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스페셜

마오쩌둥 옌안 장정의 숨겨진 이야기[Mao Tsetung Yan an Long March behind story]

슈트름게슈쯔 2012. 11. 5. 14:11

 

 

마오쩌둥의 옌안 장정 이동 경로 (1934~1935)

 

 

장정(長征)은 마오쩌둥의 홍군(紅軍)이 쟝제스(장개석)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9600km의 거리를 걸어서 탈출한 사건이다.

대서천(大西遷) 또는 대장정이라고도 한다.

군사적으로는 대실패의 패주였지만 중국 전역에 홍군의 이념을 널리 알리고

중요 핵심 지도자급 인물들이 생존했으며 홍군의 전략 전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건이었기에

중국 공산당 발전의 중대한 계기요 승전의 의미로 받아들인다.

장정을 통해 홍군의 전략이 게릴라전 으로 바뀌었고 마오쩌둥(모택동)이 핵심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934년 10월 16일에 중국 남부 장시성 서금 소비에트(공산당 점령지역,해방구)의 8만 명의

중국 홍군(중국 공산당 군) 제 1방면군이 군수품과 온갖 물자를 등에 지고 탈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로소 1936년 10월에 산시성(섬서성)에 도착했다.

그러했던 마오쩌둥의 탈출은,장제스가 1년 전부터 70만여 명의 대군으로

소비에트 주위에 철조망과 시멘트 요새를 설치하고 물샐틈 없는 포위망을 구축 하면서부터 예고가 되었다.

중국 국민당 군의 압박으로 소비에트 지역이 점점 생활 필수품과 의약품 등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게 되고

지배영역과 군사가 축소되자, 공산당 지도부는 마침내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장시 성과 푸젠성 일대의 근거지를 버리고 탈출을 시도했다.

당시 제1방면군에는 홍군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많았는데, 저우 언라이(주은래) 함께 지도력을 양분하고 있던

마오쩌둥(모택동)은 소련의 압력으로 지도권을 상실한 상태였고

극좌노선의 지도부는 강한 상대에게 게릴라전이 아닌 정규전으로 대응한 것이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

장기적인 목적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일단 생존이 우선이었기에 압력이 약한 곳을 노려 탈출하였고 강력한 국민당군을 피하는 게 일차적 목표였다.

최종목적지로 중국 서북부의 오지인 산시성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하기까지는

 많은 세월의 투쟁과 홍군 내부의 이견을 극복한 결과였다.

무었보다도 그곳이 홍군에게 최종 목적지가 된 이유 중 하나는

지리적으로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기 유리하다는 것에 대한 결론이었다.

 

 

 

 

젊은 시절의 장제스(장개석)

 

그는 중국 대룩에 마오 쩌둥의 공산주의 세력을 섬멸시키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마오쩌둥의 홍군은 포위망이 가장 약한 서남쪽을 돌파하고 추격해 오는 장제스의 국민당군과 각 지역의 적대적인

군벌 군대를 뿌리치면서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뒤에는 가족 대부분과 병들거나 부상 입은 2만 명을 포함한 2만 8000명의 홍군이 남겨졌다.

처음 탈출시엔 중화기와 문서, 인쇄기구 등 많은 짐들이 있어 기동성이 약했기에 그 피해가 더 커졌다.

급한 탈출을 위해 그런 짐들을 버리는 과정에서 홍군의 중요 역사적 기록문서들이 상실된 것은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아픈 기억으로 남았다.

홍군들은 패전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강한 상대와 싸우는 데에는 게릴라전이 효과적인 전략임을 실감하였다.

1935년 1월 마오 쩌둥(모택동)의 노선이 다시 채택되고 그에게 당지도권을 주었다.

그 뒤 홍군의 군사행동은 한층 기동성을 띄어 당시 최대의 군사력을 보유한

사천성 북부의 제 4방면군과의 합류를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군의 추격은 집요했다.

오지 끝까지 제 1방면군을 향한 추격은 이어졌고 제4방면군과의 합류도 저지하려 노력하였다.

그럴수록 홍군의 도피행렬은 오지와 첩첩산중으로 이어졌고 공군 까지 동원한

국민당군의 탄압과 더위및식량부족으로 도중에 많은 군인들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농민들을 신병으로 충원하곤 했다.

대운하의 도하, 대설산을 넘는 강행군, 사천성에서 감숙성으로 향하는

대평원에서의 흑탕물과 기아로 극한의 위기를 자주 맞이했지만 기동력과 군사들의 헌신과

그리고 장개석 외의 기타 군벌 및 소수민족과의 타협으로 위기를 극복해 냈다.

 1935년 10월, 368일의 행군 끝에 제 4방면군과 합류할 수 있었다.

