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다카우 강제수용소 해방의 환희[Liberation of Dachau concentration camp people,s Joy]

슈트름게슈쯔 2014. 3. 2. 16:32

 

 

 

 

 

 

 

 

 

 

 

 

 

 

 

 

 

 

 

 

 

 

 

미군에 의해 해방된 독일 다카우 강제수용소 - 1945년 4월 29일

 

 

 

 

 

 

 

 

 

 

 

 

 

 

 

 

 

 

 

 

 

 

 

미군병사에 의해 조사를 받는 나치 독일 SS 다카우 강제수용소의 간수들 - 1945년 4월 29일 

 

 

 

 

미군에 의해 사살된 다카우 강제수용소의 독일 SS 간수들 

 

 

 

 

 

 

연합군의 다카우 강제수용소 해방에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는

 

 프랑스에서 잡혀와 수감된 사람들 - 1945년 4월 18일

 

 

 

 

미군에 의해 해방된 독일 다카우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의 환희 - 1945년 4월 29일 

 

 

2차 세계대전 당시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로서 독일에 최초로 개설된 곳이다.

이 수용소는 남부 독일의 뮌헨 북서쪽 약 16킬로미터(10마일) 떨어진 다카우라는

중세풍 마을 근처 버려진 군수품 공장의 대지에 세워졌다.

1933년 6월에 개설된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우파 정당들인 가톨릭 중앙당과

민족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인 나치당 간에 연립 정권(1933년 7월 6일  해산됨)에 의해

최초로 세워진 정식 수용소였다.

뮌헨 지역 경찰청장 하인리히 히믈러는 공식적으로 수용소를 정치범 수용을 위한 최초의 강제 수용소"라고 설명했다.

다카우 강제 수용소는 뒤이은 다른 강제 수용소들의 원형이 되었다.

수용소 운영 조직의 기본 및 수용소 형태 뿐만 아니라 수용소 건축 계획까지 테어도르 아이케가 개발했으며,

이 사항들은 모든 후대 수용소에도 적용되었다.

아이케는 수용소 경비본부 근처에 분리된 보안 기지를 설치했는데,

이곳은 거주 구역, 관리 시설, 경비대 기지로 구성했다.

아이케 자신은 그가 만든 모델을 다른 수용소에 적용하는 책임을 맡아 모든 강제 수용소를 총괄 감독하게 되었다.

총계 30개국 이상 20만 명의 죄수들이 다하우에 수감되었다.

그중 1/3 이상은 유대인이었다.

다카우 강제 수용소에서 질병과 영양실조및 자살등으로 25,613명,

보조수용소에서도 거의 1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1945년 초기에 티푸스 전염병이 수용소에 만연했으며, 몸이 약한 수많은 죄수가 죽었다.

더욱 큰 수용소인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함께, 다카우 강제 수용소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치 강제 수용소의 상징이 되었다.

 다카우 수용소는 영국과 미국 연합군  군대에 의해 2번째로 해방되어

서방 세계가 나치즘의 잔인성을 뉴스와 언론인들의 직접 취재를 통한 보도로 알게 된

 최초의 장소들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중요한 장소로 자리 잡고 있다.

 

 

 

 

 

 

 

photo from : www.dailymail.com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