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

조선총독부 건물의 최후[Japanese General Government Building,s Final]

슈트름게슈쯔 2013. 3. 8. 17:20

 

 

일제의 조선 총독부 건설

 

 

 

일제가 서울의 경복궁 입구에 완공시킨 조선총독부 건물 - 1926년

 

 

 

성조기를 꽂은 조선 총독부 건물 앞으로 행진하는 미 제7 보병 사단 군악대와  하지 중장 - 1945년

 

 

 

해방 한달후 미군에 접수된 서울 조선총독부 건물 앞의 풍경 - 1945년 9월

 

 

 

 

 

전 조선총독부 건물 앞에서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 행사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후  조선총독부 건물은 그 이름이  중앙청이라는 건물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서울 함락후  중앙청에 내걸린 북한군의 인공기 - 1950년

 

 

 

서울 탈환후 불탄 중앙청 앞에 포진시킨  7.62mm 30 기관총좌의 국군과 미군

 

  

 

 

서울 수복후 태극기를 게양하는 해병대원 - 1950년 9월 28일

 

 

 

6.25 동란으로 검게 그을리고 파괴된 중앙청의 모습

 

 

 

 

중앙청 앞에 포진된 곡사포

 

 

 

중앙청이 보이는 파괴된 건물속에서 쓸만한 물건을 뒤지는 모녀 - 1950년 11월

 

 

 

1.4 후퇴 1달전의 서울 중앙청 - 1950년 12월

 

 

 

6.25 사변 한국전 당시 서울 수복 이후의 모습 - 1951년 10월 초

 

 

 

광화문이 옛자리로 옮겨지기 전의 모습 - 1966년 10월 29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제자리에 복원된 광화문 - 1968년

 

이후 각 초,중,고교의 교과서및 한국의 각종 서적및 백과사전등에는

 옛자리로 다시 옮겨진 광화문이라고 기록이 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의 모습 - 1988년 9월

 

 

 

84년만에 다시 복원된 광화문 - 1993년 9월

 

광화문은 조선 태조 4년(1395년) 개국과 함께 지은 경복궁의 정문이다.

200년 후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 경복궁 전체가 소실된 채 방치되다가

고종 2년(1865년)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다시 지을 광화문도 중건했다.

1926년 일제강점기 때인 경복궁내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서면서

 광화문은 경복궁내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6.25 한국전쟁으로 광화문 상부가 다시 불에 타 사라졌다.

1968년에 다시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목조 건물이 아닌 철근 콘크리트로 광화문을 건립했다.

그 후 2006년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작업으로 2010년 8월 15일 복원됐다. 

중건 당시에 만들어진 해태상은 일제 때 경복궁 안에 방치됐다가 복원된 광화문 앞에 다시 세웠다.

 하지만 원래위치는 현재보다 80m 앞이다.

그것은 그 곳이 자동차 도로 지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재 위치에 남겨졌다.

 해태상은 광화문 지킴이 역할을 했던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명물이었다. 
  

 

 

 

해방이후 50년만에 비로소 대한민국 서울 중심부의 본 모습을 찾기 위해 일제의 잔재를 철거하는 모습 - 1995년 8월 

 

 

일본이 조선을 강제 침략한 후에 서울의 경복궁 앞에 건립했던

 조선총독부 청사(朝鮮總督府廳舍)는 한일합방의 1910년부터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한 1945년 까지의

 일본 강점기에 조선에서 일본 제국의 식민 통치를 시행한 최고 행정 관청인 조선총독부가 사용한 건물이었다.

또한 조선총독부 관사(朝鮮總督府官舍)는 조선총독부와 유관 기관의 관리들을 위해 지어진 주택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35년의 식민 통치 기간 동안에 조선총독부는 남산 왜성대와

경복궁의 총독부 청사 2곳과 남산 왜성대와 용산,경무대의 총독 관저 3곳을 비롯하여 다수의 관사를 건립하였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일본의 일방적인 한일 병합 조약에 의해서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1907년에 건립한 남산 왜성대의 통감부 청사를 총독부 청사로 전용하였다가

사무 공간의 부족으로 1926년에 경복궁의 홍례문 구역을 철거한 터에 신청사를 건립하였다.

조선 총독의 관저는 남산 왜성대의 통감 관저를 1910년 부터 관저로 사용하였고

 1908년에 건립된 용산의 관저를 별도로 운용하였으며

1937년에 경복궁 신무문 밖 후원 지역에 총독 관저를 신축하였다.

한편 1910년 이후 식민 통치 기구가 정비되면서 조선에 체류하는 일본인 관리의 수가 증가하자

 이들을 위한 관사가 대량으로 건설되어 보급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말기1945년에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조선총독부 청사와 관사는 미 군정청에 인계되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 정부가 청사와 관사를 다시 인계받아 

 대통령 관저와 정부 청사 그리고 박물관등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1950년 6.25 사변 한국전때에는 청사와 관사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해방이후 근 50년의 세월이 지난뒤인 1995년에 이르러서야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중앙이자 조선의 왕궁인 경복궁의  앞을 가로 막고 있던

잔악했던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은 철거가 되기 시작한다.

1995년 8월 15일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일제 강점기의 잔재 청산을 이유로

 그때까지 현존하던 청사와 관사를 모조리 철거하였다.








 

photo from : bl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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