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군이 설치한 프랑스 북부 해안의 바리케이트
프랑스 칼레 해안에 설치될 철제 바리케이트의 콘크리트 지지대 - 1944년 3월
프랑스 북부 칼레 해안의 연합군 상륙 저지용 대전차 바리케이트 - 1944년 3월
해안 벙커를 순시하는 롬멜 원수 - 1943년 12월
독일군의 대서양의 벽 벙커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하여 노르망디 해안선을 관찰하는 독일군 - 1944년
해안 포대를 시찰하는 롬멜 원수 - 1944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프랑스 칼레 해안에 설치 했던 대서양의 벽 해안 포대
해안포의 로터리식 포탄 공급기 케이스에 380mm 포탄을 이동시키는 독일군 - 1944년
연합군의 유럽 본토 상륙을 염두에 두고 독일이 구상했던 대서양의 벽(Atlantic Wall]
대서양의 벽이란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를 정복했던 독일이
영국을 포함한 연합군의 유럽 대륙 반격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프랑스 노르망디의 해안지대에 콘크리트 방호진지와 해안포대 그리고 해안 바리케이트및
기관총 토치카등의 방어 시설과 벙커등의 부대 시설을 구축시킨 구조물과 병력을 지칭한다.
1943년 11월, 히틀러는 연합군의 프랑스 침공을 대비하여 에르빈 롬멜 육군원수를
프랑스 북부의 방어를 담당해야 하는 B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경험에서 롬멜은 연합군의 침공을 막을 방법은 오직 하나,
적이 아직 바다에 있을 때 이들을 수장시킨다는 것으로
해안에 접근하기 전에 철저히 섬멸한다는 원칙으로 기갑부대를
해안가에 배치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롬멜의 생각은 B군단보다 위에 있던 서부방면군 총사령관인
게르트 폰 룬드슈테드 육군원수와는 대립했다.
룬드슈테드는 내륙으로 연합군을 끌어들여 연합군의 교두보가
미숙한 상태를 노려 섬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대응한 롬멜 원수의 구상은 해변 격멸 작전이었고
룬트슈테트 원수의 구상은 내륙으로 끌어들이기 작전이었다.
이러한 두 독일 원수의 대립은 서로의 경험에서 사실 비롯된 것이었다.
롬멜은 북아프리카에서 제공권을 빼앗긴 불리한 상황하에서
전투경험에서 연합군의 전술사상을 배웠지만
룬드슈테드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독일공군의 제공권 확보 하에
동부전선에서 확정정책의 <이기는 싸움>에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이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함께 하인츠 구데리안이 창시한
육공일체의 동시공격인 전격전의 완벽주의자였던
룬드슈테드가 연합군의 공군력을 무시했다는 점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 항공전 이후 내리막길을 걷던 당시 독일공군의 능력을 고려하면
영국군과 미군의 공군력 증강에 추이를 살펴야 했다.
이는 룬드슈테드가 거듭된 승전의 경험에 의해 독일의 공군력을 과신하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롬멜은 독일의 항공전력에는 거품이 많다고 생각했던 입장이였다.
독일공군은 1944년 6월 당시, 프랑스 북부연안에 전체 183기의 기체만을 보유했다.
그런데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는
이 중 160기를 프랑스 북부연안지대에서 빼 내기로 결정했다.
이는 독일 본토로의 공습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는데
남겨진 소수의 전투기를 연일 공습이 심한
프랑스 북부해안에서 소모시킬 수 없다는 수뇌부의 결정 탓이었다.
그리고 6월의 영국 해협은 바다가 거칠어지기 때문에
연합군이 상륙하기엔 무리라고 여겼던 점도 뒷받침했고
함재기를 동원할수 있는 해군력도 소수만이 프랑스 연안에 있었고
잠수함 외엔 유효한 함정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 덕분에 6월 6일의 상륙작전에는 릴에 있던 공군기지에서
요제프 프릴러 대령과 하인츠 포달첵 중사가 모는
2대의 Fw 190 전투기만이 상륙하는 연합군에게 기총소사를 한 번 행한 것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의 독일공군이 행한
유일한 공격이었다.
두 원수의 논쟁해결을 위해 히틀러는 프랑스 북부에서
운용 가능한 장갑사단 6개 중 3개 사단을 롬멜에게 주었지만
남은 3개 사단은 해안에서 떨어진 위치로 배정되어
히틀러의 승인없이는 운용할 수 없게 되어버려 롬멜의 방어전술 구상에는 큰 제약이 뒤따랐다.
당시 독일에선 히틀러가 <대서양의 벽>이라 불린
대서양 연안의 굳건한 방어상태를 강력히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하의 동원과 소련과의 전쟁 탓에 진행되지 못했다.
