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rman Tank

바르샤바 봉기군 진압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의 판터 전차[German Panther Tank into attack Warsaw Uprising]

슈트름게슈쯔 2013. 1. 19. 19:05

 

 

 

 

 

바르샤바의 봉기군 전투지역에 투입된 독일 제 19 기갑사단의 판터 전차대 - 1944년 8월

 

 

 

독일군에게 노획한 라이프슈탄다르테 복장을 입고 있는 폴란드 바르샤바 봉기군과 노획한 판터 전차 - 1944년 8월

 

 

 

 

 

 

노획한 판터 전차위의 폴란드 바르샤바 봉기군 - 1944년 8월 

 

이들은 독일군에게서 2대의 판터 전차를 노획하였지만

 

나중에 독일군에게 공격당하여 전원 몰살하게 된다.

 

 





 

 

 

 

바르샤바 봉기군 진압 전투에 동원된 독일군 브룸베어 자주포 - 1944년 8월

 

 

 

 

바르샤바 봉기군 진압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 슈트름게슈쯔 돌격포 - 1944년 8월

 

 

 


 

 

 

 

1944년 6월 소련군은 1812년 나폴레옹 전쟁 당시 그루지야 출신의 영웅이었던 바그라티온의 이름을 따서

독일군에 대한 반격의 바그라티온 작전을 개시했다.

소련군은 그동안 준비하고 비축해온 대단위의 엄청난 물량 포격을 가하여 독일 중앙 집단군을 완전히 괴멸시켜 버린다

그에 따라 독일군 전선에는 거대한 돌파구가 생겨났고 소련군은 그곳을 통해 엄청난 속도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7월에 이르게 되자 폴란드 바르샤바에 소련군의 포격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진격해 들어온다

바르샤바의 민중들은 이것이 독일에게서 해방될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폴란드인들의 명백한 오판이자 소련군이 간접적으로 제공한 잔인한 희망이었다.

소련군은 폴란드인들의 희망대로 움직여 주는 군대는 결코 아니었다.

폴란드인들의 내심은 한결같 았다. 

그것은 자국을 침략한 양세력인 독일의 지배뿐 아니라 소련의 지배도 원치 않았다

역사적으로 오래전 뿐만 아니라 소련은 바로 몇년전이었던 5년전인 1939년에

 독일과 양분하여 폴란드를 침공했고

폴란드 군의 장교들및 지식계층 15000여명을 학살한 카틴숲 학살 만행으로

폴란드 국민들은 소련이 어떤 국가라는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에 피난해 있던 폴란드 임시정부는

폴란드 국내에 저항운동을 벌이던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에게 봉기를 지시한다

그것은 스스로 독일군을 몰아내서 소련의 입김을 차단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1944년 8월 1일 폴란드 국내군은 바르샤바 시내에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8월 1일 5시를 기하여 바르샤바의 국내군은

볼 코모로프스키장군의 지휘하에 독일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또한 수많은 시민들이 이에 가세하게 된다

순찰대에겐 총격이 가해졌고 차량에는 화염병이 날아들었으며

시내에 바리케이트가 만들어져 독일군을 고립시키기 시작한다

이 작전은 매우 성공적으로 3시간만에 시내의 독일군들은 소규모 부대단위로 포위당했으며

주요 시가지의 대부분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처음에는 소총이 모자라서 애를 먹지만 봉기 2일째에 독일군 보급창을 터는데 성공하여

제대로된 무장을 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군 2500명이 다치거나 사망했다.

소총과 기관총뿐 아니라 군복,및 독일군에게서 노획한

판터전차 2대와 Sd.Kfz 251 하노마그 장갑차 2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군복이나 무기가 독일군과 동일하다보니 피아간의 식별을 위해

팔에 적과 백 두가지색의 폴란드 국기를 두른다.

 

이에 대하여 소련의 스탈린은 기분이 언쟎은 입장이었다

폴란드는 독소 전쟁의 전리품이라 생각했던 그에게

영국에 있는 임시정부의 지시를 받는 폴란드 국내군의 봉기는 눈엣가시였다.

왜냐하면 자기도 폴란드를 위성국가화 하려고 벌써 임원까지 다 뽑아놓은 상태였던 것이었다.

마침 부대들도 재편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8월 2일 갑자기 진격을 멈춰 버린다.

게다가 영국정부는 바르샤바의 봉기군에게 보급을 해주기 위해

수송기가 소련군의 비행장을 경유할수 있도록 요청하지만 스탈린은 그것도 거절해 버린다. 

이것으로 사실상 봉기군의 운명은 끝났던 것이었다.

 

소련군이 진격을 멈추자 여유가 생긴 독일군은 바르샤바의 봉기군에 대한 진압에 들어가게 된다.

