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핫소 폰 만토이펠 & Nut [Hasso von Manteuffel & Nut]

슈트름게슈쯔 2012. 10. 19. 19:16

 

 

 

 

 

 

 

 

 

 

 

 

 

 

 

 

  

 

 

 

 

만토이펠과 히틀러

 

 

 

서독 대표단으로 영국에 초대되어  

처트시(Chertsey) 영국 기갑부대의 장갑차를 살펴보는 만토이펠 - 1955년 11월 10일

 

 

만토이펠과 만슈타인

 

 

 

 

말년의 만토이펠

 

 

 

Hasso-Eccard Freiherr von Manteuffel

 

(핫소-에카르트 폰 만토이펠 남작)

1897. 01. 14.(독일, 포츠담) ~ 1978. 09. 24.(오스트리아, 튀롤)

 

핫소 폰 만토이펠은 독일의 군인이자 자유민주당 소속 정치가였다.

그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모두 경험하였으며 제 2차 세계 대전 때 장군으로 진급하였다.

만토이펠은 전술적 능력을 인정 받았던 전차 부대 지휘관이었으며

27대 다이아몬드 검 백엽 기사 철십자장 수훈자였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서독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자유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재군비 지지론자로 유명하며, 전후 재창설된 독일 육군에 'Bundeswehr'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932년까지의 연표]

 

핫소 폰 만토이펠은 포츠담에서 프로이센 귀족 가문의 자제로 태어났다.

1908년(11세)에 사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6년 2월 22일 제국 독일 육군에 경기병(Hussar) 장교로서 임관하였다.

 폰 만토이펠은 같은 년 4월에 제 1차 세계 대전에 제 6 프로이센 보병 사단 예하 제 3 경기병 연대의

제 5 대대 소속으로 참전하여 서부 전선에서 복무하였다.

 10월 12일에 프랑스에서 부상을 입어 회복 후 1917년 2월부터 사단 참모부에서 복무를 계속하였다.

 

1918년 11월에 독일 혁명(11월 혁명)이 터지자 폰 만토이펠은 쾰른에 라인강의 한 다리 경비 부대에 배속되었다. 

혁명가들을 저지하고 프랑스 및 벨기에에서 본국으로 후퇴하는 육군을 보호하는 임무였다.

 제국 육군이 해산되자 1919년 1월에 해방군에 들어갔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자

새로이 창설된 독일 국방군(Reichswehr)에 입대하여 1919년 5월에 라테노브의 제 25 기병 연대에 배속되었다.

1921년 6월 23일에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Ewald von Kleist)의 조카인

아름가르트 폰 클라이스트(Armgard von Kleist)와 결혼하여 두 명의 자녀를 낳았다.

1920년 초, 폰 만토이펠은 제 3 프로이센 기병 연대의 소부대 지휘관이었으며 후에 연대 참모가 되었다.

1930년 2월 1일에 기술반의 지휘관이 되었다.

 

 

 

[1932 ~1945]

 

1932년 10월 1일, 폰 만토이펠은 밤베르크의 제 13 바이에른 기병 연대에 중대 지휘관으로 전근되었다.

 2년 후, 1934년 10월 1일에 다시 전근 명령이 떨어져 에르푸르트 기병 연대로 배속되었다.

 1935년 10월 15일, 폰 만토이펠은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의

제 2 기갑 사단 예하 제 2 오토바이 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1936년에서 1937년 1년간 제 2 기갑 사단 참모부 및 사관 후보생 훈련 장교로서 복무하였다.

1937년 2월 25일에 육군 총사령부의 기갑 사령부 고문이 되었으며

1939년 2월 1일에 베를린-크람프닛츠의 제 2 전차병 학교의 선임 교수가 되었다.

 1941년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바람에 폴란드 및 프랑스 공략에 참전하지는 못하였다.

 

1941년 5월 1일, 폰 만토이펠은 제 7 기갑 사단 예하 제 7 소총 연대의 제 1 대대의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부대는 만토이펠이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처음으로 함께 하게 된 부대로,

 바르바롯사 작전(소련 침공)에서 중부 군집단의 헤르만 호트(Hermann Hoth)가 이끄는 제 3 기갑 집단 소속이었다. 

8월 25일에 같은 7 기갑 소속 제 6 소총 연대의 연대장이 전사하자 지휘권은 인계받았다.

1941년과 1942년을 걸친 겨울 동안 모스크바 근교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난후에

제 7 기갑 사단은 1942년 5월에 프랑스로 돌아가 재충전의 시간을 보냈다.

1942년 7월 15일, 7 기갑이 여전히 프랑스에서 회복 중일 때, 만토이펠은 사단의 제 7 기갑척탄병 여단 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초, 만토이펠은 아프리카로 건너가 2월 5일에 '폰 만토이펠' 사단의 지휘관이 되었다.

에르빈 롬멜(Erwin Rommel)의 아프리카 군단의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Hans-Jürgen von Arnim)이 이끄는 제 5 기갑군 소속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만토이펠은 튀니지 전투에서 방어 작전에 참가하여

성공적인 반격으로 연합군을 지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피를 말리는 전투가 계속되는 중, 만토이펠은 3월 31일에 과로로 쓰러져서 독일로 후송되었다.

그 해 5월 1일, 아직 회복 중인 만토이펠은 아프리카의 전공으로 말미암아 소장으로 진급하였다.

 

병석에서 일어난 후, 만토이펠은 1943년 8월 22일에 제 7 기갑 사단으로 사단장이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7 기갑은 1943년 동부 전선에,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의 거센 반격 현장의 한 가운데 있었다.

