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치통 - 이덕일

슈트름게슈쯔 2012. 10. 25. 14:18

 

 

 

 

중국의 길거리 치과

 

 

 

현대식 치과

 

 

 

 

'사기(史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는

오복을 수(壽)·부(富)·강녕(康寧: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함)·유호덕(攸好德:덕을 좋아하는 것)·

고종명(考終命:제명대로 죽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민간 속설은 건강한 치아를 오복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치통이 괴롭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문신 소세양(蘇世讓:1486~1562)의 치병(齒病)이란 시는

"내 늙도록 백가지 병을 겪었으나/이 앓는 것처럼 아픈 것은 없다(我老經百病/病莫如病齒)"는

구절이 치통의 괴로움을 말해준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늙은 나(我老)'란 시에는

"이가 쑤시니 건어를 씹거나/연포를 마시기도 참으로 힘들구나(齒病嚼乾魚/軟飽眞難繼)"라는 구절이 있다.

 연포(軟飽)란 음주를 뜻하는데, 송나라 소식(蘇軾)의 광주를 떠나며(發廣州)란 시에

 "세 잔을 연포한 후/베개 베고 자니 여유로다(三杯軟飽後/一枕黑舌甘餘)"란 구절이 있다.

 송(宋)의 홍각범(洪覺範)은 법명이 혜홍(惠洪)이란 승려인데,

그의 '냉재야화(冷齋夜話)'에는 중국 방언에 술 마시는 것이 연포(軟飽)이고,

 달게 자는 것이 흑첨(黑舌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치통의 원인에 대해 '지봉유설'은 "보통 사람들은 치통의 아픔이

월식(月蝕)날 밤에 음식을 먹는 데서 많이 생긴다고 말한다"고 적고 있다.

'성종실록'에는 제주 의녀 장덕(張德)과 제자 귀금(貴今)이 충치를 제거하는 의료술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보통의 경우에는 민간 처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 조인영(趙寅永:1782~1850)이 배 위에서 치통이 발생하자

맑은 물로 양치질했더니 통증이 가셨다는 이야기가 이유원(李裕元)의 '춘명일사(春明逸史)'에 나온다.

뿌리가 까마귀 머리처럼 생겨서 오두(烏頭)라고 불렸던 바곳의 덩이뿌리나

 말벌의 집인 노봉방(露蜂房)이 민간 치통 치료제로 사용되었고,

박하(薄荷)잎이나 정자유(丁字油)를 아픈 이에 끼우거나

곤약(崑蒻)을 아픈 쪽 뺨에 대는 것도 통증 제거용으로 사용되었다.

새터민 교육기관인 하나원은 새터민들의 질환 중에 치과 관련이 가장 많다고 밝혔다.

 부실한 의료 시설과 낮은 영양상태가 주범일 텐데 치통처럼

시급히 치료해야 할 병이 없다는 것을 아파 본 사람은 안다.

 

 

 

 

 

 

 

 

 

photo from : Livejourn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