가'로 인정받았고, 

89년 [아제아제바라아제]부터 이태원 사장을 만나

 태흥영화사에서 계속 작업을 하며 안정된 제작을 하게 되었다.

[장군의 아들]씨리즈로 흥행감독이 되었으며, 

1993년 당시 한국영화 사상 최고 흥행작인 [서편제]를 통해 ‘국민감독’이 됐다. 

한국 고유의 정서와 소재를 그려내던 그는 

수많은 국내외 수상경력을 갖기 시작했고, 해외에서 수많은 회고전을 가졌다.

 2002년 칸 영화제에서는 [취화선]으로 감독상을 수상했으며

2005년 베를린 영화제에서는 그간 영화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경현 외 엮음, 김희진 옮김,임권택 민족영화 만들기』(한울, 2004)
김수남, 『한국영화감독론, 2 : 해방 뒤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영화작가 14인』 (지식산업사, 2003)
김정룡, 『우리 영화의 미학 : 한국 영화 감독론』(문학과지성사, 1997)
사토 다다오 저 ; 고재운 역, 한국영화와 임권택(한국학술정보, 2000)
임권택 편, 『서편제 영화이야기』(하늘, 1993)
임권택/정성일, 자료정리 이지은,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 1-2』 (현실문화연구 2003)
조재홍, "[만다라]의 형식주의 분석"(정성일 편집, 한국영화연구 I : 임권택, 판영화사, 1987)
이종학, "만다라>의 정신분석적 접근"(정성일 편집, 한국영화연구 I : 임권택, 판영화사, 1987)
김규찬, 「영화의 결말구조에 관한 연구 : 임권택 영화를 중심으로」,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석사학위 논문, 1998

 

 

 

 

 

만다라 작품속의 명대사

 

 

구도와 해탈은 무엇인가?

대가 감독의 길을 걸어온 임권택 감독과, 한국 영화의 대들보 안성기,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연기 대가 전무송.

이 세 남자가 만든 한국 영화사 최고의 걸작이다.

 

김성동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며, 20회 대종상 작품, 감독, 각색, 편집, 조명상 수상.

제18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남자연기(안성기), 시나리오, 촬영상 수상,

 제2회 영평상 남자연기상(전무송), 촬영상 등을 수상했다.

 

 

 

지산: 무슨 염치로 살이 찐단 말인가?

 

중은 살이 쪄서는 안돼.

진실로 중이 되고자 한다면 결코 살이 찔 수 없는 게야...

법운: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술 마시는 이유. 중이 술 마시는 이유를.

 

지산: 생각보다 그대는 통속적이군.

이유는 없다. 이 사바 세계에서 이유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만 존재할 뿐이야. 존재. 던져진 존재. 타인의 뜻으로 말이야.

하긴 참말 이유가 있지.

하지만 얘기해준다고 해도 그대가 알 수 있을까?

 

법운: 상당히 오만하시군요. 나도 나름대로 몸부림쳐 왔습니다.

 6 년, 6 년을 말입니다.

지산: 6 년이란 긴 세월이야.

싯타르타는 6년 고뇌 끝에 부처가 됐어.

그대는 6 년 몸부림 끝에 얻은 게 뭐야?

 

지암선사: 이 진리는 석가세존께서 먼저 모범을 보이셨고,

그 뒤로 무수한 고승대덕이 줄을 이어 깨우치신 것이다.

 여기 입구는 좁지마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깊고 넓어지는 병 하나가 있어.

이 병 안에 조그마한 새 하나를 넣고 키웠었지.

 이제 그만 새를 꺼내야겠는데, 그동안 새가 너무 커서 나오지를 않는 거야.

 자, 어떻게 하며는 이 새를 꺼낼 수 있겠는가?

 

법운: 아니, 뭘 하는 겁니까, 스님?

지산: 부처를 만들고 있어. 한번 볼 테야? 다 되어 가니까.

법운: 아니 부처 얼굴이 뭐 이래요?

 

 

지산: 우리 나라의 사찰에 모셔 있는 불상은 하나같이 둥글고 원만한 얼굴을 하고,

빙그레 미소 짓고 있지. 그러나 침묵하고 있지. 천 년을 두고 말이야.

사람들은 흔히 그러더군.

 부처의 그 미소를 두고 신비하다느니, 불가사의하다느니,

바라만 보아도 온갖 번뇌가 사라져 버린다네.

 

흥, 과연 그럴까?

부처가 신이 아니고 인간일진대,

그렇게 태연자약한 얼굴로 요지부동 침묵만 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시간에도 숱한 중생들이 배가 고파서,

병 들어서, 옥에 갇혀서, 권세와 돈 가진 자들에게 억눌려서 신음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빙그레 웃고만 있을 수 있을까? 적어도 석가가 인간이었고,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에 나온 것이라면, 하나쯤은 그리워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그래서 팔만 사천 번뇌에 싸여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의 불상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난 참말 부처의 얼굴을 만들어보고 싶은 거야.

