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쟁 범죄

피에 굶주린 일본군의 중국인 일본도 학살[Japanese Sword Soldiers thirsty for blood Chinese people slaughter]

슈트름게슈쯔 2014. 6. 13. 10:44




중국 난징 친화이(Qinhuai) 강가에서 학살당한 중국인들의 사체들을 바라보며 서있는 일본군 병사 - 1937년 












중국 침략 당시 일본도를 이용하여  중국인들을 목베어 죽이는 대량 학살을 저지르는  


살인마 일본군 장교  2명의 기사를 자랑스럽게 홍보하는 사악한 일본 신문의 기사  







 중일전쟁 당시 중국 난징을 침략한 일본군은 당시 일본군의 민간인에 대한 공격에서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학살을 경쟁적으로 부추겼다. 

신문은 이러한 살인 경쟁을 인터뷰하고 그 승자를 보도했다. 

그러한 인터뷰는 살인자를 자랑스러운 행위를 한 인물로 조작했고 그들의 용기는 기록되고 널리 알려졌다. 

이러한 포악한 살인경쟁중 하나를 난징 자금산 기슭에서 찾아볼수 있고

 이에 대한 기록은 주요신문에 실려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이 야만적이고 잔인한 행위는 보통사람의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난징을 공격하고 점령하던 무렵 주룽(난징 외곽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카타기리 파견부대에는 두명의 일본군 장교가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다케시였다.

 이 두명의 하급 장교들은 그들에게 용장(용기있는 장수)이라는 호칭을 받음으로써 

가장 강한 사무라이 정신의 소유자라는 것을 부각시킨 것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일본군 상관은 그들을 격려했고 살인 시합을 허가해 주었다. 

누가 먼저 난징을 점령하기 전에 100명을 죽이는 영광을 차지할 것인가라는 것이 경쟁의 목표였다. 

그들은 Tang산에 도착했을때 무카이도 시아키는 89명을, 노다 다케시는 78명을 죽였다. 

그들의 목표인 100명은 실패했지만 경쟁은 멈추지 않았다. 

비록 두명의 장교 모두 목표를 채우진 못했지만 그들의 상관은 그들의 노고를 저버리지 않았다. 

상관은 여러차례 격려하고 포상했고 그들의 분투를 뒷받침했다. 

오사카의 마이니치 신문과 도쿄의 니치니치 신문과 일본광고지(영문판)은 이 살인경쟁을 기사화 했다.

 무카이도 시아키와 노다 다케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명예가 수그러드는것을 원치 않았고 난징함락후 

자금산 기슭에서 두명의 장교는 경쟁을 계속 이어 갔다. 

이미 무카이도 시아키는 106명을 노다 다케시는 105명을 죽였지만 

누가 먼저 100명을 기록했는지 알지 못했다. 

둘다 목표는 넘어 섰지만 누가 먼저 달성 했는지 알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경쟁을 '친선게임'으로 생각했고, 무카이도 시아키는 '재미있는것'이라고 말했다.

 그 시점에서 승자를 가리지 못하자 두장교는 150명으로 목표를 바꾸거나 

1000명을 목표로하는 큰계획을 생각했다.

 계획을 수정한후 두장교는 경쟁에서의 즐거움을 계속해 느꼈다. 

("어느 기록에 의하면 무카이도 시아키는 250명을 죽여 노다 다케시를 크게 앞질렀다. 

그래서 노다 다케시는 1000명을 목표로 하는 경쟁을 무카이에게 제안했다." )

 자료 :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1938년 2월 9일자







photo from : www.sickchirps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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