히틀러가 연합군이 상륙할 지점으로 예상된 칼레는 80%,
노르망디는 계획의 20%도 추진되지 못했다.
<대서양의 벽>은 연합군의 공격을 반격할 수 있는 강력한 방어시설로
<독일의 배후를 노리는 연합군을 대서양에 처 넣는다>라는 독일 국내의 선전에도 이용되었다.
이를 현실로 하기 위해 독일에선 막대한 양의 콘크리트와 시멘트가 모여
징용노동자 수 만명을 동원해 공사에 투입했다.
하지만 철강재는 전쟁수행에 의해 극히 소량만이 지급되어 진지는 약화되고 말았다.
그리고 노르웨이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3,000 마일 이상의 대서양 연안에
요새를 구축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어서
당시 독일은 서부전선보다도 소련군과 대적중인 동부전선에 전력을 쏟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1943년 말에 B군단 사령관으로 취임한 롬멜은 1941년 북아프리카에 있을 때부터
대서양의 벽에 관한 선전을 믿고 완성되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에 대서양의 벽에 대한 유효성 만큼은 롬멜과 룬드슈테드의 생각이 일치했다.
이는 롬멜이 노르망디의 시찰 후, 벽이 불충분하지만 그럭저럭 막을 수 있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썰물시에 모래사장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독일군의 대전차 지뢰
연합군이 노르망디로 상륙하리라 예상한 롬멜은 취임직후
전력으로 노르망디 연안에 방어시설의 구축을 실시했다.
롬멜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인원과 자재를 투입했는데
그 중에서도 지뢰가 가장 많이 투입되어 노르망디 연안 전체에 묻혀진
지뢰 수만해도 약 500만 발 이상이었다.
그 외에도 바다에는 기뢰, 모래사장엔 장애물을 설치하는 등 될 수 있는한
많이 설치했지만 이것이 당시 독일에서 큰 문제가 되어버렸다.
대서양의 벽에 투입된 독일의 동방군 인도 병사 - 1944년
대서양의 벽에 투입된 독일 외국인 부대 병사들을 둘러 보는 롬멜 원수 - 1944년 2월
당시 프랑스에 주둔중이던 독일병사의 약 6분의 1 이상이
Ost battalion(오스트 바탈리온 - 직역하자면 東方부대)소속으로,
이들 장병은 부대명칭처럼 주로 독일의 동쪽에 위치한 국가출신자들로 구성되었는데
처음엔 문자 그대로 의용병이었지만
전황이 악화되자 점령지역에서 강제징집한 주민과 포로수용소에서 선발된 지원자들로
부대를 편성하여 전투력은 그다지 높다고 말할 순 없었다.
또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수세로 바뀌자
이들은 집단으로 탈주하거나 조직적인 반란의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차례로 서부전선으로 보내진 것이었다.
1944년 6월 당시에 프랑스에는 약 200개 대대의 동방부대가 있었는데
그 절반이상이 프랑스에 배치된 독일군 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명색은 독일군이었지만
무장친위대와는 다른 의용병 사단이었기 때문에 별도로 취급을 받았다.
물론 장교와 하사관은 독일인이었지만 대다수의 병사들은
독일말을 겨우 할 수 있는 수준에다가 훈련수준도 낮아
무기도 구식만이 지급되었다.
당연히 이들의 사기는 낮을 수 밖에 없었는데
연합군이 상륙한 후에는 항복하는 자들이 속출했다.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 출신의 병사들은
타국에서 독일군 때문에 연합군에게 죽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여겼기에
이들에게 전투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사실상 무리였다.
동방부대 병사들을 후방에 배치한 것은
그만큼의 독일인 병사들을 전선으로 내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동부전선에서 후퇴한 독일인 병사들도
프랑스에서 부대를 재건해 주둔케 했는데 이들은 사실 전쟁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들로 후방의 프랑스 전선으로 보내졌는데
롬멜이 부임한 B군단에도 일부가 배치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주로 칼레 항구 쪽에 배치되어
그 외의 지역은 2선급의 부대가 주로 해안을 방어했다.
그러나 동부전선에서 돌아온 병사들에 의해 전황악화의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방부대의 탈주병이 늘어나 큰 문제가 되었는데
때문에 독일에서는 병역을 면제받은 자나
1차대전 참전 퇴역자, 부상병과 노인까지도 징집하여 부대를 만들었다.
그 중에는 위장병을 앓고 있는 자들로만 구성된 부대도 있었다.
연합군에 의한 공습으로 독일에서 프랑스로 이어지는
수송로가 여의치 않게 되자 독일 본국에서 프랑스로의
보충병과 물자도 전선에 다다르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인력과 물자부족에 가급적 힘을 아껴야 할 때
롬멜은 당시 상륙예상점이 아닌 노르망디에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낭비했다 하여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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