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rman Tank

미군이 노획한 독일군 킹 타이거 전차의 트레일러 수송[WW2 U.S Army Captured German Army King Tiger Tank Culemeyer trailer transport]

슈트름게슈쯔 2013. 6. 12. 12:58

 

 

 

 

 

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 503 중전차 대대의  킹 타이거 전차대를 사열하는 300번 대장 전차 - 1944년

 

 

 

 

 

벨기에 라 글레이즈 인근에서 미군 463 병기 회수 처리부대가 노획한

 

독일군 파이퍼 대령 부대의 332번 타이거 2 전차 -  1944년 12월 26일

 

 

 

요아힘 파이퍼와 아돌프 히틀러

 

 

 

하인리히 히믈러(중앙)와 그의 부관이었던  요아힘 파이퍼(오른쪽)

 

 

독일군의 요아힘 파이퍼는 1933년 나치 독일 SS 전투부대에 입대했다.

 지원서를 살펴본 요제프 디트리히는 그의 아돌프 히틀러 경호 친위대의 입대를 승인했다.

그는 친위대 아돌프 히틀러 경호대 예하 기갑부대 지휘관으로 발령나기 전인

초기 SS시절에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부관으로 복무했다.

히믈러의 부관으로 근무하던 당시 아내인 지쿠르트를 만났고 그 사이에 세 명을 자녀를 두었다.

 아이들의 이름은 각각 하인리히, 엘케 그리고 질케이다.

특히 파이퍼를 총애했던 히믈러는 파이퍼의 영전에 매우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SS 내부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파이퍼는 29살의 젊은 나이에

무장 친위대 대령으로 승진했을 뿐 아니라, 당시 독일군 최고 명예 훈장 중 하나인

 백엽검 기사철십자장을  히틀러에게 직접 수여받기도 했다.

 

 

 

독일 타이거-1 전차의 에이스 미하일 비트만 중위의 전차 대원들과 악수하는 요아힘 파이퍼

 

 

 

 

 

 

요아힘 파이퍼(Joachim Peiper : 1915 ~ 1976)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기갑부대의 요아힘 파이퍼 중령은 여러 주요 기갑 전투에

참전한 경험이 많은 유능한 전투 지휘관이었다.

많은 부하들이 이 "카리스마적인 지휘관"에게 열렬한 충성심을 보였다.

 1943년 동부 전선에서 벌어진 하리코프및 쿠르스크 공세를 포함해 파이퍼는 주목할 만한 전투에 여러 번 참전했다.

요제프 디트리히 휘하 독일 제 6기갑군 소속으로 라인강을 보라 작전에 참가한

LSSAH 사단 예하 병력들이 중심으로 편성된 파이퍼 전투단을 지휘한 일은 특히 유명하다.

 파이퍼 전투단은 미군의 포격과 전차들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연료가 바닥이 날 때까지 진격해 벨기에의 라 글레이즈에 이르렀다.

그러나 결국 그는 연료가 떨어진 6량의 타이거 2 전차를 포함해 타이거-1 전차와 판터 전차들

100여대를 마을에 버리고 독일군의 진영으로 부하 800여명과 도보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말메디에서 요아힘 파이퍼의 명령에 의한 독일군들의 MG-42 기관총 난사로

 

학살당한 미군 포로 병사들의 사체 - 1945년 1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요아힘 파이퍼는 발지 작전에서 라 글레이즈로 이동하던 중

 파이퍼의 지휘하에 약 300명의 미군 포로를 총살한 것과 스타벨롯에서

여성와 어린이를 포함한 131명의 벨기에인을 살해한 혐의로

다른 무장 친위대 병사들과 함께 말메디 학살 재판에 기소되었다.

재판 중 파이퍼와 부하들은 가족을 러시아인에게 넘기겠다는 협박을 받으며 구타당하는 고문을 당했다.

이 때문에 파이퍼는 부하들을 방면한다면 모든 죄를 자백하겠다고 밝혔지만 원고 측은 이를 거부했다.

미국 30 보병사단 119 연대 소속 대대장 해롤드 D. 맥코운 소령은 재판에서

 파이퍼에 유리한 증언을 했지만, 재판분위기를 바꿀수는 없었다.

재판에서 파이퍼가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적어도 두번 내렸다는 것은 여러 증언에 의해 확인되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의 요아힘 파이퍼 죄수번호 42번, 요제프 디트리히는 11번 - 1946년

 

 

 벨기에 민간인을 사살한 혐의에 대해서는 파이퍼는 그들이 파르티잔이었다고 답했다.

파이퍼와 그의 부하들에게는 유죄가 선고되었고, 교수형이 언도되었다.

 파이퍼는 직접 감독자로서 책임을 묻게 된 것이다.

후에 파이퍼는 부하들을 총살형에 처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 요구 또한 거절 당하고 말았다.

무장 친위대는 정규군과 달리 군인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다수의 자백이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협박과 피의자들에 대한 가혹한 대우 등

부당한 강요를 통해 이루졌다는 사실이 문제시되면서

말메디 학살 사건 관련 피고자 다수에게 선고된 형이 감형되었다.

대부분의 감옥 생활을 독방에서 보낸 파이퍼는 1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1956년 12월 13일 감형으로 풀려났다.

나중에 프랑스로 이주했으나 1976년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괴한이 자택에 불을 질러 사망하였다.

 

 

 

미군은 킹 타이거 전차 68톤 무게의 무거운 중량으로 인하여 독일군의 중장비 전용 수송 트레일러인

 

 Culemeyer 트레일러에 실어서 수송을 하고 있다. 

 

 

 

 

 

 미군 463 병기 회수 처리부대가 벨기에 라 글레이즈 인근에서 노획하여

 

독일 Culemeyer 트레일러를 이용하여 미국으로 가져갈 네덜란드 앤트 워프항으로

 

수송하는 킹 타이거 전차 - 1944년 12월 26일

 

 

오늘날 이 킹 타이거 전차는 미국 켄터키주 포트 녹스의 패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미국 켄터키주 포트 녹스 패튼 박물관의 독일 킹 타이거 전차 332번

 

 

 

 

 

photo from : findagrav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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