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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의 사악한 인상[Nazi German Propaganda Minister Joseph Goebbels hateful eyes]

슈트름게슈쯔 2014. 6. 4. 21:34




요제프 괴벨스는 1897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라이트(Rheydt)에서 출생하였다.

 괴벨스의 할아버지 콘라트 괴벨스는 농부였으나, 그 당시 농촌의 사람들은

 도시의 노동자로서의 삶이 자신들에게 더 나은 삶이 될 것이라 믿고 공업 도시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콘라트도 이중 한 명이었는데, 공업도시 라이트로 이주해서 결혼하고 

요제프 괴벨스의 아버지인 프리츠 괴벨스를 1867년에 낳은 후 평생을 노동자(프롤레타리아)로 살았다.

 요제프 괴벨스의 아버지 프리츠도 심지 공장에서 단순 노동자일뿐 이였으나, 

부지런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후에는 공장 지배인이 되어 소시민(프티부르주아) 계급이 된다.

 프리츠 괴벨스는 1892년에 카타리나 오덴하우젠과 결혼하여 아들 세 명과 딸 두 명을 낳았는데 

요제프 괴벨스는 그들의 셋째 아들로 1897년에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 폐렴을 앓아 죽을 고비를 넘긴다.

 폐렴으로부터 살아났으나 대신 몸이 허약해졌다. 

또한 골수염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었다. 

그의 가족은 그를 치료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수술 또한 실패로 돌아갔고, 그의 다리는 활처럼 굽어졌다.

 그는 후에 그 굽어진 다리 때문에 친구들은 그를 놀렸고

 괴벨스는 자기 자신을 열등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고, 내성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런 신체적인 결함을 지식으로 만회하려고 했기 때문에 

후에 그가 지식인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상급학교에 가서는 그런 성향이 더욱 더 강하게 되었는데 

괴벨스는 상급 학교에서도 최상의 성적을 거두었다. 

그 때문에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여러가지 도움을 청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는 그 과정에서 우월감을 느꼈다고 한다. 

후에 그는 가톨릭 재단의 장학금을 받아 본·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박사 학위를 받은 뒤에는 자기 자신을 항상 박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1945년 히틀러가 자살한 후 나치의 총리에 올랐으나, 

이튿날 총리 관저의 대피호에서 부인 마그다 괴벨스와 자살하고

 6명의 아이들(1명의 아들과 5명의 딸)을 독약을 먹여 같이 자살하였다.

 그리하여 전쟁후에 남은 가족의 유일한 사람은 하랄트 크반트(Harald Quandt)였다.

 하랄트 크반트는 마그다가 그녀의 전 남편 크반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는데,

 1944년 전쟁 중 공군 중위로 이탈리아에서의 비행기 추락으로 부상을 당하고

 적에게 붙잡혀 포로로 있었어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1차 대전이 일어났을 때에 그는 그의 조국을 위해 출정하여 전선에서 싸우기를 바랐다. 

그는 그것을 1년 자원 복무 능력 증명서를 마련해둘 정도로 그 행동을 고귀하고 숭고한 행동으로 보았지만 

그 증명서는 효력이 없게 되었고 그는 그저 대체 복무를 하게 되었을뿐이였다. 

그는 전투원은 아니었지만 비전투원으로서 활약함으로써라도 소속감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전쟁 중에 그의 형제 한스가 프랑스군에 포로로 잡혔고 

그의 여형제 엘리자베트가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 와중에도 그는 아비투어에 합격하여 진학하였는데 

독일어 실력이 최고였기때문에 졸업사를 낭독하게 되었다. 

졸업사가 끝난 뒤 교장은 그에게 유능한 웅변가가 될 재능은 가지고있지않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조국구호사업회의 행정병으로 소집되어 잠시 근무했었으나

 상관들은 그의 다리와 군인답지 못한 외모를 보고 머지 않아

 괴벨스를 다시 집으로 돌려 보내버렸다. 

한편 괴벨스의 기대와 믿음과는 다르게 전쟁은 독일의 항복으로 끝이나고

 괴벨스는 그 결과로 그의 신앙을 잃게 되었다.

 1922년부터 그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을 관심 있게 보게 되었고

 그 후로 부터 3년 후인 1925년 나치에 입당했다. 

그는 자주 연단에 섰다. 

1925년 7월 11일 바이마르에서 열리는 회의 전날 괴벨스는 처음으로 히틀러와 만나게 되는데

 그 후로 그는 더 히틀러를 신봉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괴벨스는 당 지도부에서의 독재를 저지하기 위하여

 독일 북서부의 나치세력을 결집하였다.

 그 결과로 그들은 국가사회주의 서한을 발간하였는데 그레고어가 발행인이 되고 괴벨스가 편집을 맡았다.

 그들은 그 잡지로 인해 그들의 뜻을 히틀러에게 관철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괴벨스는 히틀러와 자신의 뜻을 해명할 수 있는 대화 자리를 가지기를 원했는데 

히틀러가 독일 북서부 나치를 순방하게 되었다.

 11월 6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히틀러와 괴벨스가 두 번째 만남을 가지게 되었는데

 괴벨스는 오히려 히틀러에게 완전히 매료 당하고 만다. 