 제 1방면군의 원호작전을 맡고 있던 제 2방면군도 11개 성,

18개의 산맥을 넘어 1936년 10월 감숙성에서 제 1방면군과 합류할 수 있었다.

 

 

 

 

저우 은라이(37 세)와 마오 쩌둥(41세) - 1935년

 

 

마오쩌둥(모택동),저우 은라이(주은래).주더(주덕),린뺘오(임표),펑더화이(팽덕회)등이 이끄는

홍군 제 1방면군이 1936년 10월 예안에 도착해 자리를 잡기까지 행군한 거리는 무려 9600킬로미터나 되었으며,

당초 출발자 중에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한 인원은 불과 7천 명뿐이었다.

 홍군 전군의 병력이 자주 분산 와해되는 타격을 입었고

또 자주 신병을 충원하면서도 최종 목적지까지 살아남은 병사는 3만이 되지 못했다.

 이는 장제스(장개석)의 공산당 섬멸의지가 얼마나 강력했나를 반증하는 증거였다.

제 1군의 지도부와 노선 차이로 마찰을 빚고 다시 사천성으로 회군하려던, 장궈타오가 이끄는,

1935년 후반 홍군의 최대세력이던 제 4방면군도 장개석의 집중타격 대상이 되어 2/3이 병력을 잃기도 했었다.

중국 공산당은 1921년 반(反)제국주의 등의 목표를 갖고 상하이 에서 창립한 이후

15년 동안 중국 남부와 동부에서 이룩했던 공산주의 혁명의 성과를 모두 잃어버리고 첩첩산중에 움츠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홍군은 여기서 실망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념과 전략전술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농민들에게 자신들의 이념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어 항일전선을 통해 홍군의 토대를 강화하는 노력을 펼쳤다. 

 

중국 국민당 장제스 총통이나 다른 관측자들의 눈에는 이들이 마침내 뿌리가 뽑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장정은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패배가 아니라 승리, 그것도 역사를 바꾼 대승리로 기록됐다.

홍군은 장정을 통해 혁명을 위한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다는 산화를 만들어 내었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근거한 공산주의 혁명의 이념을 농촌 지역에 전파할 수 있었다.

또한 대부분이 농민 출신인 홍군은 민폐를 전혀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장정은 중국 공산당이 농민들의 지지를 받게 한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에드거 스노우가 산시성 연안에서 모택동을 인터뷰 하여 펴낸 책-

<중국의 붉은별>(Red Star Over China : 1937년)으로 인해

장정은 서양에 널리 알려지는 사건이 되었고

마오쩌둥(모택동)은 중국 내외에 유명인물이 되어 중국 최고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아울러 소련이 도시 노동자를 기반으로한 혁명에 성공한 반면,

비 유학파 모택동의 자주노선은 중국만의 특징인 농촌의 농민을 중심으로 한

게릴라 전략을 설파해 실전에서 그 효과성을 입증해 보였기에,

중국 공산당의 주요 전략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돈과 군대는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드넓은 농토와 농민들은 홍군을 강력하게 지지하였다.

 민심을 잡은 홍군은 1945~1949년 까지 이어진 국공내란 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가난한 농민의 대표자로써 중국 정권을 담당하는 세력이 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와 같았던 중국 공산당의 신화인 마오쩌둥의 옌안 장정은 한세기가 바뀐뒤 후대의 여러 실록 작가들이

장정의 실제를 밝힌바에 의하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왜곡된 역사로 기록 되어 있음을 알게한다.  

당시의 홍군 생존자와 목격자의 이야기를 토대로 밝혀낸 사실은

마치 중국 공산당의 신화적인 사건으로 다루는 옌안 장정의 내용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다.

  

 

 

 

 

1936년 10월 산베이에 도착한 뒤 살아남은 홍군들 앞에서 연설하는 마오쩌둥.

 

마오 쩌둥의 장정 신화는 그러나 적지 않은 실록작가들의 도전을 받고 있다.

 

 

‘장정’이란 1934년 10월 중국공산당의 ‘공농홍군’(工農紅軍, 노동자 농민의 붉은 군대)이

국민당 정부의 포위 토벌공격을 피해 장시(江西)성 루이진(瑞金) 근거지를 버리고 10여개 성을 지나

1936년 10월 중국 서북 산베이(陝北) 옌안(延安)에 근거지를 마련하기까지 2만5000㎞를 행군한 일을 말한다.

이 기나긴 고난의 행군 동안 홍군은 가는 곳마다 농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으며,

홍군에 자원입대하려는 농민들이 장사진을 이뤘다고 중국공산당은 설명한다.

홍군은 비록 패주했지만 가는 곳마다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고

농민으로부터 군사력을 보충 받아 결국 국민당과 내전에서 승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 중국공산당 ‘정사’의 주장이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장정은 선언서이자 선전대이며 파종기였다”고 말했다.