"폴란드 돼지들의 도시를 지구상에서 지워버리고 인정사정 없이

여자건 아이건 다 죽여라"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지시하에

시내에 아직 고립되어 있던 독일군을 구출하고

봉기군을 진압하기 위해 인근에 있던 독일군 친위대 SS부대들이 시내로 진입한다

독일 친위대 SS딜레방어 부대와 SS카민스키 부대의 악랄한 전쟁 범죄가 시작된 것이다. 

 

이 두 부대는 바르샤바에 진입한 첫날인 8월 5일부터 살육과 약탈,강간을 개시하는데

딜레방어사단은 볼라와 오코타지구에 진입한 첫날에만 38000명의 시민을 학살한다.

특히 볼라지구의 세인트 라차루스병원에서만 1380명의 환자와 의료진이 처형되었다.

그런데 정작 독일군이 진격한 거리는 겨우 1킬로였다.

그것은 말 그대로 전투는 뒷전이고 살해와 강간과 약탈이 목적인 상황이었다.

그렇게 봉기 초반에 학살된 바르샤바 시민만 65000명에 달했다.

 

 

공중에서는 독일공군의 수투카 급강하 폭격기들이 폭탄을 투하하며 폭격을 자행했다.

그러한 가운데 독일군의 만행을 목격한 수많은 시민들은 국내군에 가담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바르샤바 시내에 있던 게토와 강제수용소를 개방하여 유대인도 봉기군에 합류하게 된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국내군을을 위한 무기를 맨손으로 만들어 내었다

수류탄과 사제 박격포및 화염방사기와 심지어 장갑차까지 자체적으로 만들어 냈다.

 

8월 8일 봉기군은 자체 라디오 방송 [섬광]을 개통하고 국

민들에게 독일군을 폴란드에서 몰아낼 것을 촉구한다.

8월 둘째주에 접어들자 독일군의 진압작전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독일군 19 기갑사단이 봉기군 진압에 증원되었으며

판터 전차와 슈트름게슈쯔 돌격포및 브룸베어 자주포까지 동원한 진압 작전은

봉기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전차와 장갑차 9대가 격파되며 실패로 끝났다.

이에 따라 독일군은 전차와 장갑차에 바르샤바 시민들을 묶어 인간방패로 이용하는 악랄한 짓까지 자행한다.

바르샤바 봉기군의 저항은 완강했지만 공군과 기갑부대까지 동원한 독일군에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정수시설을 빼앗겨 시내로의 수도 공급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자 봉기군은 시내에 우물을 파서 버티는데 9월까지 90개의 우물을 만들었다

 

8월 14일에 이르자 양쪽 군대의 최전선이었던 시 외곽의 구시가지에서 봉기군은 거의 밀려나고 있었다.

독일군은 포병과 기갑부대와 보병이 연동하여 건물 하나하나를 파괴시키며 봉기군을 조여오고 있었다

결국 구시가지를 포기한 봉기군은 하수도를 이용해 탈출했는데

독일군들은 시가에 남아있던 시민들을 모두 처형했으며

특히 미처 대피하지 못한 야전병원의 부상자와 의료진들을 산채로 화형을 시켜버린다

이 구 시가지의 전투에서 봉기군은 7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독일군은 3900명의 사상자를 냈다. 

 

8월 17일에 다다르자 독일군은 완전히 바르샤바를 초토화시키지 위한 작업을 착수한다

바로 칼-마우저 600mm 대구경 자주박격포와 150mm 브룸베어 자주포와

네벨베르페 로켓발사기를 장착시킨 하노마그 장갑차와 슈트름티거 자주포및

유선 조종 대전차폭탄 골리아테를 동원한다.

9월에 접어들어 영국과 미국은 폴란드 국내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정하게 된다.

사실상 영국,미국과 함께 싸우던 자유 폴란드군과 소련군과 함께 싸우던 동방군단을 합치면

미국,소련,영국에 이어 4번째로 참전 규모가 큰 국가였다.(자유프랑스군은 폴란드군보다 더 적었다)

하지만 교활한 소련은 향후 폴란드를 점령하는데 문제가 생길수도 있는 관계로 인정을 거부한다.

 

이때 독일군측의 사정은 내우외환의 형세였다.

소련군의 공세가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데 후방에 몇개의 사단이

바르샤바에서 봉기군에게 발이 묶여 있으니 답답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독일측 사령관인 폰 뎀 바하 SS중장은 유화 술책을 겸용하기로 결정하고

폴란드 적십자와 협의하여 9월 9일과 10일 양일간에 걸쳐 무고한 시민은 도시를 떠나라는 포고를 내리고

이에 따르는 수천의 시민이 탈출하는 2시간 동안은 사격을 멈춘다

또한 봉기군에게 항복을 권하지만 봉기군은 항복을 거부한다.

