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초기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꼭둑각시였던 아랍동맹군 지도자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 - 1941년 12월
2차 세계대전 당시 당시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는 팔레스타인 민족기구의 지도자
그랜드 무피(Grand Mufti)이자 나치 독일의 아랍 동맹군 수장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기존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는 나라로
, 피지배민족들을 영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물론 당시 현실은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였을슈도 있었겠지만
독일의 그 실상이 알려진건 전후의 일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피지배 민족들의 독립운동가들은 모두 나치를 해방군으로 생각하였다.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도 예외가 아니었다.
1936년 팔레스타인 독립시위가 무력으로 진압된 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구금당했다.
그로써 사실상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의 원동력이 없어진 것이었다.
독립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아민은 강력한 반유대주의를 제창하고 있었던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은 나치와 적극적으로 연계하여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하였다.
1941년 10월 아민은 독일을 방문하여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와 히틀러를 만났다.
아민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히틀러 역시 아민에게 아랍의 민족운동을 최선을 다해 지원할 것임을 약속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한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 - 1930년대 초 레바논
거운데에 앉은 부터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와 그의 왼쪽에 앉은 시리아 족장 하림 알 아타시와
그의 오른쪽에 앉은 아랍의 민족지도자 샤키브 아르시안
하인리히 히믈러와 악수를 나누는 아랍 나치 무슬림 동맹 지도자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 - 1943년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학살시키는 인종 말살 정책이었던 홀로코스트는 그가 제안했던 아이디어였다.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와 바펜 SS 병사 - 1943년 11월
2차 세계대전 중반기 무슬림들의 축제인 Eid al-Adha 기간에 베를린에서
독일 동맹군 아제르바이잔 군대 장교들을 만난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 - 1942년 12월 18일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의 팜플릿을 보는 나치 SS 제 13사단의 보스니아 무슬림 병사들 - 1943년 6월 21일
사라예보를 점령한 크로아티아의 민족 지도자 밀레 부닥과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 - 1942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발칸반도의 보스니아 SS 무장친위대를 사열하는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 - 1943년 11월 1일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동맹군 무슬림 병사와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 지도자
1942년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는 독일에 아예 정착하게 된다.
당시 그는 사실상 독일의 꼭두각시가 된 것이었다.
이때부터는 크게 하는 일이 없이 선전방송을 하거나,
보스니아의 SS 모집방송을 하는 역할이 고작이었다.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 그는 프랑스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프랑스는 영국의 주장을 듣지 않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려 그를 정치범으로 간주하여 석방을 시킨다.
그리고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의 석방 후 제 1차 중동전쟁이 발발한다.
제 1차 중동전쟁시 아랍연맹군이 패배하자 이집트에 팔레스타인 망명정부를 건설하지만
요르단과의 정치싸움에서 밀려나 예루살렘 무프티 직도 박탈당하고
망명정부도 나세르로부터 찬밥취급을 받게 된다.
이에 아민은 레바논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974년 사망한다.
그는 팔레스타인의 대표적인 저항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는 많은 존경을 받는다.
하지만 나치에 협력한 흑역사때문에 서구권에서는 유대인 죽이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자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점은 그는 꺼져가는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후대의 팔리스타인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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