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키자시 칼로 일본의 정치인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를 찌르는 17세의 극우 소년 야마구치 오토야 - 1960년
일본도 카타나(장검)와 와키자시(짧은것)
1960년 일본의 정치인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가 TV 연설회에서 극우 소년에게
짧은 일본도 와키자시로 찔려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마이니치 신문의 기자 나가오 야스시(長尾 靖)는 절묘한 순간에 찍은 사진의
영문 제목인 Tokyo Stabbing으로 유명해졌다.
이 사진으로 나가오 야스시는 1961년 퓰리처 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사진 뿐만 아니라 영상도 고스란히 TV를 통해 방송되었다.
이 사건은 최악의 방송사고 중 하나로 꼽힌다.
동영상은 18초부터 나오는데 찔렀을 때의 충격으로
피의자와 피해자의 안경까지 동시에 날아간다.
실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 : 1898~1960)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 쩌둥 공산당 서기장을 만나는 일본의 정치인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 - 1957년 4월 21일
야마구치 오토야의 도쿄 난자 사건 당시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가 입고 있었던 양복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는 사회주의 계열의 정치 노선중에서도 비교적 온건한 중도적 정치인이었으나
공산중의 중국에서 미국은 중국과 일본의 공통된 적이라는 요지의 좌익 노선에 충실한 연설을 하던 정치인이었다.
복잡한 정치 행보 끝에 1960년 일본 사회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12일 도쿄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일본 자민당, 일본 민사당 일본 사회당dml
"3당 당수 연설회"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
당일 미국과 일본의 협정을 비난하는 아사누마의 연설 도중 일본의 극우파들은 야유와 협박을 하였지만
아사누마는 계속 연설을 이어갔다.
그러자 17세인 우익 청년 야마구치 오토야가 연단으로 달려와서
순식간에 아사누마의 복부를 긴 와키자시 칼로 찌르게 된다.
아사누마는 병원으로 이송 중 사망하였다.
좌우 눈동자의 위치가 다른 야마구치 오토야의 극단적인 성격의 소유자적 관상
야마구치 오토야(1943~1960)
야마구치 오토야는 1943년 2월 22일 도쿄 도 다이토 구(台東区)의 변두리에서
도호쿠 제국대학 출신으로 당시 인텔리인 육상자위대원인 아버지 야마구치 신페이(山口晋平)와
유명한 소설가인 무라카미 미로쿠(村上浪六)의 셋째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육상자위대원으로 엄격한 아버지 휘하에서 성장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엄격함과 애국심으로 훈육하였다.
1958년 다마가와 학원 고등학원고등부(玉川学園高等部)에 진학하였으며
아버지 신페이의 임지 관계로 홋카이 도의 고세이가쿠인
고등부(光星学院高等部)로 전학갔으나, 다시 다마가와 학원으로 전학왔다.
그는 형의 영향으로 아카오 빈의 사상을 접하였으며
다마가와 학원 고등부 재학 중 1959년 애국당 총재 아카오 빈의 연설에 감화받아
그해 5월 10일 만 16세의 나이로 아카오 빈이 이끄는 대일본애국당에 입당하여 소년 우익운동가로 활동하였다.
이듬해 다마가와 학원 고등부를 퇴학한다.
청년 우익 운동[편집] 그 뒤 복학하여 다마가와 학원 고등부(다마가와 고등학교의 전신)을 졸업하고
스기모토 코우기(杉本広義)의 추천으로 다이토문화대학(大東文化大學)의 청강생으로 입학하였다.
야마구치는 아카오 빈의 연설을 누군가 야유하면 야유하는 사람에게 덤벼들거나
그는 좌파의 집회 해산과 우파 인사의 집회의 보호에 앞장섰다.
또한 시위 과정에서 여러 번 경찰과 뒤치락 싸움을 하였으며
애국 당 입당 후 반년에서 그는 10 번이나 검거됐다.
1959년 12월에 집행 유예 4년의 처분을 받기도 했다.
사회주의 성향의 발언을 하며 친중국성향이었고,
중국과 동맹하여 미국제국주의에 저항해야 된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하던
아시누마 이네지로에게 반감을 품고 그를 살해하려 기회를 노리던 중,
1960년 10월 12일 NHK 방송사에서 유력 정당 대표자들의 공개 토론회가 방영된다는 것을 접하고
입장권을 구입하여 방청객으로 입장하였다.
