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토브룩 함락후 독일 아프리카 군단의 포로가 된 3만 5천명의 영국군[WW2 Tobruk Occupation German Africa Korps Captured British 35,000 pow]

슈트름게슈쯔 2013. 7. 13. 18:11

 

 

북아프리카 영국군의 거점이자 요새였던 튀니지 토브룩으로 쇄도해 들어가는 독일 아프리카 군단  - 1942년

 

  

 

 이탈리아군으로 부터 노획하여 차체에 흰색 페인트로 캥거루를 그려 토브룩 전투에 투입시킨 

 

영연방 오스트레일리아군의  M 11/39  탱크 - 1941년 

 

 

 

토브룩 항구에서 이탈리아제 M11/39 탱크를 살펴보는 아프리카 군단 독일군 병사  - 1942년 6월

 

 

 

토브룩에서 파괴된 독일 3호 전차옆에 엄폐한 영국군 - 1941년

 

 

 

트브룩 함락 작전시 영국군의 대전차 포화에 파괴된 독일 아프리카군단의 3호 전차 - 1941년

 

 

 

 

토브룩의  에르빈 롬멜과 그의 부관 바이엘라인 소장 - 1942년 6월

 

 

 

 

 

토브룩이 함락된후 독일아프리카 군단의 포로가 된 35,000명의 영국군과 영연방 인도군 - 1942년 6월

 

 

제 2차 세계대전의 초,중반기였던 1941년 말기부터 1942년 6월까지의 

북아프리카 리비아 사막 토브룩 전투에서

독일 아프리카 군단에게 항복한 영국군 포로의 수는 3만 5천명 이었다

독일 본토에서 북아프리카에 파견되었던 에르빈 롬멜의 토브룩을 점령시킨 전투의

승리 소식을 보고 받은 히틀러는 롬멜을 바로 육군원수로 승진을 시킨다.

하지만 롬멜이 바라던것은 원수직이 아니라 독일 본토로 부터의 전쟁물자 지원이었다.

하지만 제 3 제국 나치 독일의 국운을 건 소련 침공작전의 승패가

걸려 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전력을 쏟느라

히틀러로서는 당연히 롬멜 아프리카 군단에 한줌의 증원군도 보내줄수 없었다.

결국 1942년 6월 에르빈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에게 독일 본국으로부터의 새로운 병력의 지원은 없었다.

롬멜은 토브룩에서 노획한 엄청난 물자로 당분간 아프리카 군단의 보급을 해결할수 있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군과 독일군의 토브룩 전투는 식량 보급이 거의 바닥났던 군대가

아군의 보급은 전혀 받지 못하고 굶주린 입장으로 적의 요새를 공격하여

엄청난 물량의 식량과 보급품을 탈취한 대표적인 전투이기도 하다. 

 

  

 

 

photo from : Histom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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