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차 세계대전 비사 WW2

우크라이나 농촌 민가의 독일군 진료소[WW2 Ukraine Farm Village House built Nazi Germany clinic]

슈트름게슈쯔 2014. 6. 7. 17:02


점령지 우크라이나 농촌에서 써레로 밭갈이 작업을 하는 독일군 병사 


독일군의 점령후 우크라이나에서 수확되는 모든 농산물은 군량미로  징발되게 되었고

수확된 일부분만이 주민들에게 할당 배급되게 되었다.




독소전쟁 당시의 우크라이나 농촌 민가의 초가집 





우크라이나 농촌 민가를 이용한 독일군의 진료소




독일군의 굴라쉬 카노네에서 만든 수프를 배급받는 우크라이나 농촌의 여성들 





진료소에서 약을 타가는 우크라이나 여성들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큰 나라 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아름다운 자연과 곡창 지대 뿐만 아니라 지하자원도 풍부하여

 도네츠 탄전의 석탄, 크리보이로그의 철광석, 카르파티아 유전과 천연가스및

그 밖에 망간, 우라늄, 식염, 칼리염, 석회석 등을 산출된다. 

주민은 73%가 우크라이나인, 22%가 러시아인이다. 

산업으로는 석탄, 철광, 선철등 주로 중공업 분야에 발달되어 있다.

그에따라 풍부한 수력전기를 이용하여 기계제조공업, 화학공업이 크게 발달했으며

 유수의 공업지대를 이루고 있다. 

석탄업, 철강업, 기계제조업, 화학공업의 중심은 돈바스, 드네프르 지역이며

 드네프르강의 하구에서 키예프까지의 사이에는 6개소의 수력발전소가 단계상으로 건설되어 있다. 

우크라이나의 경지율은 약 70%에 이르고 있어 

겨울밀, 옥수수, 보리, 사탕무, 해바라기, 포도의 재배, 가축사육 등에서는

 구 소련 시절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 온난한 크림반도 남단과 광천이 솟는 카르파트 지방은 

우크라이나의 중요한 관광지이며 요양지로 알려져 있다.




우크라이나는 예로부터 곡창지대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잉여 농산물은 러시아 경제의 기반이었고 

우크라이나의 코샤크 농민군은 러시아 국방력의 핵심이었다. 

아울러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과 오데사 항구는 러시아 해군력의 중심이었던 것이었다. 

즉 우크라이나 없이 과거 찬란했던 러시아 문화는 존재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유럽의 우크라이나는 한국과 비슷한 처절해던 침략을 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압제와 수탈에 시달리던 우크라이나는 

볼세비키 혁명과 제  2차 세계대전의 혼란기에 편승하여 1917년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배 하의 동부 우크라이나가 각각 독립을 선언한다.

1920년에 우크라이나는 동서 통일을 선언했으나 폴란드와 러시아 군대의 침략으로 

신생독립국 우크라이나는 오래 가지는 못한다. 

결국 1922년에 서쪽은 폴란드, 동쪽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게 된다.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는 1921년~1922년 간, 1932년~1933년 간 두 차례에 걸쳐 큰 기근을 겪게 된다. 

그러했던 기근은 스탈린이 집단 농장 체제에 저항이 심했던 코샤크(우크라이나)에 대해 

인위적으로 부른 기근으로 홀로도모르(Holodomor)라 불린다. 

그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8백만 명에서 많게는 1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홀로도모르는 스탈린 시대 때 자행된 일종의 간접 학살 사건이었다.

 홀로도모르란 우크라이나어로 “기근에 의한 치사”를 의미 한다. 

이 학살의 배경은 스탈린 시대 때 우크라이나에서 있었전 인위적인 학살 사건으로 

스탈린의 집단 농장 정책에 저항한 코샤크 귀족 지주에 대한 보복적 차원의 성격이 강한 학살이었다.

전통적으로 개인 경영의 기틀이 잡혀있던 코샤크 대 지주들은 

스탈린의 집단 농장 정책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게 된다. 

코샤크 지주들이 생산한 잉여 농산물은 소비에트 정부의 중요 수출품이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생산량이 목표 수량에  미치지 못하게 되자 

스탈린은 이 모든 문제가 코샤크 지주들의 문제로 돌렸고 그들이 생산 농산물을 감춰놓았기 때문이라며

 어느 날 부농들의 농장을 급습하였다.

그리고 식용 또는 심지어 종자용의 모든 곡물과 소들을 탈취해 버린다. 

코샤크 지주들은 농사를 위한 소들마저 줄 수 없다며 모조리 도살 하기에 이른다. 

얼마 후 봄이와서 지주들은 농사를 지려고 하였으나 종자씨도 없고 

농사지을 소도 없어 결국 땅을 놀리게 되었고  이는 몇 달이지나 농촌에 대 재앙으로 찾아오게 된다. 

그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농민들과 어린이들이 떼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 사건은 20세기 최대의 학살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또한 그 사건은 1941년 독소전쟁 초기 우크라이나인들이 

나치 독일군을 해방자로 맞아들이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나중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러시아 정부에게 스탈린이 저지른 이 대기근 만행에 대한 

사과와 유가족에 대한 보상을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소련과 스탈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인정은 하고 있으나 

소련이 무너진 지금, 러시아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말이라 일축했다. 

 이 당시에 식인 행위가 널리 퍼졌다는 문서 자료 및 사진 자료까지 있다.

 이 당시 소련에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것은 야만인의 행위다.'라는

 포스터까지 제작해서 곳곳에 붙였고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아이들이나 연고자 없는

 이방인을 몰래 죽여서 사람고기시장이 열렸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사람고기 파는 시장을 찍은 사진까지 있었는데 

그 사진을 찍은 외국인 사진작가들은 자신도 그런 꼴이 될까봐 조마조마했었다고 한다.

