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키예프 전투에서 항복한 후 굶어 죽어간 소련군 포로들의 비극[Kiev Battle after surrendered Soviet Red Army POWs starvation death Tragedy]

슈트름게슈쯔 2014. 5. 3. 15:35










독소전쟁 초기 항복한 소련군 포로들을 수용할 캠프로 이동시키는 독일군 - 1941년




독일군에 항복한후 들판으로 이동하는 소련군 포로 - 1941년 

 



우크라이나 우만의 독일군에 항복한 소련군 포로들 - 1941년 




독일군에 의해 들판으로 끌려와  모여진 소련군 포로들 - 1942년 8월





키예프 전투 이후 독일군에 항복한 소련군 포로들과 1명의 독일군 포로 감시병 병사 - 1941년 9월 







  독소전쟁 당시 우크라이나 수도에서 벌어졌던 키예프 전투는 독일군 최대의 전승지였다.  

그러했던 키예프 전투에 투입된 독일군의 병력은 50만명이었고 이에 대치하여 전투를 벌였던 소련군의 병력은 85만명이었다.

1941년 8월 23일 독일 남부집단군은 코카서스의 유전지대로 가까이 전진하기 위해 기갑부대를 앞세워 키예프를 포위했다.  

이에 우크라이나 키에프의 주민들은 소련군의 횡포에 반감을 가지고 독일군에 호의적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1941년 9월 16일 독일군에 의해 키예프는 함락되었고 열흘뒤 9월 26일 소련군은 독일군에 항복했다.  

키예프 전투에서의 독일군 사상자는 15만명이 발생했고 소련군 사상자는 16만 3000명이 발생했다.

그러나 살아서 독일군에 항복했던 소련군 포로의 숫자는 무려 66만 5천명이었다.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쟁 포로를 함부로 살해해서는 안된다는 제네바 협정을 지킬수가 없었다.

그것은 독일군에 항복한 66만 5천명이라는 엄청난 수효의 

소련군들에게 군량미를 지급하여 먹여 살릴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사실 독일군 수뇌부는 소련 침공 작전시 전쟁 포로들에 대한 배급용 식량을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포로수용소를 만들어 항복한 소련군들을 수용시켜 그들을 관리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국 독일군 수뇌부는 소련군 포로 66만 5천명을 한명도 남김없이 굶겨 죽이기로 한다.  

독일군은 항복한 소련군 포로 66만 5천명을 키예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들판으로 

몇날 몇일을 행군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그곳에서 독일군은 소련군 포로들에게 아예 처음부터 빵 한조각도 주지 않았다.

그에 따라 점점  체력을 상실한 소련군 포로들은 기진맨진한채 쓰러져 신음하다가 그대로 굶어 죽어 갔다.  

그러했던 독일군의 소련군 포로 아사 학살은 완전범죄 형태로 간주되어 버렸는지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에서 전쟁범죄 문제로 대두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에서 유태인 또한 50만명을 학살시킨다.  

유태인들과 우크라아나 주민들과의 갈등이 있었던 관계로 독일군의 유태인 학살정책은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유태인에 대한 테러를 야기시키며 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독일군은 대량의 소련군 포로와 유태인의 시체를 매장해 버리고

 모스크바 침공 작전에 합류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하달 받게 된다.  

그에 따라 키예프 전투에 참가했던 독일군은 북부 집단군과 합류하기 키예프를 떠난다.  

전후 조사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키예프 전투로 270만명의 인명이 사망했다.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