그래서 난 이렇게 나무토막을 깎고 또 깎는 거지.

 그것은 내 부패한 피와 비열한 뼈, 그리고 추악한 살덩어리를 깎아내는 작업이기도 해.

 그리고 번뇌를 보리로 바꾸는, 아니 합일시키는 작업이기도 하고.

 

 

지산: 그래, 그대는 지암선사가 말씀하신 병 속의 새를 꺼냈나?

법운: 스님은 어떻습니까? 꺼낼 수 있겠어요?

지산: 나? 나한텐 그런 절차조차 필요 없어.

그놈의 병을 송두리째 깨어 버렸으니까.

법운: 병을 깨요?

지산: 그렇지. 새가 마음이라면, 새가 갇힌 병은 현실이고,

욕망이고, 계율이지. 난 그걸 깨버렸어. 왕창.

법운: 흥, 그래서 술이고 파계입니까?

 

지산: 마음이 어디 따로 있나? 육체가 마음이고 마음이 육체야.

법운: 스님 곁에 있다간, 나도 술을 배우겠군요.

 

지산: 남자와 여자가 배꼽을 맞추고 이층이 된다는 것은,

 

 존재와 세계가 분리의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라는

 

저 불교에서 말하는 불이의 법칙과 합일되는 것이었어.

세계는 서로 화해하고, 존재는  보편적인 인식의 공간을 획득하게 되며,

그리하여 갈등과 투쟁은 무용한 것이 되는 거지.

 그때 나는 분명히 쾌감을 느꼈어.

그것은 육체를 정신의 하위 개념으로 두었던 내 인식의 오류가 붕괴되는 데서 오는 쾌감이었으며,

아울러 수컷으로서 보편성을 획득하고 확인하는 데서 오는 쾌감이기도 했지.

그러나 이 세상에서 이층처럼 허망한 사업이 또 있을까?

쾌감은 순간이었으며, 존재와 세계는 다시 평행선이 되고 마는 것이었어.

 

법운: 결국 경계와의 싸움에 지신 건가요?

지산: 흥, 끈질기게 괴롭히는 본능의 욕구에 순응함으로써

 본능이 주는 번뇌로부터 벗어나보겠다고 그놈의 본능에 접근했다가,

 오히려 더 큰 번뇌에 덜미를 잡힌 셈이지.

 이층이란 그런 것이야. 죽고 싶은 허망감에 치를 떨며 방바닥에 이마를 박았다가도,

곧 그 허망감은 사라지고 다시 또 이층의 욕망에 멱살을 잡히게 되는 거야.

그리곤 다시 허망, 그리고 또 욕망. 그래서 중생의 윤회는 겁으로 이어지는 건가?

여관방을 전전하며 그 치사한 윤회를 되풀이하기 일주일 되는 날,

허망의 절정에서 비로소 나는 내 신분이 비구승이라는 걸 깨달았지.

 

 

법운: 이렇게 스님을 방황하게 하는 본질적인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군요.

지산: 방황한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에게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끌어안고 버틸만한 진실의 기둥도 없고 말이야.

하지만 이것도 정확한 대답이 될 수가 없지.

나도 몰라. 나도 몰라. 내가 왜 이렇게 미친 개처럼 방황하는 거야.

무소유... 부처는 행복의 조건을 무소유라고 하셨는데,

한 벌의 누더기와 한 벌의 바리때밖에 가진 것이 없는 난 왜 이다지도 괴로운지.

법운: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는 것은 다 버렸다는 것이고,

다 버렸다는 것은 더 큰 것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의 역설이 아닐까요?

지산: 그런 셈인가? 더 큰 것, 더 큰 것을 찾아 헤매는 건가?

 하지만 더 큰 것은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나는 왜 이렇게 삶이 고통스러운가?

 

영주: 세상에 어쩜 그럴 수가. 병진이 그런 사람이었어?

법운: 내 이름은 병진이가 아니고 법운이야.

 

영주: 그렇게 고생 고생 하며 찾아왔는데도, 이제 보니 날 하나의 장애물로 보고 있군.

법운: 승려 이전에 한 사람의 남자로서, 더구나 피가 끓는 젊은 남자로서,

난들 어찌 영주가 그립지 않겠어?

 영주야말로 나에겐 가장 큰 번뇌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진실한 마음에서 출가한 승려라면 그런 번뇌쯤은 신심으로 극복해야 해.

 

 

영주: 그건 위선이야. 비겁한 회피고. 병진인 현실도피자야.

법운: 수도생활은 도피가 아니야. 오히려 치열한 도전의 결전장이지.

영주: 무엇에 대한 도전?

법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지. 인간의 불행은 어디서 비롯되며,

 그 불행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떤 것인가를 탐구하는 것이야.

영주: 그래서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현실을 외면한 채 산사에 숨어있는 것이 병진이의 유토피아였어?

법운: 사찰은 영주가 생각하는 것처럼 인생의 패배자가 모여 무위도식하는 곳이 아니야.