 당시의 식인 사례를 보면 자기 자녀를 잡아먹을 수가 없어서 

자기 집 아이를 살았든 죽었든  옆집에 넘겨 먹게 하고 그 옆집 아이를 받아다 먹기도 했다고 한다. 

이 경우 특히 산 아이가 아니라 실제로 죽은 아이를 주고 받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현지 치안 당국조차 그냥 넘어가 주었을 정도였다.

 이처럼 산 아이를 죽은 아이라고 속여 서로 바꾸어 먹은 가족들이 총살당한 사례가

 당시 적발되어 처형된 식인 범죄자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아닌 말로 굶주린 사람들이 멀쩡한 사람을 잡아먹기란 쉽지 않으니, 

일단 만만한 것들을 잡아먹어서 기운을 차려야 하는 것이다. 

1978~1990년까지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55명 아이들과 여자를 죽이고 강간, 

심지어 시체를 먹기까지 한 연쇄살인마 안드레이 치카틸로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형이 사람들에게 잡아먹힌 걸 본 뒤로 

복수심을 가져 무작위로 사람을 죽였다고 진술한 바 있다. 

다만 그 당시 워낙에 흔했던 일이라서 이것의 진실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치카틸로는 1994년 처형당했다. 

곡식을 주웠다는 이유로 총살되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그리고 굶주림을 이기지 못한 어린이들이 기차에 매달려 탈출을 시도하지만

 대부분 체포되어 돌려보내지거나 고아원행 → 영양실조로 사망 테크를 밟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웃기는 건 이삭줍기 꼼수는 과거의 봉건영주 시절의 소작농들이 쓰던 방법인데 

이 때도 영주들이 고의로 이런 짓을 하면 엄벌하겠다고 단속하고 다녔다.

 사람들은 어떻게든 탈출을 시도했다. 루마니아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드니스테르(Dniester) 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월경을 시도했는데, 

많은 사람이 소련 국경 경비대에게 발각되어 도하 중 사망했다고 한다.

 강을 건넌 사람들은 루마니아에 수용되었다.

영화  랜드 오브 데드는  우크라이나에서 상영금지 되었다.

그 이유는 좀비들이 사람을 먹는게 이 고통스러운 시절을 기억하게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소비에트 연방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서부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로 만들었다.

 1941년에 소련을 침공한 독일과 이태리의 추축국 군대는 소련군을 격멸시켰다.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이 영웅도시라 칭한 키예프 전투에서는 66만 명이 넘는 소비에트 연방군이 포로로 잡혔다. 

처음에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였다.

하지만 나치 독일은 곧 대량 학살을 시작하여 유대인들과 우크라이나인 민간인들을 죽이거나 강제 추방 하

심지어 마을 전체를 불태워 없애기도 하였다.

 결국 우크라이나인들은 나치 독일의 지배가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보다도 악랄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독소전쟁 당시 나치 독일 치하의 우크라이나 민간인 사망자 수는 

5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7백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북서부 갈리치아 지방에서는 폴란드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 끼리

 서로 집단 학살을 저지르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독일과의 전투로 소련군은 약 1천 1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그 중 4분의 1이 우크라이나계 였다. 

우크라이나 민족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이태리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첫 민족이 되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독소 전쟁 당시 나치 독일로 인하여  국가 전체가 엄청난 피해를 겪었던 것이었다. 

 1941년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키에프로 함락시킨다.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인식했던 키에프 시민들은 그들을 처음에는 환영을 한다.

 키에프 함락시 소련군 50만 이상이 포로로 잡히거나 희생되게 된다.

 이 후 나치 독일군은 키에프 시민 10만을 바빈 야르 지역에서 살륙시킨다. 

그러한 살륙우로 키에프 시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고

 1943년 11월 6일 소련군이 다시 키에프를 회복 시킬때까지 그러한 고통은 지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후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는 서쪽으로 확장되어 

우크라이나인들이 사는 땅을 거의 모두 포함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4년에는 우크라이나에 의해 러시아 본토와 단절되어 있던 

크림반도가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것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시쵸프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우애를 과시하기 위해 

페레야슬라우 조약(코샤크 헤티만국이 모스크바 차르의 보호를 요청)의 

300주년을 맞아 우크라이나에 크림반도를 선물하였던것이었다. 

그것은 우크라이나 독립 후 양국간의 분쟁 소지가 되게 된다.



우크라이나 음식은 곡물과 감자, 배추, 콩버섯 같은 채소가 주요산물로 채식이 주종를 이루며 

고기는 대부분 거나 볶아 먹는다. 
디저트는 체리나 자두가 꿀과 함께 서빙된다.
작은만두  라레니키(YARENYKY)는 인기 있는 스낵이고 돼지 비게인 살로(SALO)는 신성한 음식으로 친다. 
살로의 전통은 1세기가 넘는 것으로 프랑스인이 와인에 매혹된 것처럼 
우크라이나인도 살로에 매혹되어 있다. 
보르쉬(BORSCHT)은 우크라이나에서 유래한 스프로 전국적으로 즐기고 있고
 소고기와 야채 스프는 전통적으로 크림과 같이 서빙 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음식을 제대로 맛을 볼려면 현재인 가정을 방문해야 한다. 
모순적으로 맛있는 우크라이나 음식은 우크라이나에서 찾기 어렵다.
 대부분의 고급 레스토랑은 유럽스타일의 음식을 판매하기 때문이다. 







photo from : Histom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