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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를 바꾼 장쉐량의 시안 사건[China retrograde from History Zhang Xueliang Xi'an incident]

슈트름게슈쯔 2012. 11. 8. 10:59

 

 

장쭤린(張作霖 : 1875-1928)

 

 

 

 

 선양(瀋陽)부근 황고둔(皇姑屯)에서 폭파당한 장쭤린의 열차 - 1928년 6월 3일

 

 

1928년 6월 3일 만주군벌 장쭤린(張作霖)은 귀빈열차를 타고 베이징을 빠져나갔다.

 일본의 비호를 받으며 장제스(蔣介石)의 국민혁명군에 맞서다가 만주로 퇴각하던 중이었다.

 다음날 새벽 장쭤린이 탄 열차는 선양(瀋陽)부근 황고둔(皇姑屯)에서 폭파당했고 그는 사망했다.

 ‘장쭤린 폭살사건’ 또는 ‘황고둔 사건’으로 불리던 이 사건은

일본 관동군(關東軍)의 고급 참모 고모토(河本大作) 대좌(大佐)가 주도했다.

 현장 지휘자는 독립수비대 중대장 도미야(東宮鐵男)였고,

서울 용산의 조선상주군 공병대 기리하라(桐原貞壽)가 200㎏의 화약을 반출해 사용했다.

고모토는 장쭤린 폭살로 만주의 치안이 악화되면

그것을 명분으로 관동군이 출동해 만주를 중국 본토에서 분리시킬 계획이었다.

 마침 6월 3일이 생일이었던 아들 장쉐량(張學良·1901~2001)은

 베이징에서 소식을 듣고 사병 차림으로 비밀리에 선양으로 귀환했다.

 장쉐량은 관동군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그해 12월 29일 오전 7시 북양정부(北洋政府)의

 오색기(五色旗)를 장제스 국민정부의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로

일제히 바꾸어 다는 역치(易幟)를 단행했다.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총리는 당초 일왕 히로히토에게

“고모토 대좌의 소행”이라고 보고하고 책임자 처벌을 공언했으나

군부의 반발로 흐지부지되면서 그 무능과 일본의 침략 야욕만 드러났다.

 장쭤린을 폭살시키고도 처벌받지 않았던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에는

참모 이타가키(板垣征四郞) 대좌와 이시하라(石原莞爾) 중좌 등이

 총리에게 보고도 않고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켰다.

외교 수단으로 해결하자는 장제스의 권유에 따라 장쉐량의 동북군은 산해관(山海關) 밖으로 퇴각했다.

게다가 ‘외적과 싸우려면 먼저 내부를 평정해야 한다(攘外必先安內)’는

 장제스의 지시에 따라 홍군 토벌에 나서야 했다.

 장쉐량은 1936년 12월 홍군 토벌을 독려하러 온 총사령관 장제스를 억류하고,

 ‘공산당 토벌 중지, 일치항일(停止剿共, 一同抗日)’을 주장하는 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켰다.

 절멸의 위기에 몰렸던 공산당은 기사회생의 계기를 마련했고 끝내 대륙을 석권했다.

 서안사변은 장쉐량의 두 번째 역치(易幟)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는 예상하지 못한채로 방향이 뒤바뀌는 경우가 허다하기에

누구든지 쉽게 승패를 예언하거나 점을 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장쉐량(張學良: 1901 ~2001)

 

 

 

중국 대륙에서 마오 쩌둥의 공산당 군대가 국민당의 장제스 군대에게

승리를 할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를 제공하여 중국의 역사를 뒤바꿔 놓아버린

시안사건은 서안사건 (西安事變), 시안 사태, 시안 사변으로도 부른다.

 

 

 

 

시안의 화청지(華淸池) 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겨울을 보내던 곳으로 황제가 목욕을 하던 온천이었다.

 이곳은 서안에서 동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야산에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온천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고 양귀비 동상만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이 장제스를 구금시켰던 시안의 화청지(華淸池) - 2010년 5월 20일 

 

 

 

1936년 12월 12일, 장제스는 장쉐량이 주둔하고 있는 시안에 위로차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장쉐량은 온천에서 한가로이 목욕을 하고 있던 장제스를 긴급 체포하고, 옥에 가두어 버린다.

