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난징성을 침략하는 일본군의 쇠갈고리[The Gate of China in Nanjing invaded Japanese Army Soldiers an iron hook]

슈트름게슈쯔 2013. 9. 10. 13:09

 

 

난징 중산문 앞을 행진하는 중국 국민당군 - 1933년

 

 

1937년 여름 루거우차오(노구교: 盧溝橋)사건으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물밀듯한 기세로 텐진(天津)과 베이징(北京)을 거쳐 11월에는

중국 중부 해안의 대표도시 상하이(上海)를 점령했다.

그들의 다음 목표는 장제스(裝介石)국민당 정부가 수도로 삼고 있던 난징(南京)이었다.

약 9만명의 일본군이 양쯔(陽子)강 남한의 이 도시를 3면으로 포위해 들어가자

장제스 총통은 난징성 함락 5일전 정부를 이끌고 충칭(重慶)으로 퇴각해 버린다.

그리고 12월 13일 새벽에 난징에 잔류해 있던 약 70만명의 시민과 군인들은

 성벽을 타고 넘어온 일본군들에게 앉아서 당하듯 처참한 학살을 당하게 된다.

난징성을 함락한 후 일본군들은 중국인들을 남녀노소 구분없이 사상 초유의 대량학살을 자행한다.

 

 

 

 

난징성 내부를 공략하기 위해  중산문 근처에서 성벽위로  쇠갈고리를 던지는 일본군 - 1937년 12월 13일

 

 

 

난징성을 함락시킨 일본군 - 1937년 12월 13일

 

 

 

 

 

 

 

난징성을 함락시킨후 말을 타고 퍼레이드를 벌이는

 

일본군 육군 대장 마쓰이 이와네(Iwane Matsui )- 1937년 12월 17일

 

 

 

마쓰이 이와네는 중일 전쟁 발발 전에는 예비역이었지만 상하이 전투가 발발하면서 군무에 복귀하였다.

그는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중국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참모본부와 일본 제국 정부는 상하이 사건이 확대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마쓰이 이와네는 상하이 부근으로 한정돼있던 권한을 일탈하여  당시 수도였던 난징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난징 점령 직후,일본군에 의한 인류사의 가장 잔혹했던 학살 행위였던 난징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그는 와병중이어서 현장을 이탈,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진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기에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하면서 이는 황군의 명예에 먹칠하는 것이라고 유감의 뜻을 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난징 대학살 이후에도 이러한 잔혹 행위는 황군의 불명예라고 부하들을 꾸짖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사건은 크게 터져버린 이후였다.

마쓰이 이와네는 이후 은퇴하여 1938년 3월 일본으로 귀국 후에

시즈오카 현의 아타미 시에 있는 이즈 산의 절에서 머물었다.

그곳에서 그는 이번에 일어난 중국과 일본 양병사의 희생은

아시아 대부분의 유럽과 미국 열강의 식민지가 머지않아

독립하는 일을 위한 희생이라고 평가하며 자기자신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합리화시켰다.

 

마쓰이 이와네는 전쟁 후에 전쟁범죄자로 체포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기소되었다.

그리고 마쓰이 이와네가 사령관을 맡은 화중군이 난징에서 자행한 대학살을   

비롯한 범죄에 대한 관한 처벌을 게을리한 죄로 사형 판결을 받는다.

1948년 12월 13일 스가모 형무소 내에서 마쓰이 이와네를 비롯한 7명의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1978년에는 다른 A급 전범들과 함께 일본 전쟁범죄자들의

위패를 걸어두는 전쟁범죄자 사찰인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photo from : ww2incolo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