8월 26일에 소련의 공습에 등짝에 상처를 입었지만 우크라이나에 남아 분전했다.

하르코프, 벨고로드, 드네프르 강을 거친 피비린내 나는 혈투 끝에

만토이펠은 11월 말에 붉은 군대의 진격을 멈추는데 성공하였으며

쥐토미르를 가까스로 재탈환하여 도시 북부에 포위 직전이었던 제 8 기갑 사단을 구출하였다.

 

마침내 1944년 2월 1일, 만토이펠은 정예 척탄병 사단 '그로스도이췰란트'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로스도이췰란트 사단에서 키로보그라드 서부에서 일련의 치열한 방어 전투를 치르고,

우크라이나를 통해 후퇴하여, 3월 말에 루마니아에서 사단을 재편하였다.

6월 동안 루마니아 북부에서 수 차례의 성공적인 방어를 이루어 낸 후

군세가 취약해진 그로스 도이칠란트는 예비 부대로 편성되어 휴식을 취했다.

7월 말에 그로스도이췰란트는 동프로이센으로 보내졌다.

그곳은 중부 군집단이 소련군의 바그라치온 작전 이후 피떡이 되면서 심각한 위협을 받기 시작한 곳이었다.

만토이펠은 그 곳에서 많은 손실을 감내하며 리투아니아로 진격해 전선을 고착화 시켰다.

그러나 쿠를란트 돌출부를 돌파하는데는 실패하였다.

그 곳에서는 독일 중부 집단군의 괴멸 이후 독일 북부 집단군이 소련군에게 발목을 잡혀있었다.

 

1944년 9월 1일, 폰 만토이펠은 대장으로 진급하여 제 5 기갑군의 지휘권을 잡아, 서부 전선으로 보내졌다.

로렌 지방에서 조지 S. 패튼(George S. Patton)이 이끄는 제 3 군과 치열한 전투를 겪고 나서

부대는 뒤로 물러나 아르덴느 공격 작전을 위해 재정비 기간에 들어갔다.

 폰 만토이펠의 제 5 기갑군은 지원 부대로 편성되었지만 바스토뉴 돌출부 전투에서

 연합군 전선을 가장 깊이 뚫고 들어갔다(뫼즈 강에 닿을 정도로).

 

만토이펠 하면 대두되는 이야기중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2차 세계대전 말기 나치독일의 마지막 발악적인 공세였던 벌지 대전투 당시 재미난 일화가 있었다.

바이퍼 중령을 선두로 연합군이 점령한 프랑스 북부의 아르덴느 삼림 지역에

대규모 공세를 가해온 독일군은 미군 101공수여단을 비롯한 필사적인 저항에 부딛쳤다.
그러한 전황으로 인하여 독일군은 바스토뉴를 포위 하고 더 이상 진격을 못하고 있었다.
이에 벌지전투 독일군 사령관인 폰 만토이펠은 미군에게 정중히 항복할 것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낸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미군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그 답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Nut

 

Nut 이었다.


이 말은 교양있는 사람들이 쓰는 일반적인 단어는 아니고 "속어"이다

 

영어로 Are you nuts? 는 너 미쳤니 란 말이다.

 

한동안 만토이펠은 이것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1945년 3월 10일에 폰 만토이펠은 제 3 기갑군 사령관이 되어 다시 동부전선으로 복귀했다.

 부대는 곳트하르트 하인리치(Gotthard Heinrici) 장군이 이끄는 비스와 군집단에 배속되었다.

 

제 3 기갑군은 젤로브 고지 북부 오더 강 둑을 방어하는데 투입되었다.

그 위치는 서부 포르폼메른을 통해 베를린으로 진격하려는 소련군을 저지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베를린 전투에서 폰 만토이펠은 콘스탄틴 로코소브스키(Константин Рокоссовский)의

제 2 벨로루시 전선군의 압도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4월 25일, 제 2 벨로루시 전선군은 결국 슈텟틴 남부 교두보 중심의 제 3 기갑군 전선을 돌파하고 말았다.

소련군이 람도브 습지를 건너자, 폰 만토이펠은 메클렌부르크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4월 28일에 하인리치로부터 비스와 군집단의 지휘관 자리를 제안받았지만 거절하였다.

1945년 5월 3일, 폰 만토이펠은 연합군에게 항복하여 간신히 소련군에게 사로잡히는 것을 면하였다.

 

 

[1945 ~1978]

 

폰 만토이펠은 1947년 9월까지 연합군 포로 수용소에 구금되어 있었다.

석방 이후, 정치계에 입문하여 1953년에서 1957년 7년간 분데스탁의 독일 자유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미국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객원으로 초빙되어 펜타곤과 백악관을 방문하였다.

1968년에는 웨스트 포인트 미국군 사관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며, 전쟁 영화의 기술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핫소-에카르트 폰 만토이펠 남작은

1978년 9월 24일 오스트리아 튀롤의 라이트 임 알프바흐탈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수훈 내역]

 

오스트리아 4급 전공 십자장

바이에른 3급 전공 십자장

2급 전차 돌격장(은색)

2급 전공 십자장

아프리카 참전 수장

2급 철십자장

1급 철십자장

기사 철십자장(1941. 12. 31.)

백엽(1943. 11. 23.)

검(1944. 02. 22.)

다이아몬드(1945. 02. 18.)

 

 

 

 

 

 

 

photo from : Histomil.com

                      militaryphotos.net

                      achtungpanzer.eu

                         audiovis.nac.gov.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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