 

장제스가 놀라 장쉐량에게 
"자네 미쳤나? 상관을 가두다니, 이게 무슨 짓이야!"

 

장쉐량이 장제스에게
"총통, 우리는 지금 바람 앞의 등불입니다.

 

일본이 중국 대륙을 삼키고 나면 국민당이고 공산당이고 아무 것도 없어요!"
라고 주장하면서 결국에는 장제스를 설득하게 된다.
이에 1937년, 국민당은 불법으로 규정하던 공산당을 승인하고

 

공산당 정치범을 해방하는 등의 조건을 제시하며
다시 한번 국민당과 공산당은 연합하게 된다. (제2차 국공 합작)

 

 

 

 

 

 시안사건은 1936년 12월 12일 중국 동북군 총사령관 장쉐량(장학량)이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제스를 산시성의  성도(省都) 시안(西安) 화청지에서 납치하여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국민당군과 홍군은 국공내전을 중지하고

제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함께 대 일본 전쟁을 수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젊은 원수로 알려진 장쉐량(장학량)은

중국 동북지방 즉 만주의 군벌인 장쭤린(장작림 : 張作霖)의 장남이었다.

1928년 장쭤린이 죽자 그 위치를 물려받은

장쉐량은 만주의 젊은 독재자 이자 군벌로 위세를 떨쳤는데

1931년 9월 본격적인 일본의 만주 침략이 시작되자

 근거지를 잃은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의탁하였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중국 중부지방에서 동북군(만주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홍군과의 국공내전의 부사령관으로 삼았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장정으로 옌안을 수도로 하여 동북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장쉐량 휘하의 동북군은 고향인 만주를 일본에 빼앗긴 상태여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많았고 홍군과의 의미없는 소모전에 지쳐있었다.

특히 홍군은 동북군 포로들에게 '진짜 적은 같은 중국인인 홍군이 아니라

만주를 침탈한 일본군이라'는 지속적인 "항일선전"을 폈고

이들이 다시 동북군으로 돌아와 동북군 사이에는 항일에 대한 요구가 점점 커지게 되었다.

장쉐량 자신도 홍군과의 접촉을 통해 좌익의 영향을 받았고

대 일본 전쟁에 소극적인 장제스의 난징정부의 "선 통일, 후 저항" 정책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1936년 초 장쉐량의 동북군은 홍군과 비밀리에 접촉을 갖고 서로 적대적인 행위를 중지하고

일본과 항쟁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장쉐량은 만주시절부터 내려오던 동북군 장교단을 젊고 진보적인 좌파로 채우고 공산군과의 접촉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접촉은 장제스의 난징정부에는 철저한 비밀리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장제스(蔣介石 : 1887~1975)

 

1936년 장제스는 중국군 총사령관 및 행정직 주석직도 겸하고 있었고

장쉐량은 동북군의 원수로 점차 두 사람사이의 긴장은 커지고 있었다.

반일감정이 고조된 서북지역의 민심을 뒤로한채 장제스는 공산군 토벌에만 몰두하였고

이에 소극적인 동북군을 점차 신뢰하지 않고 직접 난징의 군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홍군토벌을 준비하였다.

10월 장제스는 직접 시안을 방문하여 동북군의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였으나

동북군의 젊은 장교들은 대 일본 통일전선 수립 및 소련과의 동맹 및 내전 종식을 요구하였다.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과의 항전을 거듭촉구했으나 총통은 듣지 않았다.

 11월 21일 동북군을 대체하여 공산군 토벌에 나선 난징 국민당군 제 1군이 홍군에게 참패를 당하자

장제스는 직접 시안으로 날아가 반드시 홍군을 분쇄하고자 하는 결의를 다졌다.

 

 

12월 7일 장제스는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전용기편으로 직접 시안에 도착하였다.