1928년 국회의원, 1929년 당 선전 부장으로서, 새로운 선전 수단을 구사하고 교묘한 선동 정치를 하여,

 1930년대 당세 확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1933년 나치스가 정권을 잡자, 국민 계몽 선전부 장관·문화회의소 총재로서

 문화면을 완전히 통제하고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였다.  

 1939년 2차 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략으로 발발되었고 

괴벨스는 국민들에게 분노를 심어 주기 위해 폴란드가 폴란드의 독일소수 민족들에게 

잔혹한 행위들을 한다고 보도하게 하였다. 

폴란드 침략중에 히틀러는 외무부의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에게 해외 선전을 맡겼다.

 리벤트로프는 소련과의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히틀러의 신임을 얻었었기 때문인데, 결국 리벤트로프가 

괴벨스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한을 얻기도 했었다.

 괴벨스는 이 지시를 거부하며 무력화 하려고 노력했다. 

그후로 리벤트로프와 괴벨스는 서로에게 큰 반감을 가지게 된다. 

줄어드는 괴벨스의 권한을 다시 찾기 위해서 괴벨스는 고위 관료와 국장들을 회의에 소집해

 각 담당자들에게 언론, 라디오, 뉴스 등의 선전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 

괴벨스는 전쟁을 위해 국민들의 분노를 이용하기를 원했고 

폴란드가 독일계 소수 민족들을 탄압한다고 보도하게하여 그 분노를 이끌어내었다. 

폴란드를 점령한 뒤 히틀러는 서방의 강대국들에게 평화를 제안했다. 

괴벨스는 영국의 답변을 기다리며 은근히 평화가 다시 찾아오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은 폴란드가 당한 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거절했고 

히틀러는 평화의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하고 영국에 대한 선전을 괴벨스에게 지시하였다. 

그에 따라서 10월 14일에 귄터 프린 함장의 독일 잠수함이 영국의 로열 오크호를 격침하여 883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그 즉시 괴벨스는 처칠이 시한 폭탄을 이용해 배를 침몰시키려했고 

그 안의 수백 명의 미국인들을 익사시키려고했다는 등의 주장을 

라디오 등의 매체를 통하여 그를 맹공격 하였다. 

그 후에도 자주 영국 국민과 영국의 지도자들을 분열시키는 선전 활동을 하였다



























나치 독일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의 사악한 인상





요제프 괴벨스의 가족


요제프 괴벨스는 히틀러의 최측근으로 나치 독일에서 '국민 계몽 선전부 장관'의 자리에 앉아 나치 선전 및 미화를 책임졌던 인물이다.

 1945년 아돌프 히틀러가 죽은 후 하루 뒤에 포위된 벙커 안에서 아내와 6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동반 자살하였다.

 나치당의 뇌라고 불릴만큼 나치당의 지식인 이였던 그는 나치당의 제복 대신 양복을 주로 입었고

 선전 방법뿐만 아니라 유창한 말솜씨 또한 가지고 있었고 

그는 사람들을 선전하다 못해 광신적인 사람들로 만들었다. 

특히 그는 라디오와 TV를 통해 정치 선전을 했었는데. 정기적인 TV방송으로 선전을 한 것은 세계 최초였다. 

그의 선전 방송을 들은 당시 독일 국민들은 패전의 상황에서도 승리를 확신했다고 한다




청산가리 독약 캡술로 음독 자살시킨 요제프 괴벨스 5명의 딸과 1명의 아들




자살후 불타다 남은  요제프 괴벨스의 사체 




1987년생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패전과 더불어 1945년 5월 1일 

자살한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 정권의 나팔수이었자 아돌프 히틀러의 열렬한 추종자로 

각종 선전 전략을 만들어서 히틀러를 독재자로 만드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던 희대의 사악한 인물중 한명으로 꼽힌다. 

그는 냉철하고 치밀한 선전 활동으로 유명하며 흔히 미디어를 통한 대중 선동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다. 

또한 괴벨스는  나치당 베를린 관구장, 중앙당 선전국장 집권 후 나치 독일의 국민계몽선전부 장관.

 전시에 총력전 전권대사 시대를 앞선 언론플레이의 선구자', '지옥의 입', '절름발이 악마. 

괴링과 함께 괴씨 집안의 못난 아들  박사 학력의 지식인이면서도 

히틀러에 대한 충성심과 선동 능력으로 주목을 받아 나치 독일 시대 악명을 누렸다. 

 당시 독일 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히틀러와 힘러보다 괴벨스를 더 싫어했다고 한다.

지금도 살아남은 홀로코스트 피해자들 중에서도 그렇게 증언하는 사람이 있다. 

히틀러는 도살자나 하수인에 불과했지만 괴벨스는 유대인 집단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여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을 공격하게 만들었고 유대인들의 인격과 자존심을 벌레나 병균 취급하듯이 말살했다.

이것은 칼잡이보다 나팔수가 더 나쁘다란 말로 성립된다. 

괴벨스는 제3 제국선전부 장관으로 유대인 탄압과 언론 출판 방송 등 

문화계를 통제하고 나치 정권의 악행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전쟁 중엔 침략전쟁을 미화하면서 전쟁범죄에 크게 일조했고 

전쟁 패전을 앞두고는 대가를 치루지 않은 채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다. 

지금까지도 괴벨스는 최악의 독재자의 나팔수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photo from : www.jewishma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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