 

9월 11일 소련군에 속해있던 폴란드1군이 동포들을 구하기 위해 바르샤바 외곽을 지키던

독일 19기갑사단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저항은 완강했고 정면으로 돌파하여 들어갈수 없게 되자

야음을 틈타 수일에 걸쳐 수천의 병력을 바르샤바 시내로 침투시키려 했다.

하지만 얼마후 발각되어 격퇴당하고

일부만이 바르샤바로 진입하여 봉기군에 가담할수 있었다.

 

소련은 그제서야 생색을 내며 연합군의 비행장 이용을 허락하였지만 이미 봉기군은 수세에 몰린 뒤였다

미 공군소속의 폭격기 110대가 9월 18일 바르샤바 시내에 보급품을 투하하지만

이미 바르샤바 시내의 많은 지역이 제압당한 상태라 20%만이 봉기군의 손에 들어갈수 있었다.

또한 소련도 공수로 보급해주겠다고 선언하고 수송기를 날리지만

실상 이건 보여주기식의 선언이었고 한줌밖에 안되는 보급품을 공수해주었다.

당시 봉기군 병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나마도 낙하산도 부착시키지 않고 투하 시켜서 총기류는 모두 고장이 났고 총탄은 모두 흩어졌으며

빵은 딱딱하게 말라버린 마른빵을 보내서 땅에 떨어지자 마자 가루가 되버렸다고 한다.

 

9월 중순이 지나자 독일군은 수세에 몰린 봉기군을 괴명시키기 위해 결정적인 공세를 벌인다

9월 27일 3일간의 전투끝에 모토코프를 함락시키고 야전병원의 국내군 부상병과 의료진을 모두 처형시켜 버린다

모토코프에서 탈출하던 150명의 봉기군 병사들은 길을 잘못들어 독일군 진지로 들어갔다가 생포되어 총살당하였다.

이러한 공세를 펼치면서 독일군 폰 뎀 바하 사령관은 항복하면 제네바 협정에 의거하여 처우를 해주겠다고 방송한다

다음날인 28일 드디어 항복에 대한 양측 간의 협상이 시작되는 가운데

29일에는 촐리보르츠가 함락되면서 봉기군은 벼랑끝으로 몰리게 된다.

 

10월 2일 부터는 모든 교전이 중지되고 최종 협의에 들어가는데

이러는 가운데 봉기군은 항복의 준비를 하게 된다

바로 전사자들의 신분증등을 소련군 소속인 폴란드1군 병사들에게 맡기고 탈출시켜서

그들의 기록을 후세에 남기게 하고 함께 싸웠던 유대인들에게 위조신분증을 만들어주기 시작한것이었다.

 

그리고 10월 5일 조건부로 완전히 항복을 하게 된다

항복조건은

  1. 항복한 시민군은 범죄자가 아닌 전쟁포로로서 대우할 것
  2. 포로들의 관리는 친위대가 아닌 독일 육군에서 담당할 것
  3. 비전투원인 일반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것
이었다.

 

사실 시민군들은 군복만 벗으면 일반 시민과 다를바 없었지만

 시민군들은 스스로 포로가 되는 길을 택하고.

그렇게 포로가 된 시민군은 15000명에 달했다.

시내에서 나온 일반시민 33~55만명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으며

그중 9만명은 노동수용소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해야만 했다.

또한 일부 국내군 병사들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한채 하수도에서 전투를 벌이다

화염방사기를 동원한 독일군의 소탕작전에 죽어 갔다.

 

그리고 독일군은 전 도시에서 시민들을 소개시킨뒤

모든 건물을 돌면서 남김없이 약탈하고

약탈이 끝나자 히믈러의 지시에 따라 바르샤바 시내에 폭약을 설치하여 폭파시켰다.

바르샤바라는 도시를 말그대로 지도상에서 지워버렸던 것이었다..

(당시 약탈물은 화차 3만 3천대 분량에 달했다)

 

 

다음해 1월 7일 폴란드 1군이 바르샤바에 진입했을때

바르샤바는 도시의 85%가 파괴되고 아무런 생명도 없는 돌더미에 불과했다.

그리고 바르샤바 봉기에서 희생된 시민은 총 20만명에 달했으며

이렇게 폴란드의 저항세력은 뿌리채 뽑혔고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게 되었다.

교활했던 소련의 스탈린이 바랬던 시나리오는

결국 독일군과 폴란드 봉기군을 소진시켜 버리고 

어부지리를 얻는 작전이었던 것이었다.

 

 

 

 

 

 

 

 

 

 

photo from : militaryphoto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