동북군 지휘관들은 다시한번 장총통에게 항일전을 촉구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양호성(楊虎城) 장군 휘하의 4만 명의 서북군도 더 이상 홍군과의

소모전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동북군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12월 9일에는 수천명의 학생들이 반일시위를 벌였는데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장제스의 헌병대가 발포,

두명의 동북군 지휘관의 자식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장쉐량이 중간에서 성난 학생군중을 무마하여 더 이상 큰 사건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장제스는 제6차 홍군토벌전 계획을 발표하고 총동원령이 임박하였음을 알렸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경질하고 토벌군사령관을 교체할 계획을 세웠고

장제스의 친위병력인 남의사(藍衣社)는 항일을 주장하는 동북군 장교에 대한 블랙리스트까지 작성하여

동북군의 핵심세력을 제거하고 공산군 토벌에 찬성하는 장군들로 대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2월 11일 밤 10시 장쉐량은 동북군, 서북군의 합동사단장회의를 소집하고 본격적인 반란에 돌입하였다.

동북군 1개사단과 서북군 1개연대를 시안 외곽을 이동하라는 비밀명령이 떨어지고

총통과 그 참모진을 '체포'하기로 결정되었다.

 

12월 12일 동북군과 서북군의 반란군은 오전 6시까지 시안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고

국민당군 참모부와 남의사 요원들은 구금상태로 들어갔다.

 장제스 총통은 시안에서 16km정도 떨어진 온천휴양지 임동(臨潼)에 머물고 있었는데

새벽 3시 장쉐량의 부하들이 장제스의 호텔을 급습하여 약간의 유혈사태를 치른 후에 잠옷바람이고

맨발로 도망친 총통을 야산에서 발견 체포하였다.

반란에 성공한 직후 동북군과 서북군은 다음과 같은 8개의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1. 난징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서 구국의 공동책임은 분담케 할 것.
  2. 내전을 전면적으로 즉각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할 것.
  3. 상하이의 애국운동 지도자들을 석방할 것.
  4. 모든 정치범을 사면할 것.
  5. 인민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6. 애국적 단체를 조직할 인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 쑨원(손문) 박사의 유지(遺志)를 이행할 것.
  8. 전국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

이 요구 조건에 대하여 중국 공산당과 중화소비에트 정부의 홍군은 즉각 찬성을 표시하고

공산당 대표들이 시안으로 날아왔고 공동항일투쟁 의사를 발표하였다.

 12월 14일에는 동북군 약 13만 명, 서북군 4만 명, 홍군 9만 명으로 구성된 "항일연합군"이 구성되고

장쉐량이 연합군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홍군과의 전투명령은 즉각 중지되었고 항일연합군은 새로운 전열을 가다듬고 일본과 전쟁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는 국민당의 사전검열로 서북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일체 보도되지 않았고

장쉐량은 그저 반란군으로 묘사될 뿐이었다.

난징의 국민당 정부는 총통의 체포와 구금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서북지역의 반란군을 응징할 준비를 하였고 이는 난징정부의 내부권력 투쟁양상으로 번지게 되었다.

 

 

 

장제스와 부인 쑹메이링 여사

 

 

구금되어 있는 동안 장제스는 저우 언라이(주은래)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와 면담을 가졌고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송미령)을 비롯한 난징정부의 대표단이 시안으로 날아와 막후협상을 벌였다.

대다수 동북군 장교들은 장제스를 '인민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산당 및 다른 온건파들은 장제스가 그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어야만

10년간의 국공내전이 종식되고 위신이 깍이지 않은 채 난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제스의 실각이나 죽음은 또 다른 내전의 빌미가 되고 결국 일본만 이득을 본다는 것이다.

동북군의 젊은 청년장교단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8개 요구항에 대한 문서 서명확인없이 12월 25일 석방되었다.

반란군, 공산당과 난징 정부 대표들 사이에 정확하게 어떠한 합의가 도출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장제스는 더 이상 내전이 없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보장했고

장쉐량이 제공한 비행기 편으로 난징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이때 장제스의 체면은 손상하지 않기 위해 장쉐량 자신도 함께 난징으로 가서 스스로 반란에 대한 처벌을 기다렸다

 

시안 사건 발생이후 3개월간 중국내 정세는 180도 선회하게 되었다.

