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병대

북아프리카 전선 영국군 25파운드포의 야간발사 섬광[WW2 British North Africa Army Ordnance QF 25-pounder Field Gun Night Firing Light]

슈트름게슈쯔 2013. 5. 4. 12:33

 

 

 

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의 영국군 25파운드포 포병대와 독일 아프리카군단의 3호전차대와의 전투를 묘사한 그림

 

 

 

 

 

 

북아프리카 전선 영국군 포병대의 25파운드포 - 1942년 3월 22일

 

  

 

1차 엘알라메인 전투 당시 25파운드포를 이용하여 독일군을 공격하는 영국 제 11포병대 25파운드포 - 1942년 7월

 

 

 

리비아 토브룩 방어진지 영국군 포병대의  25파운드포 야간 발사 섬광 - 1942년

 

 

 

북아프리카 리비아 가잘라 전투시 영국군 포병대 25파운드포의 야간 사격 - 1942년 6월

 

 

 

가잘라 전투시 독일군의 거점에 대한 영국군 포병대의 25파운드포 야간 발사 섬광 -1942년 6월 2일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 이집트와 리비아의 국경부근의

두번재 엘알라메인 전투가 벌어졌던 영국군 포병대의 25파운드포 야간 발사 섬광 - 1942년 10월 23일  

 

 

2차 세계대전 중반기 영국의 버나드 몽고메리 원수는 영국 본토로 부터 195,000명의 병력과 항공기 530대를 지원받았다.

그리고 전차 1,029대와 대전차포 1,451문, 야포 500문과 그외 다수 소구경 포병대의 강력한 병력을 구축했다.

이러한 조건은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병력에 비하여 2대1의 비율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한 관계로 버나드 몽고메리는 영국군이 독일군과 싸워 이길수 있는 그들의 작전과

독일군이 영국군을 상대로 본국에서 타전하는 작전과 그 내용에 대한

울트라 암호 해독의 중요한 정보를 제공받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 영국군의 몽고메리 원수는 독일군 수뇌부의 생각과 작전을 사전에 알수있었다.

그러한 관계로 2차 세계대전 중반기의 독일 아프리카 군단은

물량면에서나 작전면에서나 결코 영국군을 상대로 대등한 전투를

펼친다는것은 불가능한 게임이었던 것이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아프리카 군단의 에르빈 롬멜 원수는

그 별명이 사막의 여우(Desert Fox)로 불렸다.

그리고 영국군 제7기갑사단의 별명은 사막의 쥐 (Desert Rats)였다.

하지만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에 의해 독일군의 암호송수신기

이니그마의 암호를 해독할수 있었던 콜로수스가 발명이 되고나서 부터

독일 아프리카군단은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영국 사막의 쥐(Desert Rats)에 의해

독안에 든 쥐(A rat in a trap)가 되었다.

독일정부보는 독일군이 매번 전투에 실패하여 영국군에게 당하는 패인이

중립국 스페인등지에서 활동하는 연합군 스파이등에 의해

독일의 작전 정보가 새어 나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 독일내에서도 히틀러의 나치정권을 반대하는 스파이가 존재했었다.

하지만 독일인 그들의 무한대에 가까운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니그마 암호가

영국인들에 의해 결코 해독되었으라고는 생각할수 없었다.

그만큼 그들은 이니그마 암호가 결코 해독할수 없다는 암호라는데 대한 확신은 강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해군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1차 세계대전의 승리 후

곧 바로 영국 해군이 독일 해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원인은

독일의 암호를 사전에 해독할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발표했었다.

그것은 대단히 경솔했던 발표였다.

그러한 발표는 바로 독일이 이니그마 암호 송수신기를 개발하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영국의 입은 대단히 무거웠다.

즉 1차 세계대전이 끝난후 처럼 그러한 발표를 하지 않았다.

당시 처칠 해군장관은 이제 영국의 수상이 되어 있었다.

그는 아예 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이 입수한 모든 울트라 비밀정보를 불문에 붙이라고 명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비밀은 오랜 세월이 지난후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32년이 지난 후인 1977년에 비로소 전세계에 발표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전선에서 펼쳐진 독일아프리카군단과

영국군의 전투가 주는 교훈은 바로 미래전에 대한 국가와 개인의 정보전이었다.

인간에게 정보는 대단히 소중한 가치를 부여한다.

정보란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해 거두어지기도 하고 발생되기도 한다.

또한 처칠 해군 장관처럼 밖으로 한번 발설되어 버린 정보는 담을수가 없다.

정보도 정보 나름이지만 어떤 경우의 정보는 그 국가의 흥망이나

그 기업의 흥망성쇠을 가늠하는 비밀정보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정보는 결코 외부에 발설이 되지 않아야 정보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할수 있다.

무릇 인생에서 남녀 누구나 성공을 거머쥐려면 한번의 실수를 거울 삼아

두번의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1번의 실수 발표를 했던 사실을 경험삼아 더욱 현명해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처칠수상처럼 모름지기 입이 대단히 무거워야 성공을 할수 있다.

 

 

 

photo from : ww2tod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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