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쾨니히스베르크에서 파괴된 독일 슈트름게슈쯔 3호 돌격포- Destroyed German Sturmgeschutz 3 Assault Gun in the Koningsberg 1945

슈트름게슈쯔 2013. 4. 14. 14:08










 쾨니히스베르크 시 전투에서 소련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크론프린츠 바락 도나 요새 아래에서 

파괴된 독일군 슈트름게슈쯔 3호 돌격포와 폐사한 군마의 사체  - 1945년 4월




독일 쾨니히스베르크 1945 당시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 2013의 교차 이미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동 프로이센 지역 쾨니히스베르크 시의 현재 지명은 칼리닌그라드 이다.

쾨니히스베르크는 19세기 독일의 작가겸 작곡가 겸 화가였던 천재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 호프만과

순수이성비판으로 유명한 18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관념주의 철학자였던 임마누엘 칸트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시간 관념이 철저했던 칸트의 생활에 따라 그가 쾨니히스베르크 시 마을의 어디 어디 부근을 지날때면

시민들은 칸트를 보며 그 시간이 몇시 몇분임을 알수 있거나 지나치는 

그 지점을 기준으로 시간대를 알고서 시계를 맞추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곳은 제 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군과 소련군의 대단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전장이었다.

1944년 3월 소련군의 반격작전에 대대적인 집중공격으로 피난길에 오른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은 소련군의 군인이나 민간인들을 가리지 않고 자행했었던 

지독한 포격에 따라 많은 수의 독일 민간인들이 학살되기도 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후 승전국이 된 소련은 독일로 부터 쾨니히스베르크를 획득하여

현재 러시아의 영토로 이어져 내려 오고 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현재 지명인 도시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 본토와 연결되지 않은 유일한 유럽속의 러시아 영토이기도 하다.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 유일의 발트해 부동항이니 전략적·군사적 가치가 높다.  

쾨니히스베르크는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진 독일 영토였으나 

포츠담회담 뒤 소련 러시아공화국으로 넘어가면서 도시의 이른은 칼리닌그라드로 바뀌게 된다. 

칼리닌그,라드라는 도시의 이름은 1946년 세상을 떠난 소련 볼셰비키 미하일 칼리닌의 이름에서 땄다. 

  1945년 1∼4월 쾨니히스베르크 전투 도중 독일 주민 30만 명이 숨지고 180만 명이 선박 편으로 독일 본토로 탈출했다. 

종전 때까지 남은 소수의 노인·여성·어린이·병자는 소련에 의해 추방됐다. 

텅 빈 땅에 소련 주민이 이주해 오늘날 94만 명이 거주해 살고 있다. 

행정구역 이름도 러시아 냄새가 물씬 나는 모스코브스키, 레닌그라드스키 등으로 바뀌었다. 

러시아 도시 중 공산주의자 이름을 여전히 붙이고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그래선지 이곳 출신인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의 이름을 딴 칸트그라드로의 개명도 거론된다. 

 이 지역은 독일에도 각별하다. 

1255년 이교도 슬라브족을 상대로 ‘북방 십자군전쟁’과 포교활동을 벌이던 튜튼 기사단의 요새 건설이 출발점이다.

 기사단은 현지 삼비아인과 전쟁을 벌일 때 이를 지원한 보헤미아 국왕(오스트리아 대공 겸임) 

오토카르 2세를 기려 독일어로 ‘왕의 산’이라는 뜻의 쾨니히스베르크라고 명명했다.   

1525년 호헨촐레른 가문의 알브레히트가 초대 프로이센 공작이 됐으며 

1657년에 프로이센 공작의 지위와 영토는 같은 호헨촐레른 가문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산하로 넘어갔다. 

베를린을 본거지로 하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세력을 키워 공작보다 높은 국왕의 지위를 원했지만

 명목상의 독일 국왕이 있는 신성로마제국 영토 안에서는 불가능했다. 

대신 제국 영토 밖(제국 형성 이후 독일계가 정복해 주민을 독일화시킨 영토)인 

프로이센에서 국왕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1세는 1701년 프로이센 국왕에 오르고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을 합친 

새 프로이센 왕국은 수도를 베를린으로 잡았다. 

프로이센은 1871년 독일 통일을 주도했으니 현재 독일연방공화국의 직계 조상이랄 수 있다.  

하지만 동서독 통일 당시 헬무트 콜 총리는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칼리닌그라드에 대한 영토적 요구를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전해진다. 

냉혹한 국제정치 현실을 감안한 것이다. 

영토 확장으로 시작된 나치 독일의 야망이 어떤 결과를 빚었는지는 역사적으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칼리닌그라드 시에 세워진 소련군의 쾨니히스베르크 해방 T-34/85 전차 기념탑  - 2017년 4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