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쟁 범죄

할힌골 전투 당시의 일본군[The Battle of Khalkhin Japanese Army Soldiers]

슈트름게슈쯔 2013. 10. 27. 19:36

 

 

 

 

 

 

 

 

 

 

 

 

 

 

 

 

 

 

 

 

 

 

 

 

 

 

 

 

 

 

 

 

 

 

 

 

 

 

 

 

 

 

 

할힌골에서 휴식을 취하는 일본 98식 전차의 전차병들  

 

 

 

소련군의 기관총을 노획한 일본군

 

 

 

일본군 병사에게 백기를 든  BT-7 전차의 소련군 전차병

 

  

 

일본군에게 항복한 소련군

 

 

 

포로가 된 소련군의 머리를 바리캉으로 밀며 삭발을 시키는 일본군 이발사들 - 1939년

 

 

 

일본군 이발사들의 바리캉에 의해 삭발 당한후 모두 민대가리가 되어 버린 소련군 포로들

 

 

 

일본군이 제공하는 먹거리로 식사를 하는 소련군 포로들 - 1939년

 

 

 

할힌골 전투에 패하여 항복한 후  소련군의 포로가 된 일본군들 - 1939년

 

 

 

 

 

 

할힌골(Khalklin Gol)이란 지명은 과거 몽고와 만주국의 국경선 부근이었다.
1939년 여기서 발생했던 일본과 소련의 전투를 일본은

 노몬한 사건(노몬한 지켄)이라고 역사적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것은 소련에게 패배한 전투이기 때문에 할힌골 전투라 표기하지 않고

노몬한 사건이라고 애써 축약시키는 이유는 바로

일본의 국격을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의도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고 볼수있다.
러일전쟁시 대한해협과 동해상에서의  러시아 발틱함대 격파및 뤼순에 정박중이었던

러시아 함대 기습등 러시아가 공산국가 소련으로 되기전에는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국제전에서 승승장구했던 우월했다고 여기는 전쟁의 역사 또한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만주에서 벌어진 일본과 소련간의 최초의 주요 국경분쟁은

1938년 7월의 하야샨호 전투(장고봉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이 사건에서 양측 모두 확전을 원치 않아 상황은 일단 소강 상태로 들어섰고

서방측에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분쟁의 해석은 다소 애매한점이다.
중앙에 의한 일본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있던 관동군이 자의대로

전투를 결정하고 분쟁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했다는점과 장고봉지역에서 철수해야

 했다는점이 일본군이 패배를 인정했다고 하는 요소로도 볼수있다.
하지만 일본군은 열차를 이용하여 신속한 병력증파를 구사하여 31일

새벽시간에 경전차를 동원한 전투 상황의 전개로 소련군의 방어진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러했던 결과 소련군 사령관 블뤼헤르는 지휘력 문제가 빌미 삼게 되어 NKVD에 숙청을 당해버린다.
그와 같이 성과만을 중시하는 공산주의 국가 소련의 가차없는 인명 경시 사상을 고려해보면

 전략적으로 유리했던 입장이었는데도 완승을 거두지 못했던 소련군의 마이너스적 요인으로도 볼수있다.
이 사건으로 양측의 분쟁 요소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고 분쟁의 씨앗으로서 할힌골 전투로 이어지게 된다.
소련의 게오르기 쥬코프는  1938년 제1 소비에트 몽골군 집단의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행인지 불행이었던지 그는 연쇄 숙청으로 살벌하던 스탈린 휘하의

소련 본국의 정치상황을 피하여 변방이었던 시베리아 너머의 아시아 몽골로 부임했던 것이다.
이 일대에서는 일본이 만주에 세운 괴뢰정권의 국가였던 만주국과

몽골 인민공화국의 국경선이 불확실하였기 때문에 일본 관동군과 여러 차례의 국경 분쟁이 발생되었다.
그러한 사태의 정점이자 전쟁의 불씨가 된 분쟁은 급기야 1939년 6월에 드디어 터졌다.
노몬한이란 지명의 지점에서 몽골공화국 군대와  만주국 군대의 작은 충돌은

그들 국가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었던 소련과 일본의 충돌로 야기된 것이었다.
처음에 만주 주둔 일본 관동군은 소련군의 국경 방위 능력 시험의 의도로 전투를 개시했다.
그러나 이후 급속도의 대규모 전투로 발전하여 전차 500여대와 500대 이상의

항공기및 수만명의 병력이 투입되는 정규전 수준의 전투가 벌어졌다.
소련군 사령관 쥬코프는 일본군의 공세가 소진될 시점을 기다리는 작전을 취했다.
그리고 충분한 전력을 준비한후 1939년 8월 20일 일본 관동군에 대한 반격 작전을 개시했다. 
자동차화된 포병과 보병의 지원을 받는 2개의 전차 여단이

양쪽 방향의 전선으로 진격을 구사하는 대담한 양면 협공작전을 실시하였다.
이러했던 소련군의 공격은 일본 제 6군을 포위하고 1개 사단을 전멸시켜 버리는 대단한 타격을 입혔다.
그로서 2주내에 일본군은 후퇴해 버렸고 그후 국경선은 소련과 몽골의 주장대로 확정 되었다.
일본군을 격퇴시킨 쥬코프 사령관의 공적은 인정되어 단숨에 그는 소련 영웅의 칭호를 부여 받게된다.
그러나 폐쇄적이었던 소련의 공산주의 국가적 상황으로 자국 소련 이외의 서방 사회에 이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소련 쥬코프 사령관이 일본 관동군을 상대로 펼친 기계화 부대의 기동성을

십분 발휘한 운용과 혁신적인 전격전의 전술도 서방측에서 그리 주목 받지 못했다.
다만 이러한 전술이 주위에 널리 알려지게 된것은 곧 벌어지게 되는

나치 독일의 물밀듯한 속도의 전격전이라는 용어의 공격에 의해

폴란드와 프랑스가 함락되어 버렸을 때까지 기다릴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소련 붕괴후에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그 당시 소련군이 입은 피해 또한 결코 만만치 않았다고 밝혀 졌다.

 

 

 

 

 

 

 

 

노르망디의 한국인 독일군 포로 양경종(Yang Kyoung Jong) - 1944년 6월

 

 

한국인 독일군 양경종은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군에게 잡힌 일본군으로 다시 대독전선에

소련군측에 가담하여 투입된뒤 또 다시 독일군포로가 된후 연합군에게 항복한 기구한 운명이 한국인 이었다.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