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쟁 범죄

일본의 조선인 간토 대학살과 쥬고엥 고짓셍[Japanese Ganto slaughter of innocent Korean people]

슈트름게슈쯔 2013. 2. 9. 03:03

 

 

 

1910년 7월 23일 일본정부의 현직 육군대신 자격으로 3대 통감에 부임하는

 테라우치 행렬이 서울의 일본인 거리를 지나고 있다.

일본의 대한제국  합병과 동시에 테라우치는 조선총독부의 초대 총독이 되어

무단통치를 감행하였고  6년 후에는 일본 내각 총리 대신이 되었다.

 

 

 

 

일제는 1910년 9월 30일부터 조선 총독부에 임시 토지 조사국을 두고

 1912년에는 토지 조사령을 공포 하여 조사 사업을 촉진 한다는 미명하에

 조선의 국토를 실제적으로 강탈하기 위하여 1918년 까지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한다.

 

 

 

일본인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소작 마저도 할 수 없게 된 조선 농민들이

대도시 주변에 가마니나 거적을 덮어 움막을 짓고 토막민으로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산으로 올라가 불을 질러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화전민이 되기도 했으며 만주와 일본 등지로 이주하기도 했다.

 

 

 

1909년 국내 최초로 근대적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이 생겼다.

하지만 이 은행은 이름만  한국이지 실은 일본 은행이었다.

 한.일 강제병합으로 한국이란 표현이 금지되면서 1911년엔 이름도 조선은행으로 바뀌었다.

 주된 역할은 일본의 대륙 침략에 필요한 자금을 대는 것이었다.

 

 

 

 

 

일제가 1908년 12월 자본금 1천만원으로 설립한 식민지 경제 수탈의 본거지였자 악명높았던 동양척식 회사.

서울 종로구 을지로 2가에 있었다.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은 일본 정부로부터 거액의 융자를 받아서 한국의 토지를 손에 넣었다.

 토지조사 사업이 끝났을 무렵에는 7만8천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여 한국 최대의 지주가 되었다.

 동척의 소작료는 일반 민간보다 상당히 고율이었을 뿐 아니라,

 수탈 방법도 악랄하였으므로, 한국인들의 동척에 대한 원한이 매우 깊었다.

 

 

 

만주로 이주되는  조선인들 - 1911년 중국 랴오닝성  Tieling

 

화물 열차에 탄 조선인들 밑으로 철로변에서 마스크로 얼굴을 거린 일본군이 서있는 장면이다.

당시 일본인이 찍은 이 사진의 배경 설명으로 전염병에 걸려 중국 랴오닝성 철령지역에

기차로 옮겨지는 조선인들이라고 설명해놓고 있지만 조선인들의 표정으로 볼때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만주에서 일본군에게 학살된 조선인들 -1911년

 

위의 장면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1910년에 강제 체결시킨 한일합방 1년후

만주에서 일본군들이 조선인들을 잡아 총살형을 공개적으로 보이기 위해서 발포시킨 이후의 장면이다.

1876년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유발시켜 이를 빌미로 배상을 요구의 일명 병자수호조약이라고 알려진

강화도 조약을 체결시킨후 조선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한반도 침략과 강탈의  발판으로 삼게된다.

조선으로부터 국권을 빼앗은 일본은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을 설립시켜

조선인들을 자본으로 식민지화 시키며  여러가지 방법으로 자본 수탈을 가속화 시킨다.

이에 따라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은 조선을 떠나 만주로 쫒겨남에 따라 그곳에서

유랑민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된다.

  벼농사가 곤란하여  논농사의 북방 한계선이었던 만주로 넘어온

조선인들은 별명이 물바구미로 불릴 정도로 추운지방에서도 벼로 논농사를 지을수 있었다.

만주지역에서도 황무지를 논으로 개간하여 그들이 지을수 없는

벼농사의 기술를 가지고 있어서 그나마 소작민으로 살아갈수 있었다.

 

 

 

조선인을 잡아 얼굴에 칼을 찌르고 공개 처형장으로 끌고 가는 일본인

 

 

 

조선인들을 잡아 나무둥치로 때려 죽인 일본인들 - 1923년

 

 

 

 

 

사악(邪惡)한 일본인(日本人)들이 관동 대지진 피해의 원인을

 

조선인이 저질러 발생했다고 그 책임을 돌려 자행한 무고한 인명 살상 대학살의 만행 - 1923년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인 간토 대학살은 1923년 당시 천재지변으로 인한 지진의 혼란 와중에서

일본 민간인들과 군경에 의하여 무차별적으로 자행된 조선인을 대상으로 벌어진 대대적인 학살사건이었다.

희생자 수는 약 6,000명 혹은 6,6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3년 도쿄 일원의 간토 지방은 지진으로 인하여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민심과 사회질서가 대단히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트는 가운데,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사실확인도 없이 보도되었고, 보도 내용에 의해

더욱 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아사히신문,요미우리 신문등

 여러 신문에 다시 실림으로써 조선인(또한 중국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라는 거짓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지진으로로 인하여 물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일본인은 화재를 굉장히 두려워 하였으므로,

 이러한 소문은 진위 여부를 떠나 일본 민간인에게 조선인이아 중국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하였다.   

 

 곳곳에서 일본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불심검문을 하면서 조선인이나 중국인으로 확인되면

가차없이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죽창이나 몽둥이,일본도 등으로 무장하였고,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우선 조선식이나 중국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당하였으며,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이나 중국인 타지역 출신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

 외국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한국어에 없는 어두 유성음및 종종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 등으로 이루어진) “十五円五十銭(15엔 50전)”(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쥬-고엥 고짓셍을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다.

이때, 조선인뿐만 아니라,중국인및 류우큐우인과 한 글자로 된 외자 성으로 인해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이 제도 출신,지방에서 도쿄로 와 살고 있던 지방의 일본인(특히 도호쿠,고신에쓰,홋카이도)출신)

미국,영국등 서양 출신으로 도쿄에 기자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받고 살해당하는 등,

 자경단의 광기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까지 피신하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자경단이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끄집어 내어 학살하였다.

외국인이나 타 지역 사람들이 도쿄에 가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경찰은 살인을 보고도 방관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였으며,

 오히려 조선인을 조직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야쿠자등 비공권력 범죄 집단의 일부가 조선인을 숨겨주는 일이 있었다.

 조선인 학살과 더불어 사회주의자,아나키스트,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에 요주의 인물로 등록되어 있던, 주로 좌파 계열의 운동가에 대한 학살사건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