중국공산당의 ‘창세설화’인 장정은 그러나 오늘날 적지 않은 실록작가들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지난 2002~2003년 영국 작가 에드 조셀린(Ed Jocelyn)과 앤드루 맥이원(Andrew McEwen)은

1년여 동안 장정의 행로를 되밟으며 홍군 생존자와 목격자들을 인터뷰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들은 2004년 <붉은 여행 : 384일의 장정 되밟기>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지은이들은 “마오쩌둥과 그의 추종자들은 장정의 진실을 완전히 왜곡했고 마오를 신격화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마치 마오 한 사람이 장제스(蔣介石)의 봉쇄망을 뚫고 홍군을 구해낸 것처럼 과장했으며,

홍군이 행군한 거리 또한 2만5000㎞가 아니라 실제는 절반 정도”라고 주장했다.

 

 

 

 

1937년 옌안 중국공산당 근거지에서 출간된 의 표지. 초기부터 이미 ‘장정’의 ‘신화화’가 진행됐음을 보여준다.

 

 

 

이보다 더 심각한 도전은 2006년 출간된 중국계 영국 다큐멘터리 작가 쑨수윈(孫淑芸)의 <장정>이다.

 장정에 참여했던 40여명의 늙은 홍군을 인터뷰한 쑨은 이들의 증언이 그려내는 장정의 실제 상황이

중국공산당의 ‘정사’와 너무도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우선 ‘정사’는 장정 기간 동안 농민들이 줄 서서 홍군에 가입했다고 주장하지만,

늙은 홍군들은 “홍군에겐 그런 매력이 없었다”고 말한다.

되레 ‘납치’와 ‘협박’이 할당된 신병 모집 인원 충당을 위한 일반적 수법이었으며,

어떤 여성 군관은 임무 불이행에 대한 징벌을 피하기 위해 ‘몸’을 팔아 장정을 홍군에 끌어들였다.

당시 탈영병은 총살이었지만 홍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수많은 대량 도주 사태가 이어졌으며,

샹(湘)강 전투 때는 3만여명이 탈영으로 ‘행방불명’된 것으로 나타났다.

 

‘정사’는 또 홍군이 가는 곳마다 ‘연도 환영’을 받은 것으로 적고 있으나,

실제 홍군은 가는 곳마다 국민당군의 추격 아니면 군벌의 습격을 당했다.

정사는 부정하고 있지만, 쑨은 생존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장비가 부족한 홍군은 혹한에 얼어 죽었고,

 어린 아이와 환자는 버림받았으며, 대열에서 뒤떨어진 여성들은 성폭행의 피해자가 됐다”고 주장한다.

 

 

 

 

1934년 국민당군의 포위공격에 전멸당하지 않기 위해 장시성 루이진 근거지를 포기하고

 

‘장정’에 나서기 위해 모인 중국공산당 공농홍군들.

 

최근의 실록 작가들은 공산당의 숙청이 홍군을 약화시켜 패주로 이어졌다고 분석한다.

 

 

 

티베트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텐진 갸초)의 2살때 모습 - 1937년

 

달라이 라마는 1935년 7월 6일 농부의 집안에서 라모 톤둡으로 태어났다.

두 살 때 달라이 라마의 현신으로 발견되어 제춘 잠펠 가왕 놉상 예셰 텐진 갸초라는 법명을 받고

1940년 4대 달라이 라마로 공식 취임했다.

 1959년 인도 다람살라로 망명하여 티베트 망명 정부를 세웠다.

1989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홍군은 식량 보급도 쉽지 않아 아편을 주고 곡식을 바꾸기도 했으며,

이를 거부하는 농민들에게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홍군에 가장 시달린 이들은 티베트인들이다.

티베트 농민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홍군에 소와 곡물을 몰수당해 굶어죽었기 때문에

이들은 지금도 중국공산당을 증오한다.

한 늙은 홍군은 “당시 홍군이 티베트 무장세력과 교전한 회수가

국민당군과 교전한 회수보다 더 많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심지어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조차 나중에 “(홍군의 장정 과정에서)

티베트인들에게 너무나 많은 빚을 졌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쑨은 장정이 시작된 원인에 대해서도 신화파괴적 해석을 내놓는다.

그는 1930년대 진행한 여러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공산당의 숙청이 장정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1931년 2만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숙청은 홍군 내부의 결속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1934년엔 루이진 근거지를 지킬 수 없을 정도가 돼 장정이라는 패주에 나섰다는 것이다.

쑨은 “마오쩌둥은 이후에도 30여년 동안 중국 인민에게 여러 차례의 장정을 강요했다”며

 “우리가 이런 고통을 받아들여온 까닭은 장정이 본디 어떻게 시작됐는지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photo from : kingsacadem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