사건 당시에는 다이토문화대학의 청강생 신분이었고
또한 사건 1개월 전인 1960년 5월 29일, 동지 당원 2명 등과 함께 대일본애국당을 탈당했다.
1960년 6월 17일 우익 청년들이 사회당 고문 카와카미 죠타로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 났을 때,
야마구치는 "자신을 희생해서 매국노 카와가미를 찌른 것은
정말 나라를 생각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의로운 행위라서 탄복했다.
내가 하는 때에는 철저한 방법으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다짐했다 한다.
같은 해 7월 1일 동지들과 함께 전아시아반공연맹 도쿄 지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야마구치 오토야의 아사누마 이네지로에 대한 피습 장면 - 1960년 10월 12일
야마구치 오토야는 1960년 10월 4일 자택에서 아코디언을 찾고 있었는데
우연히 길이가 짧은 일본도 와키자시(脇差)를 찾아 냈다.
그것은 손잡이와 연결되는 부분이 고리가 아니라 원목의 칼집에 들어있었다.
그 일본도 와키자시를 보고 사회당 요인들을 죽이려고 결심했다고 진술한다.
10월 4일 야마구치는 메이지 신궁을 참배하고 바로
고바야시 일본교원노동조합 위원장, 노사카 의장 집에 전화하여 면회를 신청했으나,
고바야시 위원장은 이사로, 노사카 의장은 여행 중 이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1960년 10월 12일 야마구치는 3당 합동 연설회에 참석하여
히비야 공회당에서 연설중이던 아사누마 이네지로를 칼로 찔러,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야마구치는 당시 만 17세로 소년법에 의해 실명비공개 대상이었으나,
정치인 암살이라는 죄의 중대성에 따라 실명이 공표되었다.
연설 중 단상에 뛰어 올라 아사누마를 세번 칼로 찌른 뒤 자신이 소지한 쪽지 내용을 발표했다.
아사누마 살해당시 야마구치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유서격의 문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일본의 적화를 꿈꾸고 있다.
나는 너 개인에게 원한은 없으나, 일본사회당의 지도적 입장에 있는 자로서 책임과,
방중시의 폭언과 국회난입등의 직접적 선동자로서 책임을 물어, 너를 용서할 수 없다.
이에 따라 나는 너에게 천벌을 내린다.
— 황기 이천육백이십년십월십이일
야마구치 오토야 피살 직전 단상에 올라온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도쿄 소년감별소[2]에 입소, 개실 2호실에 수감되어 2명의 동료와 함께 생활하였다.
11월 2일 야마구치는 도쿄 소년감별소의 개실 2층 2호실에서 지급된 치약으로
벽에 '七生報国 天皇陛下万歲'(칠생보국 천황폐하만세)라고 쓴 뒤
목을 매어 자살했으며 우익단체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는 등 영웅으로 미화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다.
소설가 사와키 고타로에 따르면, 아사누마 위원장 이외에 자민당 실력자인 고노 이치로 등
다른 정치인도 테러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태평양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언설을 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등 황족도 노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사후 일본의 사회주의자들 외에도 일본의 보수 진영에서는
그를 테러리스트라며 규탄하였으나
일본 극우단체를 중심으로 그를 그를 열사(烈士)로 칭송, 미화하였고,
일본사회당 등 세력의 몰락 이후에는 노골적으로 그를 찬양하기도 하였다.
일본 우익 단체에서는 매년 그가 자결한 11월 2일에는 그의 묘소 주변에서 성대한 추모제를 열고 있다.
2010년 일본의 작곡가 미카미 타카시(三上卓)는 그를 추모하는 노래
청년 일본의 노래(青年日本の歌)를 작사, 작곡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자민당이 패배할 것 같았으나 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아사누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민당은 압승을 거두었다(296석/467석 57.4%).
대신 민사당이 유탄을 맞아 의석수가 40석에서 17석으로
의석수가 반 이하로 줄어들어 참패했다.
그리고 사회당은 의석수를 122석에서 145석으로 늘리기는 했으나
1958년 총선 때보다 의석수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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