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발지전투 당시의 미군 전쟁 포로[The Battle of Bulge US Army POW]

슈트름게슈쯔 2014. 1. 14. 14:20


 

발지전투 당시 이송되는 미군 포로들과 독일 501 중전차 대대의 

쾨니히스티거 전차 뒤에 붙어 이동하는 독일군 모터사이클 연락병 - 1944년 12월 17일


 

 

 

 

2차 세계대전 말기  발지 전투시 독일군의 포로가 된 미군 병사들 - 1944년 12월

 

 

 

 

독일군이 말메디에서 사살시킨 미군 포로들 - 1944년 12월

 

 

 

말메디에서 학살당한 병사들의 사체를 나르는 미군 병사들 - 1945년 1월

 

 

 

1944년 12월 17일 독일군은 아르덴느 대공세로 초반에 많은 수의 미군 병사들을 사로잡았다.

 벨기에 말메디에서 요아힘 파이퍼가 지휘하는 SS 파이퍼 전투단 병사들이 사로잡은 미군 포로들에게

 뚜렷한 이유없이 기관총 사격을 가하여 대부분의 포로들이 학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파이퍼 전투단은 말메디뿐만이 아니라 이후 그들이 거쳐간 모든 지역에서 포로 및 민간인 학살에 연루되었다.

 심지어 격전지였던 스타벨로에서는 전투가 끝난 후 포로 9명과

여자 및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 93명이 전투 종결 후 사살됐다.

이 숫자는 말메디에서 학살된 미군 포로 83명보다도 많은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를 보고받은 연합군 수뇌부는 크게 분노하며

이 사건을 독일군의 포로학살로 규정하고 포로로 붙잡은

독일군 병사들에게 보복해도 좋다는 공식명령을 내렸다.


훗날 전범재판에서 파이퍼와 그 부하들에게 포로학살의 책임을 물으려 하였지만

 독일군은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연합군이 공식명령으로 포로학살을 지시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결국 재판은 치루어졌고 유죄 판결도 나왔지만, 당시에도 심각한 논란이 오고갔다.


말메디 학살 사건의 영향으로 미국 병사들의 전투 태도가 달라졌다.

미군은 독일군들의 극악한 만행을 뒤늦게 깨달았던것이다..

이런 변화는 포로 대우에도 영향을 주었다.

국방군 포로와 친위대 포로를 다루는 방식도 달라졌다.

 이런 현상은 이후 독일군과 미군의 교전 현장에서 숱하게 발생했고,

심지어 상관의 전사를 학살로 오해한 부하들에 의한 단위부대 전체의

 조직적인 포로 학살 같은 참사도 발생했을 정도였다.

당시 영어에 능통했는 파이퍼는 영국 군가를 포로들을 향해 흥얼거렸다고 한다.

 그가 유유히 떠난 뒤에 학살이 벌어졌다.

 당시 정황을 보면, 파이퍼는 급한 진군을 위해 뒤에 포로를 놓아둘수 없었고

포로를 데리고 가면 진군 속도가 늦어질 상황이었다.

포로를 풀어주면 경로가 발각되고 적군과 합류하여 역공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또한 당시 옆 마을에 있던 아이젠하워를 잡으러 서둘렀다는 연구도 있다.

아이젠하워의 자서전에도 파이퍼의 이름을 밝히진 않았지만

자신이 포로로 잡힐까봐 염려했다는 부분이 있다.


포로학살에 대한 공식적인 문서는 발견된 적이 없지만

  디트리히에게 구두로 명령을 받았을 것이란 의혹은 강하게 제기된다.

 파이퍼의 이동경로를 따라가면 곧이어 민간인과 군인포로 학살의 시체가 뒤이어 발견되었다.

그리고 애초에 포로학살 명령을 공식적으로 문서로 남겨 명령을 내리는 멍청한 군대는 많지 않다.


한 연구에 따르면 말메디에서 독일군의 연합군 포로 학살사건은 탈주를 시도한

 미군 포로에게 경고사격 후 조준사격을 가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행동을 본격적인 포로 학살로 오인한 포로들이 일제히 도주를 시작했으며,

 당황한 독일군이 이를 저지하고자 도주하는 포로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해 발생한 사고로 추정하기도 한다.

참고로 탈주 포로를 사살하는 것은 국제법상 위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탈주를 시도하는 순간 포로는

 포로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고 전투원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메디 학살의 경우 대부분의 포로는 조직적인 탈주를 시도하다가 사살된 것이 아니라

 격리된 공간에서 그대로 사살 당하였다. 

죽은 척하고 살아난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독일군들은

 확인사살을 하며 킬킬거리면서 개머리판으로 죽은 시체를 짓이기며 웃고 떠들었다고 한다.

또다른 생존자들도 일관되게 갑작스럽게 발포했다고 증언한다.

시신 부검 결과 대부분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두부관통상을 입은 점을 보면,

저항하거나 도망가다가 총에 맞은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포로를 모아 놓고 갑자기 겨냥해서 죽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포로들이 저항하거나 탈주를 시도한 것은 갑작스런 발포 후에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도 소수에 그쳤다. 또한 갑자기 탈주 시도가 이루어졌다면

대부분의 시체가 머리에 관통상이나 치명상을 입기는 어렵다.

무방비 상태에서 지향 사격을 당했다는 말이 된다.

 더구나 최종 단계에선 쓰러진 사람을 발로 차서 약간이라도 움직이면

다시 사격하는 확인사살이 몇 건 자행되었다.

결국은 포로 학살이라고 볼 여지는 충분했다.

여기에 12월 18일부터 12월 21일에 걸쳐 진격도상에서 있었던 다른 학살들은

작전 중 전사한 몇몇 중대장의 독단에 의해 강행된 학살행위라는 사실도 입증됐다.

참고로 의도적인 학살은 아니었다 해도, 특별한 권한 없이 임의로 전시 국제법을 확대 해석한

 일선 장교들의 약식 군사재판은 충분히 학살로 간주된다.


지휘관인 파이퍼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진 이유는 말메디 사건 하나 때문이거나

  학살 명령 사실이 입증되어서가 아니다.

일련의 학살사건 전반에 대한 지휘책임을 물었기 때문이다.

아랫 사람이 사고를 발생시키면 윗사람이 책임지는 건 전세계의 어느 군대에서나 거의 모든 조직의 공통점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의 해 미군포로들의 학살 만행이 벌어졌던

 

벨기에의 말메디 학살 현장을 찾은 미국 미시간 대학교 학생들 - 2012년 6월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