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 노동전선의 책임자 로버트 레이와 그의 아내 잉가 레이
오스트리아 비엔나 라이문트 오페라 극장에서의 잉가 레이와 남편 로버트 레이 - 1938년 11월 16일
잉가 레이 그녀는 독일 제 3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중 하나가 되는 명성을 얻었다.
히틀러는 로버트 레이의 음주벽과 불륜 관계를 알고 있었지만 노동부 장관으로써
그다지 큰 결격 사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사생활 문제에 간섭하며 끼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로버트 레이 같은자가 어떻게 그런 여성과 함께 흡족하게 살수 있느냐고 했다고 한다.
잉가 레이와 히틀러와 로버트 레이 - 1941년 라이프치히
뮌헨(Munich)에서 열린 독일 예술의 날에 참석한 로버트와 잉가 부부 - 1936년
로버트 레이와 잉가의 저택
독일 노동전선의 수장 로버트 레이와 그의 아름다운 아내 잉가
딸을 안고 있는 잉가 레이
로버트 레이와 잉가 사이에서는 세 자녀가 있었다.
로버트 레이와 아돌프 히틀러
1924년 뮌헨 폭동에 참가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을 관전한후 그에게 반해버린다.
그리고 그는 뮌헨의 소규모 맥주 홀에서 히틀러를 처음 만나게 된다.
이후 로버트 레이는 히틀러에게 충성을 보이며 나치당의 최측근으로 다가 가게 된다.
하지만 주위의 측근들은 로버트 레이가 지나친 폭음을 일삼는 술고래인데다가
오만한자라서 그를 등용하였다간 조직의 일부가 무능하게 될것이라고 강한 불만을 표시한다.
하지만 히틀러는 그를 베를린으로 데려가서
1933년 독일 노동 전선(German Labour Front)의 수장으로 임명시킨다.
독일의 패망으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지 한달후인
1945년 5월 16일 로버트 레이는 피신해있던 독일 남부 슐레칭(Schleching)의
한 마을 구둣방에서 미군 제 101 공정대 낙하산병들에게 붙잡히게 된다.
그는 처음에 미군 병사들에게 자기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다른 이름을 들먹이며 에른스트 디스텔마이어 박사라고 신분을 속인다.
하지만 오랫기간 동안 나치 간부들의 연회와 파티에 회계원으로 일했던
프란츠 자이버 슈바르츠란 자가 그를 알아보며
로버트 레이는 체포되어 나치 전범들을 재판하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된다.
뉘른베르크의 독방에 갇힌 로버트 레이는
쇠파이프에 수건을 찢어 만든 올가미에 목을 매어
1945년 10월 25일 5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로버트 레이의 이름 딴 여객선 로버트 레이호를 방문한 히틀러 1939년 7월 20일
히틀러와 이야기를 나누는 잉가 레이
잉가 레이와 아돌프 히틀러
독일의 배우이자 무용수였던 잉가 레이는 독일 노동전선 책임자 로버트 레이의 부인이었다.
로버트 레이의 개인비서 힐데가르트 브루닝호프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고 그녀의 집 내부의
가장 눈에 잘 띄는곳에 걸어둘 초상화와 누드화를 의뢰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출산 이후 우울증과 약물 중독의 합병증 빠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술을 집중적으로 탐닉하는 알콜 중독 증세를 보이다가
1942년 12월 29일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훗날 독일에서는 히틀러와 그녀의 자살 사건과 연관하여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분분하게 내려오고 있지만 그들의 관계는 아무것도 확실치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잉가 레이 또한 여성 편력이 다양했던 히틀러가 좋아했었던
여성중의 한명이었음은 틀림없다.
photo from : Axis History For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