 자기를 제도하고 중생을 제도해보려는, 대원력을 세우고 피나는 수도를 하는 도장이야.

 

 

 

수관: 어리석은 짓이었어.

법운: 어리석다니. 손가락 공양을 후회한다는 말인가?

 나는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수관의 신심을 부러워하고 무서워하는데?

수관: 불교는 어디까지나 자력신앙 아닌가?

아니야, 신앙이란 말도 맞지를 않아. 내가 나를 뚫고 나가야하니 말이야.

 헌데도 난 불보살의 힘을 빌리려고 했어.

손가락이 타는 고통을 견디면서,

"부처님, 보살님, 업이 두텁고 미련한 이 중생을 도와주소서.

혼자서 가기에는 너무 힘든 길이옵니다."

허허허, 이렇게 빌었으니, 이게 얼마나 빗나가는 얘긴가.

아들 딸 부 있게 해달라고 떡살 바치는 무식한 노파들과 뭐가 다르겠어?

 

법운: 지금 와서 그런 자학을 하면 곤란하지.

 문제는 신심이야.

수관 같은 신심이면 반드시 성불하리라 믿어.

 

관: 글쎄.

법운: 그럼, 참선해제 법문때 주장자를 뺏은 의미는 뭐였나?

 난 도대체 수관한테는 기가 죽어서...

수관: 아무 것도 아냐. 단지 침묵과 순종을 깨뜨려보고 싶을 뿐이었어.

 진짜 도리를 알아서 그랬던 건 아냐.

난 조실스님의 답변도 미리 예상하고 있었어.

백 년전 천 년전 고승들이 그때 그때 방편으로 뱉은 언어,

구 구전된 사어들을 인용하고 있는 거야.

그것도 어려운 한문으로. 옳게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로.

 

지산: 꼭 공동묘지를 지나는 기분이구만.

법운: 허긴 중생에겐 삼계가 다 무덤이죠.

지산: 태어나지를 말아라. 죽기가 괴롭느니. 죽지를 말아라.

 태어나기가 괴롭느니... 허허, 원효대사는 니힐리스트였어.

 

법운: 그 말은 생사윤회를 벗어나자는 말일 텐데요.

지산: 마찬가지야. 깨달음을 얻어서 생사를 벗어난다 해도...

흔히들 해탈이라고 말하지. 하지만 해탈로써 모든 게 끝나는 것일까?

또 새로운 윤회의 시작일 뿐이야.

 

 

법운: 스님은 마치 견성한 사람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지산: 견성은 쉬운 일이지. 실행이 어려울 뿐.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최초로 허무에 부딪혔을 때

초극하기 위한 방법으로 택한 게 입산 아닌가.

그래서 공부했다, 허무를 뛰어넘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란 말이야.

뛰어넘었는데 보니까 더 큰 허무가 기다리고 있더라 이거야.

 

허허, 또 기다리고 있어요. 그야말로 허무의 첩첩산중이야.

 

법운: 결국은 좌절인가요? 좌절의 슬픔인가요?

지산: 허무를 모조리 극복해버린 후에 꼭대기에 앉아계신 분이 바로 부처야.

하지만 부처가 되고난 후에 오는 참말 커다란 허무를

어찌 견딜까 생각을 하면 겁이 난단 말이야.

 

허허허허... 이건 지옥에 떨어질 소린가?

관세음보살... 차라리 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래서 구원을 신의 은총과 섭리에 얼마쯤 부담시키는 종교였다면

이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으련만.

 

 

 

 

지산: 본래 점안이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불상의 눈에 점을 찍는다는 말이오.

점을 찍는다는 것은 혼을 집어넣는다는 말이오.

그리하여 나무나 돌로 깎아 만든 형상에 생명을 집어넣어서 비로소 부처님으로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은 법력 수승한 도인만이 할 수 있는 불사인 것입니다.

법력도 수행도 없는 일개 야승에 불과한 소승이 오늘 이 자리에 모신 불상에 점안을 했습니다.

돈 주고 사온 돌맹이의 눈에 땡땡이 중놈이 점을 찍었다고 해서 돌덩어리가 부처 되겠습니까?

하지만 돌덩어리가 아니고 똥덩어리라면 또 어떻습니까?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절하는 대상물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지극히 사무치는 마음이 가 닿았을 때, 그때 돌맹이도 나무토막도,

심지어는 똥덩어리까지도 다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의 공덕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이며 종교의 목적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 없는 물체에 점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두운 마음의 눈에 점을 찍어 밝은 등불을 켜야 하는 것입니다.

복 달라고 비는 것이 불교가 아닙니다.

마음을 깨쳐 스스로 부처가 되는 것이 불교입니다...

 빌어먹을... 내 눈의 점안은 누가 해주나?

 

법운모: 무거울 텐데 좀 벗어.

법운: 무겁지 않아요. 무거운 건 업이죠.

 






photo from : 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