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쟁 범죄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브라우히치[Yamashita Tomoyuki & Walther von Brauchitsch]

슈트름게슈쯔 2012. 11. 26. 19:53

 

 

야마시타 도모유키 ((山下泰文: 1885~1946)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구 일본 육군의 군인으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계급은 육군 대장으로 그의 별명은 말레이의 호랑이였다.

그는 일본 고치현 출신으로 일본 육군 사관학교와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그는 스위스와 독일로 유학을 떠났고, 귀국 후에는

육군성 군사 과장과 군사 조사 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야마시타는 일본의 우익 성격 군인들이 일으킨 2.26 사건에서는 황도파의 중심 인물로서

 반란 부대에 대한 이해를 나타내었다.

그리고 2.26 사건 종료이후에 야마시타는 군에서 은퇴를 각오했으나,

 가와시마 요시유키(川島義之) 당시 일본 육군대신의 배려로 군에서 살아남았다.

하지만, 사건의 영향으로 일본 육군성은 한동안 일본 내에 그를 배치시키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일본 육군 제25군 사령관으로 말레이 작전을 지휘하였다.

 일본의 언론들은 그를 "말레이의 호랑이"라고 불렀다.

싱가포르가 야마시타의 통치 하에 놓였을 때,중국인 게릴라들과 적군 협력자들의 대량 처형이 이루어져

2차 세계대전 이후 싱가포르에서는 반일 감정이 드높았다.

 한편, 야마시타는 통치할 시기에 "바나나 노트"라고 불린 군표를 발행하고,

복권을 발매해 재산 축적에도 힘썼다.

이 때문에 그의 사후에 그가 싱가포르에 숨겨놓은 보물 찾기에 한동안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말레이 작전의 성공으로 야마시타는 일본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천황이었던 쇼와 천황은 야마시타에게 자신을 방문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2.26 사건 당시에 천황을 앞세워 반란을 정당화시킨

야마시타의 행동이 원인이었다고 하며, 도조 히데키(東條 英機) 수상이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이 설로 통제파였던 도조 히데키가 황도파였던 야마시타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파악할 수 있다.

 

 

 

스기야마 육군 원수와 야마시타 - 1942년 싱가포르

 

 

 

싱가포르 공략에 있어서 큰 공을 세운 야마시타였지만,

 도조 히데키의 반감에 의해 만주로 좌천돼 큰 작전을 맡진 못했다.

그러나, 패색이 짙었던 1944년 제14방면 일본 육군 사령관으로 기용되어

 일본 육군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대한 방위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나, 레이테 섬과 루손 섬에서의 연이은 패전으로 인해 1945년 9월 필리핀의 바기오에서 항복하였다.

 

항복할 당시에는 포로로 취급받았지만, 곧 전범으로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군사 재판을 받았다.

야마시타는 마닐라 대학살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언도받았고,

사형 판결 후에 미국 육군의 법무 장교가 중심이 된 야마시타의 변호 인단은

 판결에 불복해 필리핀 최고 재판소, 미연방 최고 재판소에

사형 집행을 금지하는 인신보호령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미국 최고 재판소는 6 대 2의 투표로 소청을 기각하고 야마시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처형은 그가 원하던 군복을 착용하는 것이 인정되지 않고, 죄수복을 입은 채 이루어졌다.

처형된 이후, 그는 다른 B, C급 전범들과 함께

일본 전쟁 범죄자들의 안식처인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나치 독일에 일본 군사 사절로 방문한 야마시타 - 1940년 겨울

 

 

 

나치 독일군 장성들과 야마시타

 

 

 

히틀러를 만난 일본 군사사절단과 야마시타 - 1941년 초

 

 

 

나치 독일의 육군 원수 브라우히치에게 일본도를 전달하는 야마시타 도모유키 - 1941년

 

 

 

1940년 12월 말기에 일본 육군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군사 시찰을 목적으로

군사 시찰단을 편성하여 일본으로 파견한다.
이 군사 시찰단의 단장은 일본의 동남아시아 침략 전쟁시

 말레이의 호랑이라고 별명 붙여졌던

야마시타 토모유키(山下奉文) 중장이었다.
이들은 독일의 군사 시설과 전술 등을 시찰하고

해가 바뀐 1941년 년초에 야마시타는 히틀러와 대면한다.

히틀러는 야마시타에게 일본의 대소련전 참전을 요구하지만

그는 일본 정부의 지시가 있어야 한다는 이유를 대고 사실상 거절한다.

 이후 그들은 1941년 6월에 발발할 독소전 개전 직전에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여 일본 본국으로 귀환한다.

귀환한 후에 일본 군부에 육해군 통합 지휘체계 확립이나 전술과 병기의

근대화를 상부에 건의했었지만 얼마 있지 않아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이들의 건의안은 흐지무지한 건의가 되어 버린다.

2차 세계대전및 태평양전쟁이 끝난 전후 1년 후인 1946년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필리핀 마닐라에서 대학살을 자행한

 전쟁 범죄의 유죄 판결에 따라 교수형에 처해진다.

 

 

 

미군에게 항복을 하러 가는 야마시타 도모유키 - 1945년 9월 필리핀 바기오

 

 

 

미군과 필리핀군 주최하에 열린 마닐라 대학살 전쟁범죄 법정에서 선서하는 야마시타 - 1945년 필리핀 마닐라

 

 

 

필리핀 마닐라 현지에서 열린 전쟁범죄 혐의 재판에서 증언하는 야마시타 - 1945년

 

 

 

 

 

photo from : ww2incolo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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