장쉐량은 난징에서 총통에게 스스로 처벌을 요청하였고 12월 31일 군사법정에서

10년 금고형과 5년간의 공민권 박탈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날로 장제스의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 다시는 동북군이나 어떠한 군사권도 갖지 못했고

사실상 장제스의 포로로 1950년 장제스가 타이완으로 도주할 때도 데려갔으며

대만에서도 오랫동안 가택연금 상태로 있었으며 시안 사건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장제스는 반란을 막지 못한 무능을 탓하며 사의를 표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는 사실상 정치적 연극에 불과했다.)

이후 국민당 정권내 대대적인 친일파 관료들의 숙청이 이루어졌고 그 자리는 '구미파(歐美派)'로 채워졌다.

 이어 열린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형식적으로 반란군의 8개항을 거부했으나

국가의 당면한 최대의 문제는 "공산당 축출과 통일"이 아니라 "실지회복"임을 결의했다.

또한 장제스가 오랫동안 연기해온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결의하고

조속히 민주제도를 도입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정치적 발언과 언론의 자유를 선포하고 정치범을 석방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공산당에는 4개항의 화평조건을 제시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홍군을 해체하고 국가의 단일 군사력(국민당군) 아래 편입할 것.
  2. '소비에트 공화국'을 해체할 것.
  3. 쑨원 박사의 삼민주의와 배치되는 공산주의 선전활동을 중지할 것.
  4. 계급투쟁을 포기할 것.

이러한 요구조건을 제시하면서 난징정부는 반란군의 요구사항과 공산당의 '협력'제안을 거부하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교묘하게 반란군의 8대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주는 책략을 썼다.

이러한 정책은 난징정부 내에서도 강경파의 반발이 있었지만

장제스는 유화정책 강행하였고 2월에는 교묘하게 동북군을 이동시키고

서북군을 국민당군으로 편입시키고 3월에는 서북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으며

이후 서북지역을 장악한 상태에서 공산당과 협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장제스는 공산당의 대표자 저우언라이등과 여러차례 협상하면서

 마침내 공산당과의 협력관계를 시작했고 공동으로 항일투쟁을 벌인다는 약속을 하였다.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으로 본격적인 중국 침략을 강행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 2차 국공합작을  이루어 일본과 전쟁에 나섰고

 이 관계는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중경에서 만난 장개석과 모택동 - 1945년 8월 26일

 

 

 

 

1945년 8월 26일 중경 공항에 도착한 모택동은

당시 미국대사 패트릭 헐리(Patrick J. Hurley)의 영접을 받았다.

  장개석과 모택동은 다시 한 번 담판의 자리에 섰다.

항일전쟁을 앞두고서 중경에서 만나 국공합작을 이끌어냈던

이들은 다시 한 번 합작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장개석 뒤쪽에 그의 아들이자 이후 대만의 총통을 지낸 장경국의 모습이 보인다.

 

 

 

대일본 전쟁 승전 기념 파티에서 건배를 하는

 모택동(마오쩌둥)과 장개석(장제스) - 1946년

 

 

 

 

 

베이징 천안문 개국대전에서 전세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는 모택동 - 1949년 10월 1일 

 

 

 

 

 

시안사건은 당시 열세에 있던,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절호의 여유를 주게 되었다.

이에 따라, 2차대전 종료후 벌어진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게 된다.

그 결과로 공산주의를 채택한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면서 대륙을 지배하게 되었고,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도피했다.

장쉐량의 시안 사건은 세계사의 물줄기가 바뀐 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타이완 국민당 정부는 장제스가 세상을 떠난 2년 후인

1977년 5월에서야 장쉐량을 연금에서 해제했으며

 1993년 12월 미국으로 갈 수 있게 허용을 했다.

 장쉐량은 1995년 이후 하와이에서 노후를 보냈으며

2001년 4월 1백수 때는 중국과 대만에서 축전을 받았었다.

부인 자오이디(趙一荻)는 2000년 6월 88세로 숨졌다.

1936년 12월 국민당의 장제스(蔣介石)를 체포

일본 침략군에 맞서기 위해 공산당과 합작토록 요구해 관철시킨

 시안(西安)사건의 주인공 장쉐량(張學良)은

2001년 10월 14일 백수를 채운 나이 101세로 미국 하와이에서 사망했다.



 

 

 

 

 

from : johnmarian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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