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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장성들의 훈장붙이기 패션에 영향을 준 소련군 주코프 원수[Georgy Zhukov style North Korea Generals Military Uniform Fashion ]

슈트름게슈쯔 2012. 11. 8. 14:04

 

 

게오르기 주코프(1896 ~1974)

 

 

 

 

게오르기 주코프는 19살때인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징병되어

일개 병사로서 제 5 예비 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훈련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신병훈련이 끝나자마자 장교의 권유로 부사관 교육과정에 다시 들어갔다.

그는 1916년 봄 부사관으로서 교육을 받기 위해 제10용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주코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용감하게 싸운 덕분에 성(聖)게오르기 십자훈장을 2번 수여받았다.

러시아 민중들이 러시아 제국의 무능과 핍박에 저항한 러시아 10월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군은 해체되어 주코프는 집에 돌아왔고,티프스에 걸려 1년여를 요양했다.

이후 소련군에 부사관으로  입대하여 러시아 내전에 참전하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처음에는 부사관의 계급이었으나, 부대내에 배속된 정치장교의 추천으로 장교 교육과정에 입학했다.

이후 장교로서 군에 돌아와 계속 승진하여 기병 대대장이 되었고,

이때 농민반란을 진압한 공적으로 인해 적기 훈장을 수여받았다.

 1923년 기병 연대장,1930년 5월에는 기병여단장으로  계속 승진을 거듭했다.

후에 소련군 기병감찰관보좌관, 제4기병사단장, 제3기병군단장, 제6 기병군단장을 역임하였다.

주코프 원수는 군대의 기계화에 의한 전쟁 곧 군대의 시대변화에 대비한 유능한 군인이었다.

그는 기계화부대의 운용과 새로운 이론의 강력한 제창자중에 한 명이며,

자신이 수립한 계획에 치밀하여 엄격한 훈련과 군율을 실시하는 군인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스탈린에 의한 1937년부터 1939년까지의 대숙청에서 살아 남았고,

중장으로 승진하여 벨라루스 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과 몽골인민공화국의  국경구획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일본의 관동군과 여러번의 국경충돌이 일어났다.

1939년 6월 몽골 국경의 할힌골(노몬한)에서 벌어진 몽골인민공화국군과

만주국군의 작은 충돌이 양국의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었던 소련과 일본의 충돌로 발전하였다.

처음에 관동군은 처음에 소련의 국경방위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의도로 전투를 개시하였으나

급속히 대규모 전투로 발전하여 최종적으로는 전차 500대이상, 항공기 500기이상,

병력수 수만명이 투입되는 정규전 수준까지 이르렀다.

1939년 5월 28일 제 1차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 1,500여 명은 숫적으로

우세한 2,000여 명 이상의 일본 관동군과 맞서 싸웠다.

병력 면에서 소련군은 열세였으나, 장갑차와 야포, 자주포의 숫자는 더 많았다.

이 덕분에 소련군은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선전하였다.

1939년 7월,8월에 벌어졌던 제 2차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 관동군은

처참히 전멸하여 후퇴했다.

중국군과 대규모의 혈전을 벌이고 있던 일본 일본 육군에게,

이것은 자신들이 겪은 최초의 재앙적 대패였다.

이 전투에서 현대화된 소련군의 기갑 전력에 “총검 백병주의”를 앞세우던 관동군은 참패하여

소련이 요구하는 대로 할힌골 강을 경계로 만주국과 몽골의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이 전투 이후 그 동안 계속되었던 소련-일본 국경 분쟁은, 이로써 결국 끝을 맺었다.

 

 

1942년 8월 주코프는 소련군의 최고사령관대리에 임명된후,

독일군의 맹공을 받던 스탈린그라드 구출을 위해 파견되었다.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서는 소련측도 100만 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나왔지만,

1943년 1월 독일 제6군을 포위 궤멸시켜 동부전선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이 공적으로 주코프는 원수로 승진했다.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에서는 니콜라이 바투틴을 돈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독일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1944년 1월에는 레닌그라드의 포위를 해제시켰다.

 1944년 6월부터 개시된 소련의 대반격작전(바그라티온 작전)과

계속된 1945년 1월 독일본토에 대한 침공오데르-나이센 작전)을 지휘하여

4월에 베를린을 점령(베를린 공방전)하고 독일의 카이텔 원수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았다.

 전쟁 승리 후 그대로 소련의 독일점령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대조국전쟁에서 대활약했던 군인으로 영웅시되어,

1945년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전승퍼레이드를 벌일 때

주코프는 스탈린을 대신하여 말을 타고 참여부대의 사열을 받았다.

 

 

 

 

 

주코프는 소련방 영웅(4회), 몽골 인민공화국 영웅. 승리훈장 2개, 레닌훈장 6개,

10월혁명훈장, 적기훈장 3개, 일등 스보로프훈장 2개를 수상.

제2차 세계대전 중 최고사령관으로 41번의 감사장을 수여받았다.

방공군(소련에서는 육해공군 이외에 방공군과 전략로켓군이 별도의 편제로 존재했다.)의

지휘관아카데미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에서는 그의 이름이 붙은 거리가 존재한다.

모스크바, 에카테린부르크, 옴스크, 트베리, 하르코프, 쿠르스크 등에는 기념비가,

주코프시에는 동상이 고향 스토렐코프카에는 화강암의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1995년 주코프의 탄생일 100주년을 기념해 러시아 연방정부는 주코프 훈장을 신설했다.

 

 

 

미국 패튼장군과 가슴에 훈장을 잔뜩 붙인 소련군 원수 주코프

 

 

 

 

소련군 주코프 원수의 훈장붙이기 패션을 전수받은 북한군 장성들의 훈장붙이기 패션

 

 

 

 

 

 

photo from : artist.maestr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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